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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Nov 21. 2015

조선왕과의 만남(35)

광해군 묘_01


제15대 광해군 1575~1641 (67세) / 재위 1608.02 (34세)~1623.03 (49세) 15년 1개월


Source: Chang sun hwan/ illustrator


▐  광해군 묘(光海君 墓) 사적 제 363호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릉리 산59 


광해군의 묘는 교회 공원묘지인 영락동산 내부로 들어가 통행로를 한참 오르면서 철망울타리로 경계를 이룬 비탈길 옆에 자리하고 있다. 철망 쪽문은 굳게 잠겨있고 "광해군 묘"라는 표지판과 "참배 외 다른 목적은 금한다"는 안내판이 서있다. 그 울타리 너머 심한 비탈위에 한때는 조선의 국왕이었던 광해군문성군부인 유씨가 나란히 쌍분을 이루어 쓸쓸히 누워있다.


두 무덤 앞에는 비석과 장명등이 설치돼있고 한 쌍의 혼유석작은 문인석이 배치되어 있으나, 조선 왕릉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난간석이나, 무인석, 동물석상을 갖추지 못해 묘가 더욱 초라해 보인다. 광해군 묘 뒤쪽으로는 친형 임해군과 생모 공빈 김씨의 무덤이 제각기 흩어져 있다.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광해군은 제주도로 유배 온지 4년이 지난 즈음, 1641년(인조19) 7월 이승을 떠나 제주도에 묻혔다가 1643년 공빈 김씨 묘가 있는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릉리로 이장되었다. 그는 유배지에서 숨을 거두며 모친의 무덤 곁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겨 성묘(成墓: 공빈 김씨 묘) 우측에서 2km 떨어진 언덕위에 묻혀 어미를 바라보고 누워있다.


광해군은 즉위 이후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며 1610년 모친을 공성왕후로 추존하고 왕비릉에 준하여 묘의 석물을 조성했으며 능호를 성릉(成陵)이라 했다. 그 연유로 남양주 [송릉리]의 지명은 소나무가 많고 성릉이 있는 마을이라는 송릉(松陵)에서 유래되었다.


     

광해군선조의 둘째 아들로 후궁 공빈 김씨의 소생이다. 그는 3살 때 어미의 죽음으로 친형인 임해군과 함께 매우 외롭게 자랐다. 하지만 천성적으로 총명하고 효심이 깊었던 광해군의인왕후 박씨는 매우 총애하여 친자식처럼 길렀으며 세자로 삼으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선조가 어린 왕자들을 불러 모아 "반찬감 중에 무엇이 으뜸이냐"라고 묻자 유독 광해군은 소금이라 답하여, 그 이유를 물으니 "소금이 아니면 백가지 맛을 이루지 못하나이다."라고 했다한다. 또한 "너희가 부족하게 느껴지는 점이 무엇인가?"라고 묻자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어 마음이 아프옵나이다."라 했다는 기록에서도 그의 총명함과 효심을 엿볼 수 있다.



선조는 슬하에 열세 명의 서자가 있었다. 선조는 그들 중 광해군의 자질이 뛰어난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적통계승자가 아니라는 콤플렉스 때문에 은근히 자신의 적자소생이 태어나길 기다리며, 세자책봉을 결정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공빈 김씨 소생의 장남 임해군이 성인이 되도록 정비 의인왕후 박씨가 자식을 갖지 못하자, 선조는 하는 수 없이 임해군을 세자로 삼으려 했으나 정통성을 따지던 반대파들이 임해군의 성격이 난폭하다고 문제를 삼아 세자책봉이 미뤄지고 있었다.


선조가 40세를 넘기자 서인의 좌의정 정철광해군을 세자로 주청하다 동인들의 모략으로 귀향을 가게 되었으며 이후 세자책봉 문제는 일체 거론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국난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18세의 광해군은 피난지 평양에서 세자에 책봉되었다.


광해군과 선조

선조와 함께 의주로 피난을 가는 길에 영변에서 갈라져 선조는 의주로 향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광해군은 분조(分朝)를 위한 국정권한을 위임받아 평안도지역으로 출발했다. 이때 그는 분조를 통해 왕위 계승자로서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그는 임진왜란 기간 중 조정의 건재함을 적극 홍보하여 백성들이 희망을 잃지 않도록 독려하고 평안도, 강원도, 황해도 등지를 돌면서 민심을 수습하며 왜군에 대항하기 위한 의병을 모집하는 등 적극적인 분조활동을 하다가 돌아와 행재소(行在所)에 머물던 선조와 합류하였다.


illustrator / 정윤정

   1594년 윤근수를 명나라에 파견해 세자책봉을 주청했으나 명은 장자 임해군이 있음을 이유로 거부하며 광해군에게 세자에서 물러나라고 5번이나 종용했다. 당시 명황제 신종(神宗)은 총애하던 귀비의 소생을 의식해 적장자(光宗)의 황태자 책봉을 미루고 있었다.


명조정은 신종이 적장자를 제치고 서자인 차남을 황태자에 앉히는 명분을 차단코자 조선왕의 차남을 세자로 승인해 줄 수 없었다. 한양이 수복되고 명의 요청에 따라 방위체계를 위한 군무사(軍務司)가 설치되자, 광해군은 이를 주관하며 수도방위에 힘썼다.


1597년 정유재란이 발생하자 전라도와 경상도로 내려가 군량과 병기 조달활동을 하며 백성의 안위를 돌보는 등 전란 중 국가안위를 위해 노력하였다. 1606년(선조39) 계비 인목왕후에게서 영창대군이 탄생하자 광해군은 서자이며 차남이라는 이유로 영창대군을 후사로 삼을 것을 주장한 [소북파]와 광해군을 지지하 [대북파] 사이에 분쟁(分爭)이 확대되었다.



선조는 이미 세자로 책봉한 광해군 대신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할 것을 영의정 유영경과 비밀리에 의논했는데 이를 눈치를 챈 이이첨정인홍은 세자교체 불가론을 주장하다, 선조 비위를 거슬러 귀양을 가게 되었다. 선조는 자신의 적통 영창대군과 7년간의 전란 중 많은 공을 세운 광해군을 저울질하며 갈등하다가, 1608년 갑자기 병석에 눕게 되었다.


병환이 위중해지자 어의(御醫) 허준은 심혈을 기울여 옥체를 돌보았으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조광해군에게 선위(禪位)하라는 전교를 내리고 이승을 마감하였다. 선조가 세상을 떠나자 영의정 유영경이 왕세자 광해군 대신 어린 영창대군에게 보위를 잇게 하려고 획책하였다.


당시 선조의 죽음을 놓고 아침까지 정상이었던 선조가 집무를 보며 광해군이 올린 음식을 들고 갑자기 쓰러져 사망했기 때문에 광해군을 옹립한 이이첨과 김상궁(개시)이 선조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조정은 [소북파]와 [대북파]간에 큰 파란이 일고 있었다.



조선왕조 당쟁사인 당의통략(黨議通略)에는 선조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자, 유영경이 "오늘의 전교는 여러 사람들의 뜻밖에 나온 것으로, 신은 감히 받들지 못하겠나이다."라며 반대하고 군사를 동원해 궁궐 안을 호위하며 비상시를 대비했다고 전한다.


또한 인조 조의 연려실기술에는 "개똥이(김개시)는 선조 때의 늙은 궁인이다. 선조에게 사랑을 받았는데 사람됨이 흉악하고 교활했다. 선조가 세자를 바꿀 뜻이 있었기 때문에 광해가 스스로 불안해한 것을 파악해 은밀히 광해와 접촉하며 뒷날의 계획을 세웠다. 선조를 시해하는 참변도 그녀 손에서 나왔으나 광해는 실로 사전에 음모에 관계한 사실이 없다고 한다."라고 기록돼 있다.


더욱이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 자신이 광해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던 인목대비에게 "광해군이 매우 무도하긴 하지만 군림했던 사람을 처해서는 안된다."며 광해군을 변호한 기록을 보면 아마도 선조의 독살의혹은 광해군을 저주하던 인목대비의 원한 섞인 의심일 뿐이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광해군과 인목대비

이때 귀양길을 차일피일 미루던 정인홍이 도승지 유몽인을 통해 [소북파] 유영경의 음모를 밝혀내며 광해군은 [대북파]의 지지를 받아 어렵사리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왕위를 위협하는 상황이 산재한 가운데, 즉위 직후 왕권강화를 빌미로 선조말년에 자신을 반대하고 영창대군을 지지했던 세력들을 제거하며 친형인 임해군을 강화 교동에 유배하고 유영경을 사사했다.


이어 자신의 왕위계승을 명나라에 알리고자 사신을 파견했는데 이때 명나라는 장자인 임해군을 왕으로 즉위시킬 것을 주장하고 나섰다. 결국 조선에 명의 사신이 보내지면서 조정은 임해군에게 미친 행세를 하도록 강요해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다.


때문에 자신의 입지를 불안해하던 광해군 이이첨과 결탁해 이듬해 자객을 보내 임해군을 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선조의 적자(嫡子)이자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으로 인해 계속 정통성 문제가 불거지면서 영창대군의 존재는 항상 광해군에게 적지 않은 부담으로 남아 있었다.



이러한 때 1613년(광해군5) 양반가문의 서자 7명이 연루된 강변칠우(江邊七友)라는 모반사건이 발각되었다. 이들은 서자로서 관직진출이 막힌 것에 대해서 울분을 품고 있던 중, 모사를 꾸미기 위한 자금 확보를 위해 은상(銀商)을 살해하고 은을 약탈한 사건을 일으켰다.


이들을 취조하던 포도대장 한희길이이첨의 사주를 받아 이 사건을 인목대비의 친정아비인 김제남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한다는 역모로 꾸며, 칠서(七庶)들에게 허위자백을 받아내고 서양갑 등을 무고(誣告)해 계축옥사를 일으켰다. 당시 서양갑(徐羊甲)은 허균이 "친히 기른 자"이며 서영갑의 자(字)는 허균이 지어준 것이라는 상소가 올라오기도 했다.



이로 인해 김제남은 역모 죄로 몰려 서소문 밖에서 처형되고 영창대군도 서인(庶人)으로 강등돼 강화도에 유배됨으로서 지난날 선조영창대군을 왕세자로 삼으려던 일로 발생한 갈등이 끝나는 듯했다. 하지만 영창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계속되자 이이첨은 1614년 강화부사 정항으로 하여금 영창대군을 증살(蒸殺: 방에 불을 많이 때워 죽임)하게 하고, 1618년에는 폐모론에 따라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켰다.


광해군의 주변 친인척은 자신의 지지기반 세력이었던 대북파에 의해 모두 죽임을 당했다. 이는 왕권을 지키기 위한 광해군의 고육지책으로 판단되지만, 이러한 정치행위는 서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며 결국 [서인] 주도의 반정에 의해 그 역시 폐위되고 말았다.


illustrator / 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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