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주 Nov 25. 2015

조선왕과의 만남(39)

인조계비 능


제16대 인조 계비 장렬왕후 1624~1688 (65세)



▐  휘릉(徽陵) 사적 제193호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2-1 (동구릉 내)


휘릉은 [동구릉]의 중심인 건원릉 서편 높지 않은 언덕에 조촐하게 꾸며져 장렬왕후가 홀로 잠들어있는 단릉이다. 장렬왕후는 두 차례의 예송(禮訟)을 거치면서 당쟁의 격랑에 휘말려 많은 고초를 겪었지만 이를 잘 견디고, 왕실어른으로써 천수를 누렸던 여인이다. 


조선시대의 [예송]장렬왕후의 상복(喪服)문제를 두고 궁중의례의 적용문제, 특히 상복을 입는 기간을 둘러싸고 서인남인사이에 크게 논란이 벌어진 2차례의 사건을 말한다. 예송논쟁은 예(禮) 자체의 문제를 넘어선 중요한 사건으로, 권력개편 등 정국의 대변동을 가져왔던 조선중기의 대표적인 당쟁으로 기록된다.


     

장렬왕 조씨는 인천부사인 조창원의 여식으로 본관은 양주(楊州)이다. 1635년(인조13) 원비 인열왕후가 세상을 떠났지만 병자호란으로 나라가 혼란했던 터라 왕비를 간택하지 못한 채 세월이 흘렀다. 전란의 상처가 아물던 1638년 15살의 조씨는 44세였던 인조의 계비로 간택돼 효종의 잠저인 의동본궁(義洞本宮)에서 가례를 올리고 왕비로 책봉되었다. 


하지만 당시 인조는 귀인 조씨를 총애하고 있었는데 실록 상에도 인조가 조소용을 너무 총애해 어린왕비를 거들 떠 보지도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귀인 조씨는 후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세력가인 김자점의 지원을 받아 어린 장렬왕후를 제치고 대궐의 안주인 행세를 하고 있었다.


    

조귀인은 소현세자 강빈 청 돌아온 뒤 자신을 경시하고 왕비 조씨을 예우하자 이를 질투하여 세자빈에 대해 인조와 왕비에게 수시로 모함해 왕비 조씨 또한 소현세자 을 몹시 경계했다 한다. 인조는 말년까지도 이러한 조소용을 총애해 왕비 조씨조귀인 사이는 매우 좋지 않았다. 


인조가 승하할 당시 장렬왕후가 임종을 지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조소용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 왕비는 병상뿐만 아니라 마지막을 지켜보지도 못했다하니, 당시 귀인 조씨의 위세를 실감케 한다. 이때 세자였던 봉림대군이 호통을 치며 당장 왕비를 모셔오라 했는데, 세자는 친형인 소현세자의 죽음과 관련해 귀인 조소용을 매우 싫어하고 있었다.

 


조소용은 원비 인열왕후 시절에 인조의 후궁으로 있었다. 조소용인조의 총애를 받는 후궁 이었음에도 서출출신인지라 왕비 사후에도 왕비가 될 수 없었다. 그 아비는 조기였는데 경상도 관찰사 급의 고위층이었다. 하지만 어미가 첩이었기에 후궁조차 될 수 없는 서얼신분 이었다. 


그러나 인열왕후 형부인 승지 정백창이 왕에게 천거해 비공채로 후궁이 되었다. 인조조소용을 총애하자 신하들이 서출을 후궁으로 들일 수 없다고 반대했으나 인조는 이를 수긍하지 않았고, 소현세자봉림대군보다 어린나이였던 장렬왕후에게는 관심조차 없었다. 


어린 중전은 연장자인 며느리 강빈과 소현세자가 거북했고 그들이 청나라에 있는 동안에도 항상 후일을 염려하였다. 이미 귀인 조씨는 강빈과 반목해 지내고 있었는데, 조 귀인이 접근해 후일에 관해 더욱 겁을 주어 왕비는 심리적으로 몹시 불안해하였다. 때문에 나이 많은 며느리가 귀국하여 궁궐에서 함께 지내게 되면서 장렬왕후강빈의 갈등은 고조되었다. 



강한 성정의 세자빈 강씨가 나이 어린 시어머니를 제치고, 궁궐의 안주인을 자청해 대소사를 처리하다보니 장렬왕후의 위기의식은 극에 달했고 조귀인은 이를 이용해 계략을 꾸미고 있었다. 결국 강빈이 사사되자 귀인 조씨는 왕비에게 천연두 증상이 있어 임금지척에 머무르게 할 수 없다며 인조의 곁에서 왕비를 경덕궁(현 경희궁)으로 내쫓아 버렸다.

     

장렬왕후는 전처소생 소현세자며느리를 내치는데 성공했지만 끝내 인조의 사랑을 받지 못한 왕비였고, 연적(戀敵) 귀인 조씨에 의해 아래대궐로 옮겨 살게 된 비운의 왕비였다. 다행히 그녀보다 5살 위인 효종은 인조생전에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이십대의 젊은 계모 조씨를 정성껏 예우했다. 



귀인 조씨는 신당을 차리고 장렬왕후가 죽도록 방사했다가 발각돼 사사되었다. 장렬왕후는 12년간을 중전에 머물다 효종이 즉위하자 26세 나이로 왕대비가 되고 이듬해 자의대비로 추봉되었다. 어린 나이에 인조의 계비가 되어 남편을 일찍 여읜 그녀는 인조, 효종, 현종, 숙종 4대에 왕을 거치며 자의대비라는 이름하에 왕실의 최고어른으로써 비교적 조용한 삶을 살았다.


효종이 승하한 1659년과 며느리인 효종비가 서거한 1674년에 대비였던 조씨상복(喪服)문제를 두고 큰 당쟁이 발생했다. 장렬왕후는 손자뻘인 현종이 즉위하자 [대왕대비]가 되었으나 대상(大喪)을 당한 슬픔을 채 가누기도 전에, 상중(喪中)에 그녀가 입어야 할 복상문제가 정치적 쟁점이 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당시의 국상은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있어 장자가 죽으면 부모는 [3년간] 상복을 입고, 그 이하 차자가 죽으면 [1년간] 상복을 입었다. 이때 시작된 예론(1차 예송)은 [국조오례의] 사례에 따른 지침이 없었기에 인조의 차자(次子)인 효종을 일반 사가(私家)와 동일하게 차자로 볼 것인지, 왕통을 계승한 적장자로 예우할 것인지에 대한 당파적 논쟁이 일어났다.


1660년(현종1) [서인] 측에서는 송시열 등이 나서 효종이 차자인 만큼 1년간 상복을 입을 것을 주장하고, [남인] 측 허목 등은 효종이 차자라 해도 왕위를 계승했음으로 장자에 준해 3년 복상이 옳다고 주장했는데 이때 조대비1년 복상(서인주장)을 하였다. 


     

1674년(현종15) 효종 비가 죽자 다시 [서인]과 [남인] 간에 상복문제를 두고 [2차 예송]이 발생했다. 9개월 복상인 [서인]주장과 1년 복상인 [남인]주장이 있었는데, 이때는 1년 복상(남인주장)이 채택됐다. 자의대비는 효종과 효종 비 승하 후 똑같이 1년간 상복을 입었으나 그 정치적 의미는 크게 달랐다.


[2차 예송]이 끝난 몇 달 뒤에 현종마저 승하하여 대비 조씨는 같은 해 며느리와 손자를 저승으로 앞세우는 슬픔을 겪기도 했다. 생전 슬하에 자식이 없어 외로웠을 대왕대비 조씨는 1683년(숙종9) 43세의 현종 비마저 세상을 떠남으로써 고독한 여생을 보내다 숙종 14년 8월 창경궁 내반원(內班院)에서 65세로 이승을 고했다. 



야사에 의하면 자의대비는 세상을 떠나기 전 증손주 며느리인 숙종비 인현왕후에게 자신이 자손을 앞세우며 너무 오래 살았노라 하소연했다고 한다. 어린나이에 궁궐에 들어와 남편의 사랑도 제대로 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평생을 바늘방석에서 외롭게 살다, 죽어서조차 남편 곁에 묻히지 못한 가련한 여인이 [동구릉] 내 휘릉에 잠들어 있다.


왕실의 가장 큰 어른으로 천수를 누리는 동안 친자식은 아니지만 왕실 자손들을 연이어 떠나보내야 했던 그녀의 슬픈 운명을 떠올려 본다.


인조 계비 휘릉(徽陵)


매거진의 이전글 조선왕과의 만남(38)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