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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Nov 22. 2015

조선왕과의 만남(37)

인조릉_01


제16대 인조 1595~1649 (55세) / 재위 1623.03 (29세)~1649.05 (55세) 26년 2개월 

      

Source: Chang sun hwan/ illustrator


▐  장릉(長陵) 사적 제 203호 /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 산25-1


파주시 통일전망대가 있는 성동리에서 금촌읍으로 넘어가는 작은 고갯길 갈현재의 나지막한 야산자락에 인조와 원비 인열왕후가 전방(前方) 한강의 지류인 공릉천을 바라보며 잠들어있다. 장릉은 당초 현재의 능역이 아닌 다른 곳에 있었다. 


병자호란 발생 한해 전인 1635년(인조13) 12월 인열왕후가 산후병으로 죽자, 파주 문산읍 북쪽 운천리 주변의 750여기 무덤을 이장시키고 이듬해 4월 운천리 언덕에 장릉을 조영했다. 인조는 세상을 먼저 떠난 원비를 애닮아 하며 자신도 사후 아내 곁에 나란히 묻히고자 이곳을 수릉지(壽陵地)로 택하고 인조27년 5월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면서 그해 9월 원비 곁에 쌍릉으로 예장되었다.



이후 능원에 화재가 발생하고 능 주위에 뱀과 전갈이 무리를 이뤄 석물 틈을 파고드는 변고가 지속되자 1731년(영조7) 파주 교하고을에 북좌남향(子坐午向)의 능을 조영해 천장하였다. 이때 능침의 형태가 쌍릉에서 합장릉으로 바뀌면서 옛 능의 병풍석, 난간석이 새 능의 규모에 맞지 않아 새롭게 만들었다. 


천장된 장릉 병풍석에는 전통적인 구름문양과 십이지신상 대신 새로운 양식으로 연꽃과 모란꽃(牧丹) 문양을 새겨 넣었다. 따라서 인조 장릉은 옛 능에 있던 문무인석 등의 석물과 새로 세운 병풍석 등이 섞여 17세기와 18세기의 왕릉석물이 함께 어우러져있다. [파주삼릉]에서 제법 떨어져 홀로 있는 장릉은 울창한 소나무 숲에 둘러싸여 있다.


인조 합장릉

인조선조의 다섯째 아들인 정원군(추존왕 元宗)의 맏아들로 임진왜란 때 왕족들의 피난 도중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선조의 적손이 아닌 서손(庶孫)으로 1607년(선조 40) 능양도정에 봉해졌다가 후일 능양군으로 진봉됐다. 선조는 슬하에  14남 11녀를 두었으나, 늘그막에 얻은 영창대군 외에는 모두 후궁 소생이었다. 


인조능양군 시절 아우인 능창군이 모함을 받아 반역죄로 17세에 죽임을 당하고 이로 인한 화병으로 아비 정원군이 40세에 세상을 떠나는 것을 지켜보며 광해군에 대한 증오를 키워가고 있었다. 인조의 생부 정원군 슬하에는 능양군을 포함한 능원군, 능창군, 능풍군의 네 명의 자식이 있었다.


    

이들 중 능창군은 무예에 능하고 활달한 성격으로 인망이 높았던 반면 능양군(인조)은 말수가 적고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소심한 성격이었다. 능창군의 세문동(경희궁 터) 집에 왕기가 서려있고 그가 광해군의 왕위를 위협한다는 역모 죄로 죽었을 때 능양군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가 과묵한 성품으로 크게 눈에 띄지 않는 인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광해군을 둘러싼 대북세력(東人)이 집권하며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하며 몇 차례의 옥사를 일으켜 조정이 혼란해지자, 1623년 서인세력반정을 도모해 西宮(경운궁)에 유폐돼있던 인목대비의 윤허를 받아 광해군을 폐출하고 능양군을 추대함에 따라 경운궁(현 덕수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인조와 함께 반정을 주도한 자들은 김류김자점이귀이괄 등 [서인세력]이 중심축이었다. 인조실록에는 반정 동기를 광해군의 실정으로 기술하고 있지만 사실은 권력중심에서 소외돼 있던 [서인세력]이 일찍부터 반정을 계획하며 광해군에 대한 인조의 개인적인 원한을 부추겨 왕위를 찬탈한 것이다.


인조는 당시 거사계획이 누설될 위기에 처해지자 실행예정일 보다 서둘러 반정을 일으키며 직접 군사를 진두지휘했다. 그날 7백여 명의 반정군이 홍제원(弘濟院)에 집결하여 새벽녘 세검정 정자 밑 개울에서 칼을 씻으며 의지를 다졌는데, 이런 연유로 이곳은 "칼을 씻은 정자"라 이름 붙여 세검정(洗劍亭)으로 불리게 되었다.


김류를 총대장으로 삼아 늦은 밤 창의문(자하문)을 통해  창덕궁으로 쳐들어가 도끼로 돈화문을 부수고 불을 질렀다. 광해군은 불이 나기 직전에야 반정이 있다는 보고를 받았으나 이때는 이미 궁궐 대부분이 반정군에 의해 점령되었을 때였다. 


세검정 (illustrator / 윤희철)

광해군이 북문 담을 넘어 몸을 피하자 반정군은 인목대비가 있는 西宮(덕수궁)으로 달려갔다. 대비가 죄인을 봐야겠다며 반정군의 말을 믿지 않자, 인조는 궁궐 밖 의관(醫官)의 집에 피신해있던 광해군을 붙잡아 대비 전으로 갔다. 


하지만 대비가 새 왕의 윤허를 즉시 허락지 않고 옥새를 가져오라 명하며 왕 책봉준비를 갖추게 하자, 인조대비가 선조의 다른 왕자나 왕손에게 옥새를 넘기지 않을까 노심초사하였다. 목숨을 건 정변은 무난히 성공했지만 마지막 대비의 윤허를 받기까지 소심했던 인조는 속마음을 태우고 있었다. 


어렵사리 즉위한 인조는 죽은 영창대군임해군김제남을 복관시키며 공신들의 논공행상을 처리했다. 하지만 2등 공신 한성판윤에 봉해진 이괄이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켰는데 그 군세가 자못 강해 한성이 점령되자 공주로 피란하였다. 몽진길에 오른 인조는 궁궐을 떠나지 않겠다는 대비 때문에 애를 태웠다.



인목대비가 반란군 수중에 들어가 마음을 바꾸게 되면 왕위에서 쫓겨나는 것은 시간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인조가 한성을 떠날 때 임금을 따르는 백성은 없고 한강나루에서 배를 타려할 때 백성들이 배를 숨겨놓기까지 했다고 전하니 당시 반정에 대한 민심을 엿볼 수 있다. 


이토록 백성들은 반정세력에게 호의적이지 않았지만 반정을 통해 왕에 오른 인조의 정통성을 부추기던 일화는 꽤나 그럴듯하다. 홍대용의 문집 항전척독(抗傳尺牘)에 남겨진 야사에는 오성과 한음으로 알려진 오성대감 이항복이 선조에게 받은 한 폭의 준마도(駿馬圖)를 김류에게 주며 훗날을 기약할 것을 부탁하였다.


김류는 이를 받고 그림 주인인 능양군을 찾아 신중하게 반정을 일으켜 사직을 편안하게 할 것을 도모했으니, 이러한 것이 하늘의 뜻임을 밝히고 있다. 1618년(광해군10) 조정에서 인목대비를 폐위하는 의논이 벌어질 때 좌의정 이항복이 글을 올려 이를 적극 반대하자, 광해군은 크게 노하여 그의 관작을 삭탈하고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하였다. 


illustrator / 정윤정

귀양길에 전송 나온 하급관원 김류에게 이항복은 "그대는 귀인이 될 기상이 많으이. 나라가 비록 위태롭겠지만 멸하지는 않겠지?"하며 [준마도]를 건네주고 "반드시 이 그림의 주인을 찾아주시오. 그 주인은 장차 절로 찾아질 것이오."라고 하였다. 


그해 이항복은 유배지에서 죽고 나라사정은 날로 핍박해져 갔다. 김류는 이항복이 시킨 일에 반드시 깊은 뜻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며 초가마루에 그림을 걸어놓고 지냈다. 비바람이 사납게 몰아치던 어느 날 비를 피해 처마 밑으로 들어온 선비가 있었는데 얼굴상이 범상치 않아 집으로 맞아들였다. 


선비가 벽에 걸린 그림을 보더니 눈물을 흘림에, 그 까닭을 물으니 "이것은 제가 소시적 입궁해 선왕(선조)의 명으로 그린 것인데, 궁중에 있어야 할 그림이 항간에 뒹구는 것을 보고 울게 된 것이오."라고 하였다. 김류가 놀라 누구냐 물었는데 그가 바로 능양군 이었다. 가난한 김류가 부인을 불러 상을 차리게 했는데 뜻밖의 진수성찬이 올라왔다. 



능양군을 배웅한 후 이상하게 여겨 아내에게 물으니, 간밤 꿈에 "황룡이 들어와 마루에 서리고 앉더니 천둥과 함께 비가 내리며 바람에 지붕이 부서져 하늘로 날아가고, 양반께서도 그 꼬리에 매달려 하늘로 사라졌습니다. 꿈에서 깨어나 오늘 귀인이 오실 거라는 생각에 최선을 다해 음식을 마련해 놓았는데, 마침 길손이 오셨기에 귀인일 것이라 생각해 대접한 것입니다."라고 했다. 


김류는 비로소 이항복이 그림을 갖게 된 것은 필시 선왕의 부탁을 받은 것이요, 그림 주인을 찾아주라는 것은 장차 진인(眞人)을 찾아내 사직을 평안하게 하란 것임을  알아차리고 이후 이귀 등과 비밀리에 모의하여 대의로서 반정을 거행한 것이니 이는 필시 하늘의 명으로 의심치 않고 실행한 것이라는 내용이다.


인조는 왕이 된 후에도 말이 없어 분위기가 매우 무거웠으며 측근에 머물던 궁녀들도 왕이 하루 종일 한마디도 하지 않아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 정도였다. 왕으로서의 권위(權威)가 실려 있지만 표현이 적어 신하들은 왕의 뜻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고 추측으로 일관하다보니 정사가 원활히 이뤄질 수 없었을 게다. 

     


인조는 글을 잘 짓는 능력이 있었다는데 정작 어떤 글도 잘 쓰지 않았고 신하들의 상소문에 대답하는 비답(批答)도 내시에게 베껴 쓰게 하여 자신의 필적을 남기려하지 않았다. 자식들과도 거리를 두어 장성하여 출궁한 봉림대군인평대군이 문안인사 차 입궐하면 시중들던 젊은 궁녀들을 피신시켜 자식 앞에서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맏아들 소현세자를 비롯한 자식들마저 잠재적 경쟁자로 생각했던 인조는 애당초 함량미달의 군주였을 것으로 짐작해 본다. 정당한 왕위계승자가 아니었던 인조는 집권 후에도 늘 불안하여 정통성을 강조한 권력기반을 다지고자 왕의 효심을 내세워 [사림세력]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생부 정원군을 추존왕(원종)으로 추숭하였다. 


선조 조인 16세기말 중원대륙은 명청(明淸)이 교체되는 큰 변화를 맞고 있었다. 명은 만력제(神宗)의 태정(怠政)과 임진왜란에 대규모 군사파견으로 국세(國勢)가 기울고 있었고 명의 정치적 혼란은 북방세력이 강성해지는 계기가 돼 1616년 누르하치가 여진세력을 통합해 후금을 건국함으로서 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당시에 광해군후금의 관계를 병존시키는 중립정책을 펴가며 후금과 원만하게 지내고자 했으나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정권을 잡은 뒤에는 후금에 대한 태도가 일변(一變)하여 친명배금 정책으로 바뀌게 되었다. [서인세력]들은 '도덕적 가치'를 내세워 과의 의리외교를 구사했고 이에 1627년(인조5) 후금은 군사 3만여 명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였다. 


의주가 함락되면서 파죽지세로 평산까지 쳐들어오는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조정은 강화도로 천도하고 최명길의 강화주장을 받아들여 양국대표가 '형제 義'를 맺는 정묘화약을 맺었다. 하지만 조정은 [정묘호란] 이후에도 은연중 친명적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1636년(인조14) 국호를 청(淸)으로 고친 태종이 "형제관계"를 "군신관계"로 바꾸자 제의해옴에 따라 이를 불쾌히 여기던 인조는 과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는 척화파(斥和派)를 앞세워 제의를 거부했다. 조선이 전쟁준비를 갖추기 전인 그해 12월, 이미 청군은 10만여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넘고 있었다. 


혹한 속에 의주부윤 임경업은 백마산성을 지키며 의 침입에 대비했으나, 청군은 이 길을 피해 질풍같이 내려와 6일 만에 한성근교까지 진격하며 인조가 파천치 못하도록 강화도 길목을 차단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봉림대군을 비롯한 종실(宗室)을 먼저 강화로 보낸 뒤 인조는 길이 막혀 남한산성에서 소현세자를 거느리고 45일간 항전하다 결국 청군에 항복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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