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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Nov 14. 2015

조선왕과의 만남(34)

선조원비 및 계비 능


제14대 선조원비 의인왕후 1555~1600(46세) 


▐  목릉(穆陵) 사적 제 193호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4-3 (동구릉 내)


의인왕후 박씨는 도총부총관 박응순의 여식으로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1569년(선조2) 15세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그녀가 가례를 올리기 전 선조에게는 이미 소주방(燒廚房) 나인으로 있다가 승은을 입어 후궁이 된 공빈 김씨가 있었다. 


당시 선조의 승은(承恩)을 받은 후궁들 사이에서는 자신의 아들이 세자로 책봉받기 위한 각축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런 연유로 왕비가 된 박씨는 자식의 생산을 기원하기 위해 팔도각지에 원찰을 설치하고, 건봉사와 법주사 등을 비롯한 여러 사찰에 자주 재물을 베풀었다.



인왕후는 아이를 갖지 못하는 몸이었다. 때문에 선조는 공빈 김씨를 총애했고 박씨는 왕비임에도 불구하고 왕실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후덕한 성품의 의인왕후는 후궁들의 자식들을 친히 보살피며 후궁들에게도 관대하여, 살아있는 관음보살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공빈 김씨는 선조 7년  왕의 서장자인 임해군을 낳고, 둘째 광해군을 낳은 지 2년 뒤인 1577년(선조10)에 산후병으로 죽었다. 의인왕후 박씨는 어린나이에 어미를 잃은 임해군과 광해군을 친자식처럼 보살폈고, 광해군을 유달리 총애하여 그가 세자로 책봉되는데 적극적인 후원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공빈 김씨가 죽자 선조의 총애는 후궁 인빈 김씨에게로 옮겨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인빈 김씨만 데리고 피난을 떠났고 의인왕후는 선조와 떨어져 평안도 강계로 피난을 갔다. 한성이 수복되자 선조는 인빈 김씨를 데리고 환도했지만 의인왕후는 여전히 해주에 머물렀다.


다시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선조가 또다시 인빈 김씨를 데리고 피난을 떠나며 의인왕후는 왕세자 광해군과 함께 피난길에 올라야했다. 선조의 박대로 인한 마음고생과 연이은 피난길로 허약해진 의인왕후는 두 차례의 왜란이 끝난 후에 병을 얻어 선조 33년, 소생 없이 46세로 세상을 떠났다. 



선조는 의인왕후의 죽음 앞에서 『투기하는 마음과 의도적인 행동, 수식하는 말 같은 것은 마음에 두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권하여도 하지 않았으니 대개 그 천성이 이와 같았다. 


인자하고 관후하며 유순하고 성실한 것이 모두 사실로 저 푸른 하늘에 맹세코 감히 한글자도 과찬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덕망 높은 박씨의 죽음을 슬퍼하며 칭송했다 한다. 능은 [동구릉] 경내 위치한 목릉으로 부군인 선조와 계비인 인목왕후의 같은 능역 내에 묻혀있다.



제14대 선계비 인목왕후 1584~1632(49세)


    

▐  목릉(穆陵) 사적 제 193호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4-3 (동구릉 내)

      

인목왕후 김씨는 연흥부원군 김제남의 여식으로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선조는 정비 의인왕후가 사망하자 2년 뒤인 1602년(선조35) 바로 계비를 맞이하였다. 당시 선조는 이미 51세였고 후처가 된 운명의 여인, 인목왕후 김씨는 19살 이었다. 이때 광해군의 나이 28살 이었으니 인목왕후는 광해군보다 9살 연하였다. 


새파랗게 젊은 인목왕후가 공식적인 광해군의 어미가 되어 광해군은 인목왕후를 모후로 모실 수밖에 없었다. 김씨는 1606년(선조39) 선조의 유일한 적자인 영창대군을 낳았으나, 임진왜란을 거치는 과정에서 이미 서자인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된 뒤였다.



1608년 선조가 위중해지자 광해군에게 선위하는 교지를 내렸다. 이때 소북파 유영경이 이를 감추고 영창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으나 대북파 정인홍 등에 의해 음모가 밝혀졌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임해군을 교동에 유배하고 유영경을 사사함으로서 [소북일파]는 몰락하고 [대북파]의 정인홍이이첨 등이 득세하게 되었다.


광해군은 당쟁의 폐해를 잘 알고 있었기에 이를 억제하려 했지만 [대북파]의 책동으로 오히려 왕통의 취약성을 은폐하기 위해, 역적의 누명을 씌워 친형인 임해군과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제거하였다. 이후 정인홍을 중심으로 인목대비의 폐모론이 주창되었고 이이첨허균 등이 적극 주장하였다.  


인목왕후 (illustrator / 이철원)

1612년(광해군4) 이들의 사주를 받은 윤인에 의해 살해될 뻔했으나 박승종의 저지로 목숨을 보전했다. 1613년 [대북파]의 모략으로 어린 영창대군이 강화도로 유배됐으며 아비 김제남이 사사되는 등 친정이 멸문지화를 당하고, 인목대비 김씨 자신도 1618년부터 5년 동안 서궁(西宮)에 유폐되었다. 


광해군의 입장에서는 갈 때까지 가는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기에 두 사람은 영원히 화해할 수 없는 관계가 되어 버렸다. 또한 [대북파]는 인목대비를 대왕대비에서 후궁으로 격하시키는 폐모정청(廢母庭請) 사건을 일으켰다. 



이는 조선 500년사에 자식이 어미를 폐위시켜 쫓아낸 유일한 사건이었기에 당시 유학자들에게 용납될 수 없는 사건이었다. 1623년 [서인]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과 [대북일파]를 몰아내고 대권을 잡자, 김씨는 다시 대왕대비로 복위되고 인경궁의 흠명전(欽明殿)을 거처로 삼았다. 


반정세력들은 광해군을 폐위하고 인조를 왕으로 책봉하는 일체의 권한을 대비에게 부여했는데, 이때 광해군을 폐위하는 인목대비 교서(인조실록1권)에는 그녀의 한(恨)과 증오가 잘 나타나 있다.『불행히도 선조대왕께서 적자가 없어 임시방편으로 장유의 차례를 무시하고 광해군을 세자로 삼으셨다.』

 


『광해는 세자로 있으면서 덕을 많이 잃었다. 만년에 대왕께서는 세자를 잘못 세운 것을 후회하셨다. 광해는 왕이 되어서도 못된 일을 무수히 했다. 내가 비록 덕이 없으나 천자(天子)의 고명을 받아 선왕의 배필이 되어 국모로 있은 지 여러 해가 되었다. 


따라서 선조대왕의 자식들은 나를 어머니로 여겨야 할 것이다. 그러나 광해는 참소하는 못된 신하들의 말을 믿고 스스로 의심을 일으켜, 나의 부모를 죽이고 친족들을 몰살시켰으며 품속에 있는 어린아이를 빼앗아 죽였고 나를 욕보여 사람으로서 도리를 돌보지 않았다. 이에 광해를 폐위시키노라.』


인목왕후 능

인조반정은 광해군이 형제를 죽이고 어머니를 폐했다는 패륜론을 명분으로 삼았기에, 인목대비와 광해군의 불화는 반정 성립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인목대비의 서궁 유폐생활뿐만 아니라, 광해군과 영창대군의 치열한 권력다툼은 인목대비 측 인물이 쓴 계축일기(癸丑日記)에 전해지고 있다. 


인목대왕대비는 인조의 왕통을 승인한 왕실의 최고 어른의 위치에 있으면서 가끔 국정에 관심을 표하여, 한글로 하교를 내리기도 했다. 그녀는 선조와의 32살의 나이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가례 6년 만에 남편을 여의어 한 많은 삶을 살다 인조 9년 49세에 이승을 떠나 목릉에 가련히 잠들어 있다.


인목왕후 능에서 바라본 정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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