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주 Nov 22. 2015

조선왕과의 만남(38)

인조릉_02


제16대 인조 1595~1649 (55세) / 재위 1623.03 (29세)~1649.05 (55세) 26년 2개월

 


▐  장릉(長陵) 사적 제 203호 /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 산25-1


인조는 8도에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을 보내고 명에 급사를 보내 군사지원을 청하면서 남한산성의 거센 눈보라와 맹추위의 악조건을 견디며 항전했다. 1637년 1월 1일 청 태종이 [남한산성]에 당도해 탄천(炭川)에 20여만 청군을 집결시키면서 성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청군은 남한산성 공격과 함께 강화도를 공격하였다. 이때 성내에는 군사 1만 3천명이 달포 간 지탱할 식량만 남아있었고, 의병과 명의 원병을 기대할 수 없던 터라 청군과의 결전은 불가능했다. 그해 병자년은  혹독한 추위가 지속되면서 군사들은 추위와 허기에 병들어 죽어나갔다.



성 밖에서는 청군이 노략질하기를 일삼으며 부녀자를 진중(陣中)에 잡아놓아, 아이들은 추운 길바닥에 버려진 채 모두 굶어 죽거나 얼어 죽었다. 이렇듯 위기감이 고조되며 강화도가 점령되자 성내에서는 최명길 등 주화파(主和派)와 김상헌 등 주전파(主戰派)간의 치열한 논쟁이 거듭되다 척화에서 강화로 분위기가 바뀌며 항복하게 되었다.


결국 1월 30일 인조는 항복의식을 거행코자 삼전도(서울 송파)에서 세자를 비롯한 500여 명의 신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청 태종을 향해 굴욕적인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여진족이 천자에게 3번 절하고 9번 머리를 조아리는 의식) 항례(降禮)를 치른 뒤에 군신의 예를 맺고 청의 장수 용골대의 호위 하에 한강을 건너 환도했다.



소현세자봉림대군을 볼모로 하고 척화를 주장했던 삼학사(三學士: 홍익한, 윤집, 오달제)를 인질로 잡아 철병함으로서 조선은 과의 관계를 끊고 에 복속하게 되었다. 이후 청으로부터 위험인물로 지목돼 온 김상헌은 1641년 심양으로 끌려가면서 우국충절의 시조 "가노라 삼각산(三角山)아"를 남겨 후대로 하여금 그날의 비통함을 되새기게 한다.

     

병자호란이 끝나자 임진왜란 이후 다소 수습된 국가기강과 경제상태가 악화돼 당시 사회상은 처참하게 되었다. 수많은 고아들의 양육과 피랍된 수십만 백성들의 속환(贖還) 문제가 대두됐다. 잡혀간 사람들의 대부분은 가난한 자들로 속환비용 마련이 큰 문제였다.


또한 순절(殉節)하지 않고 살아 돌아온 사대부 여인들은 조상에게 죄가 된다며 이혼하는 사례가 늘어 사회, 정치문제로 대두되었다. 당시 사대부집의 자제들은 새장가를 들고 다시 합하는 자가 없었다고 "인조실록"은 전하고 있다.    



이때 속환한 여인을 가리켜 환향녀(還鄕女)라 했는데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오늘날 국어사전에는 화냥년이란 비속어로 남아있기에 역사 속에 비겁했던 사대부들을 되돌아보게 하고 있다. 도덕적 가치를 내세웠던 인조의 치세를 보면 경기도에만 실시하던 대동법을 강원도지역으로 확대하고, 군제를 정비하며 북변과 연해 방위를 위해 여러 곳에 군영을 설치했다.


상평청(常平廳)을 설치해 상평통보를 주조하고 국경지역에 시장을 열어 후금과의 민간교역을 공인했다. 또한 토지제도를 시정하고 전결(田結) 수를 늘려 세원을 확보했으며, 연등9분법을 정비하고 군역세납을 실시해 세제(稅制) 합리화를 꾀했다. 이때 납속자에 대한 서얼허통(庶孼許通)으로 신분을 상승해주기도 하였다.


변방에서는 1628년(인조5) 네덜란드인 벨테브레(Weltevree)가 제주에 표착해 박연(朴淵)으로 개명하여 귀화하고, 병자호란 때 훈련대장 구인후 휘하에서 대포제작과 사용법을 지도해 공을 세웠다. 소현세자가 청에서 돌아올 때 화포, 천리경, 과학서적, 천주교서적 등을 가지고 들어옴으로서 이를 통해 서양문물을 접하게 되었다. 서양역법인 시헌력을 청에서 수입해  1653년(효종4)에 시행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illustrator / 정윤정

또한 송시열, 김육, 김집 등 우수한 학자들이 배출돼 조선후기 성리학의 전성기를 이루기도 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중심세력인 [서인]공서(功西: 공신파)와 청서(淸西: 사림파)로 분열돼 다투었고, 김자점이 척신으로 집권해 횡포를 일삼았다.


인조의 등극과 함께 백성들의 고통이 나날이 커져가면서 인조 자신도 마음 편히 왕위에 있을 수 없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이전에는 정통성 문제로 고민했고, 전란 뒤에는 의 요구로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게 되지 않을까 매우 불안해하였다.


맏아들 소현세자인조와는 달리 지극히 현실주의자로서 의 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새로운 문물에도 적극적이었으며, 조선의 성리학이 이미 낡은 사상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하지만 반청(反淸)으로 일관했던 인조와 [서인]세력들에게 소현세자는 위험한 인물로 지목되었다.



그는 1645년(인조22) 정월 8년여의 볼모생활을 끝내고 환국했으나 인조의 냉대를 받으며 귀국한 지 두 달 만에 병을 얻어 34세에 급사하였다. 일설에는 인조소현세자를 독살했다는 주장도 있는데 당시 을 배척하였던 상황을 고려하면 사실일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인조실록에 의하면 소현세자의 시신은 까맣게 변해있었고 7군데 혈에서 출혈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때 인조는 진상조사를 바라는 강빈(姜嬪)과 대신들의 간언을 물리치고 장례 일을 앞당겨 입관을 서둘렀으며 세자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평민의 장례절차를 따르게 했다.



참관 인원도 일부 종실로 제한하고 어의를 처벌하라는 논의자체를 금했다. 또 다른 일설에 의하면 소현세자봉림대군이 부왕(父王)앞에서 북경에 볼모로 잡혀있던 동안의 고초를 말했는데 이때에 봉림대군 세조를 멸시하며 귀국 시 볼모로 잡혀간 조선인들을 함께 데리고 왔다고 하였다.


반면 소현세자는 청 세조가 도량이 넓은 군주이며 그가 아끼던 벼루를 얻어 왔다 전하여 화가 난 인조가 그 벼루를 소현세자 머리에 던져 급사했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그해 봉림대군이 귀국하자 인조는 왕권강화를 명분으로 세손(소현세자 장자)을 폐위하고 차남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illustrator / 신현

인조 입장에서 보면 강빈원손의 존재는 골칫거리였다. 반정을 주도해 왕위에 오른 인조는 정통성 확보에 예민했고 왕좌에 대한 집념이 강한 인물이었다. 때문에 화근을 미리 자르고자 했다. 이때 강빈과 대립관계에 있던 조소용(귀인 조씨)이 인조를 저주했다며 강빈을 무고(誣告)하였다.


이로 인해 그녀의 형제들을 모두 유배시키자 이에 반발한 강빈(소현세자 빈)은 시아버지인 인조의 조석 문안을 거부하였다. 이로써 인조강빈에게 강한 적개심을 갖고 1646년 정월 강빈 궁의 궁녀들이 임금의 수라상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를 씌어 강빈을 별당에 가두고 그해 3월 사약을 내려 사사했다.


강빈의 노모와 4형제는 모두 처형당하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효종 때 두 아들은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효종은 살아남은 소현세자 셋째아들 석방을 건의한 황해감사 김홍욱을 친히 국문하며 때려 죽게 했다.


강빈(姜嬪)

이후 숙종 조에 예론(禮論)에 따라 강씨의 옥사를 억울하게 여기어 세자세자빈이 함께 복위되었다. 소현세자의 죽음은 일본의 개항보다 2백년 앞선 것으로, 조선이 세계정세에 대한 식견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이라 평가하기도 한다.     


중종반정과정에서 소외됐던 것과 달리 인조는 친히 군사를 이끌고 반정을 주도했지만 백성들의 호응이 적자, 서인세력대북세력이 일당독재를 추구하다 축출된 전례를 거울삼아 남인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삼고 많은 [남인]들을 등용해 "서남연합정권"을 내세우며 정변에 대한 반발민심을 무마하였다.


하지만 정작 서인은 반정공신 세력인 공서(功西)와 반정에 가담치 않은 김상헌을 중심으로 한 청서(淸西)로 분열되었다. 인조 7년 전후로 공서김류를 중심으로 한 노서(老西)소서(少西)로 다시 분열되고, 병자호란 중에는 화의론을 주장한 [공신세력] 이귀최명길, 장유 등의 주화파(主和派)와 성리학적 명분으로 척화론을 내세운 김상헌, 윤집 등의 척화파(斥和派)가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음산한 듯 장릉 무인석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인조는 세자(효종)가 손가락을 잘라 쾌유를 기원했으나 창덕궁 대조전 동침에서 55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인조는 생전에 고통스런 삶을 함께했던 조강지처에 대한 연민으로 다음 세상도 함께하기를 소망하며 인열왕후의 곁에 자리하였으나 그는 사후에도 능침에 변고가 지속되는 불행을 겪었다.


조선 왕릉의 병풍석은 왕실권위를 상징코자 조성됐지만, 영조 조에 천장한 장릉병풍석은 전란을 겪었던 인조의 통한(痛恨)이 능침으로부터 새나오지 못하도록 화근(禍根)을 차단하고 후세화평을 염원하는 뜻으로 세워졌다고 한다. 한 많은 장릉을 바라보며, 인조가 이승서 누리지 못했던 인열왕후와 사랑을 저승에서나마 완성할 수 있기를 기원해본다.    


인조 합장릉


제16대 인조 원비 인열왕후 1594 ~ 1635 (42세)

      

조선왕실 중 역대 왕들은 사후에 원비대신 계비와 함께 묻히거나 홀로 묻힌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인조는 계비를 둔 왕으로서 유일하게 원비 인열왕후합장하고 인조의 계비는 홀로 묻혀있는 특이한 경우이다. 인열왕후 한씨는 영돈녕부사 한준겸의 여식으로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임진왜란 피난 중 강원도 원주에서 출생했다.


1610년(광해군2) 17세에 능양군과 가례를 올려 청성현부인으로 봉해졌으며 1623년 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30세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슬하에 소현세자와 후일 효종인 봉림대군, 인평대군, 용성대군 4남을 두었으며 왕비자리에 머무는 12년 동안 친인척을 궁에 들이지 않고 내정에도 간섭하지 않았다.


원주 인동 仁烈王后 탄생비


그녀는 인자하고 후덕했으며 공손하고 검소한 덕을 지녔었다. 심지어 인조가 왕후를 위해 정원을 가꾸는 것도 자신을 위해서라면 행하지 말 것을 청하였다. 그녀는 서인세력이 득세했던 당시 상황에서 소현세자세자빈 간택조차 조정의 뜻에 따라야하는 편치 않은 세월을 보내야 했다.

     

인열왕후인조와 25년의 세월을 함께하는 동안 이괄의 난정묘호란으로 피난을 다니며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지만, 그보다도 맏아들 소현세자와 남편과의 다른 성격을 지켜보면서 더 많은 가슴앓이를 하였다. 그녀는 인조 13년 42세의 늦은 나이에 4남 용성대군을 낳은 뒤  창덕궁 산실청(産室廳)에서 병사하여 파주 장릉인조와 함께 잠들어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조선왕과의 만남(37)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