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주 Nov 21. 2015

조선왕과의 만남(36)

광해군 묘_02


제15대 광해군 1575~1641 (67세) / 재위 1608.02 (34세)~1623.03 (49세) 15년 1개월

      


▐  광해군 묘(光海君 墓) 사적 제 363호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릉리 산59


광해군은 자신의 통치에 장애가 되는 요소들을 하나씩 제거해 가며 왕권을 강화하였다. 즉위 원년(1608) 선혜청을 두어 각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게 하던 공납제를 폐지하고 경기도에 한해 특산물을 쌀로 바치게 한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해 백성들의 고충을 덜어주고 안정적인 국가재정을 확보하며 전란으로 황폐해진 나라를 재건하는데 주력하였다.


1611년 양전(量田)을 실시해 경작지를 넓혀 재원을 확보하고 허준을 지원해 동의보감 편찬을 마무리했다. 병화로 소실된 서적을 재간행하고 "국조보감", "선조실록" 등을 편찬하며 적상산성에 사고(史庫)를 설치했다. 허균의 "홍길동전" 저술도 이때 나왔으며 1616년 담배가 류큐(琉球:오키나와)에서 들어와 크게 보급되었다.

 

Source: Chang sun hwan/ illustrator

그는 전란으로 폐허된 한성부의 질서를 회복코자 궁궐공사에 과단성 있는 정책을 시행했다. 당시 조선은 전란이 끝난 직후라 뒷수습을 위한 전후복구 사업으로 광해군 원년 창덕궁과 창경궁의 중건 및 경희궁과 인경궁의 창건을 추진하였다.


이때 새로 지은 [경희궁]과 [인경궁] 터는 선조의 5남인 정원군(인조생부)의 사저로 사용되던 곳인데 1615년(광해군7) 경운궁(덕수궁)에서 복원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긴 후 창경궁의 중건공역이 진행되고 있던 도중 풍수승(風水僧) 성지에 의해 이곳에 왕의 기운이 서려있다는 왕기설이 제기되었다.



때문에 광해군은 인왕산의 왕기(王氣)를 누르기 위해 인왕산 기슭아래 있던 정원군 사저 터를 몰수해 왕궁을 지었다는 야사가 전해진다. 이러한 광해군의 궁궐 조성사업은 무리한 토목공사를 시행하는 바람에 재정의 악화와 민심이 이탈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무렵 만주에서는 여진족의 세력이 나날이 커지면서 신흥국가로 성장해 1616년 후금(後金)을 건국하며 조선을 압박하고 있었다. 광해군후금에 대해 신중한 중립외교를 전개하며, 이에 대비해 대포를 주조하고 성지와 병기를 수리하며 군사를 양성하는 등 국경방비에 힘썼다.



그는 향후 이 쇠퇴하고 후금이 흥하는 대륙정세를 간파하고 신중한 중립외교를 폈는데 이 후금을 치기위해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자 강홍립에게 1만의 병사를 주어 명나라를 지원토록 하였다. 그러나 형세를 잘 관망해 후일을 도모토록 밀명을 내리고 부차(富車)싸움에서 의도적으로 패한 뒤 후금에 투항하게 하는 능란한 양면외교 솜씨를 보임으로써 후금과의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이때 강홍립이 오랑캐에게 항복했다는 소문이 전해지며 그의 식솔을 사사하라는 상소가 빗발쳤으나, 광해군은 이를 철저히 무시해 버렸다. 또한 1609년 일본사신의 한성상경을 허락하지 않고 부산포 왜관 등 제한된 범위 내에서만 출입을 허용하는 기유약조를 체결해 전란 후 중단됐던 외교를 재개했으며, 1617년 오윤겸 등을 회답사로 일본에 파견해 조선인 포로를 귀환시켰다.



이처럼 광해군은 조선을 둘러싼 대외관계에서 실리외교를 지향하는 전향적 자세를 보였다. 광해군이 재위했던 15년간은 [대북세력]이 조정의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다. 급진적인 [대북세력]은 왜란 중에 의병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며 그 여세를 몰아 [소북파]를 제압하고 권력을 잡아 광해군을 지원하고 있었다.


광해군은 세자시절부터 사림의 정치가 부국강병에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하고 정통 주자학을 비판하며 등극 후 당쟁의 폐해를 막기 위해 당대의 충신 이원익을 등용하고 초당파적으로 정국을 운영하려 노력했으나 결국 [대북파]의 계략에 빠져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대북세력의 영수인 정인홍은 집권을 위한 세력다툼으로 1611년(광해군3) 문묘종사 문제를 둘러싸고 이를 저지하려고 이언적이황을 비방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반발한 성균관 유생들에 의해 정인홍이 청금록(靑衿錄: 유생 인적사항명부)에서 삭제 당하게 되자, 광해군은 유생들을 모조리 퇴관시키는 등 큰 파문을 일으켰다.


광해군 핵심참모 정인홍(illustrator / 정윤정)

조선은 유학을 기본질서로 삼았기에 종사(宗社: 종묘사직)가 나라의 틀을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문묘종사에 올려 진 인물은 그의 학문과 사상이 조선의 국사(國事)이자 유생들에게 추앙받는 현자(賢者)의 의미였다. 하여 문묘종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세력들이 [사림파]였다.


당시 [훈구파]와 대립하고 있던 [사림파]는 이념적 차별성을 내세우기 위해 문묘에 자신들의 스승을 종사하려했다. 중종 조에 조광조정몽주김굉필의 공을 내세워 문묘종사를 주장했으나 무오사화로 인해 [사림]이 약화되면서 관철되지 못했다.


이후 선조 조에 [사림파]가 조정을 장악하자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조광조 등의 문묘종사 상소를 올리며 이황까지 거론한 끝에 결국 1611년(광해군3)에 조선 5현이 정리돼 문묘에 종사되었다. [대북파]의 전횡은 계속되며 정인홍이이첨은 이듬해 김직재의 무옥을 일으키며 선조의 손자 진릉군을 죽이고 백여 명의 [소북파]를 처단하였다.



또한 김제남을 사사하고 영창대군의 살해하는 한편 1617년 폐모론을 발의해 그 이듬해에 인목대비의 서궁 유폐를 주도하였다. 이렇듯 광해군의 실정은 대부분 [대북파]의 책동에 의해 발생된 것이었지만, 전란이후 어려운 민생을 외면한 채 궁궐중건에 지나치게 힘을 쏟아 부음으로서 민심이 이반됐고 왕실 간에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이 유교적 사회통념을 무너뜨림으로서 마침내 광해군은 불편부당의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이때 정치적으로 소외돼 불만을 품고 있던 사림의 [서인세력]이 배명친금(排明親金)과 폐모살제(廢母殺弟)의 이유를 명분으로 내세워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은 1623년 폐위되어 강화로 유배됐다가 다시 제주도로 이배(移配)됐다.

     

제주도로 위리안치 되는 광해군

그는 세자로 있을 무렵부터 폐위될 때까지 성실하고 과단성 있게 정사를 처리했지만 선조 조에 정철을 위시한 [서인]들에게 강경하게 대처했던 [북인]들의 강력한 지지로 왕의 자리에 오른 후, 세자시절 내내 그를 불안하게 했던 왕위에 대한 조바심 때문에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대북파]의 장막에 의해 판단이 흐려졌다.


특히 인재를 기용함에 있어 [남인]과 [서인]을 푸대접하는 등 파당성이 두드러져 반대파의 질시와 보복심을 자극하게 되었다. 훗날 인조반정을 정당화하기 위한 책략과 명분에 의해 광해군은 패륜적인 혼군(昏君)으로 규정되어 왕의 묘호도 갖지 못하게 됐지만, 그는 붕당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된 군주로서 광해군의 공과(功過)는 같은 반정에 의해 희생된 연산군과는 역사적 해석을 달리해야할 것으로 보인다.



반정으로 왕위에 올랐던 인조는 국제정세를 파악하지 못하고 망해가는 을 섬기며 후금을 배척하다가 조선역사에 가장 치욕적인 병자호란을 초래하였다. 4백여 년 전 왜란을 도왔던 과의 의리를 지키려했던 [사림세력]들과 현실을 냉정히 꿰뚫어 의리조차 저버렸던 왕과의 갈등을 지켜보면서, 예나 지금이나 통치권에 대항하는 정적을 포용하는 조화로운 정치가 결코 녹록치 않음을 새삼 느껴본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폐출된 광해군은 강화도 교동 등지에서의 14년을 포함해 총 18년간의 귀양살이를 했다. 강화도에 폐비와 폐세자폐세자 비가 함께 유배되었는데 폐세자가 사사되면서 세자빈은 자살을 하였고 폐비 유씨도 1년을 넘기지 못하고 화병으로 사망했다.



홀로 남은 광해군은 1636년(인조14) 겨울 병자호란이 발발하며 조선왕실이 강화로 피난을 오자 인근 교동도로 옮겨졌다가 이듬해 음력 2월, 63세 다시 제주도로 유배지를 옮기게 되었는데 이는 후금(後金)에 굴복한 인조가 혹시 있을지 모를 광해군의 복위 움직임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조치였다.


때문에 조정에서는 광해군에게 유배지를 알리지 못하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배를 탈 때에  배의 사방을 모두 가리어 외부에서 폐왕을 보지 못하도록 하여 제주에 유배시키는 것을 비밀리에 행하였다. 하지만 인조는 엄동설한의 추위를 염려해 겨울옷을 하사하기도 했다.


Source: Chang sun hwan/ illustrator

광해군은 제주 땅에 위리안치(圍籬安置) 된지 4년 만에 67세를 일기로 "내가 죽으면 어머니 무덤 발치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파란만장 했던 삶을 마감했다. 제주 귀양길에 광해군이 지었다는 시가 인조실록에 전해지고 있어 당시 비통해 했을 폐왕의 처연한 심정을 헤아려 본다.


"궂은 비바람은 성(城) 머리를 모질게 휩쓸고 음산한 기운 속에  높은 다락(누각) 솟았구나. 바다의 성난 파도 저녁녘을 재촉하고 수심어린 푸른 산은 가을빛을 띠었구나. 고향으로 가고픈 이 마음 봄풀마저 보기 싫은데, 머나먼 객지에서 소스라쳐 꿈을 깨네."     



제15대 문성군 부인 1577 ~ 1623 (47세)


폐비 유씨광해군의 부인으로 문성군 부인이라 한다. 유씨가 광해군과 혼인해 선조에게서 받은 작호가 文城郡 夫人이다. 그녀는 판윤 유자신의 셋째 여식으로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1587년(선조20) 선조의 둘째 아들인 광해군과 가례를 올려 정1품 군부인에 봉해지고 1592년(선조25) 임진왜란 때 국난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자 세자빈에 올랐다.


1602년(선조35) 광해군의 계모 인목왕후 김씨가 19세에 왕비로 간택돼 시어머니가 되었을 때 며느리 유씨는 26살이었다. 당시 명나라의 세자책봉 고명을 받지 못하던 차에 인목왕후가 적자 영창대군을 낳자 선조는 광해군과 며느리의 문안조차 받으려하지 않았다.  

   

어느 날 유씨는 아들이 병들어 대전 약방에 궁녀를 보냈다가 거절당해 할 수없이 동궁 약방에서 약을 처방하였으나 끝내 그 아들이 죽게 되자, 이 일을 인목대비의 탓으로 돌리고 시어미를 원망하였다. 그러던 중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유씨가 32세에 왕비로 진봉되자 그녀의 친정세력들까지 가세해 백성들에게 재물을 받고 매관매직 등의 비리를 일삼고 있었기에 광해군 조정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점차 병들어가고 있었다.

 


결국 1623년 3월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반정을 일으켜 왕으로 즉위하면서 광해군과 함께 유씨도 폐위돼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그녀는 귀향길에서 광해군에게 차라리 자결할 것을 여러 차례 종용했을 정도로 기개 있는 여인이었다. 그 해 6월 역시 유배생활을 하던 아들 폐세자 질과 며느리 폐세자빈 박씨가 몰래 땅굴을 파고 탈출하려다 붙잡혀 죽은 사건이 있었으며, 친정의 오라비인 유희분유희발도 참형을 당했다.

     

그녀는 같은 해 10월 연속된 가족참사에 괴로워하다가 폐위된 지 7개월여 만에 결국 병을 얻어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그녀는 양주 적성동에서 장사를 지냈으며 폐비인 까닭에 능이 아닌 묘로 조성하였고, 광해군이 사망한 뒤 광해군의 무덤 옆으로 이장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조선왕과의 만남(35)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