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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Nov 28. 2015

조선왕과의 만남(40)

효종릉_01


제17대 효종 1619~1659 (41세) / 재위 1649.05 (31세)~1659.05 (41세) 10년


Source: Chang sun hwan/ illustrator


▐  영릉(寧陵) 사적 제 195호 /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산83-1 (영녕릉 내)


효종이 잠들어있는 여주 영릉(寧陵)은 조선조 최고의 성군이라 불리우는 세종대왕영릉(英陵)과 불과 700m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 효종의 능은 능역주변의 울창한 푸른 소나무들로 그윽함을 풍겨내고 있지만, 인적이 드물어 사방이 조용하고 호젓하기만 하다. 


원래 효종 능은 [서인]의 영수였던 송시열 주장으로 경기도 구리 [동구릉] 내 건원릉 서쪽 산줄기(현재 영조 능)터에 병풍석을 갖춘 쌍릉으로 조성하여 능호를 익릉(翼陵)이라 했다. 하지만 1673년(현종14) 익릉의 능지가 불길하며 석물에 틈이 생겨 빗물이 스며들 염려가 있다고 남인들이 주장하면서 여주의 세종대왕 능(英陵) 동쪽 곁으로 천장하였다.

 

영릉(寧陵) 홍살문

처음 효종 능을 정할 때 고산(孤山) 윤선도는 지인들에게 "10년 안에 능에 변고가 있어 반드시 이장을 할 것이오. 나는 이것을 못보고 죽겠지만 여러분들은 보게 될 것이오."라고 예언했는데, 이는 당초 익릉이 당쟁으로 인해 부실하게 조성됐기 때문이었다. 


효종의 사부(父)였으며 풍수에 능했던 [남인] 윤선도는 좌의정 심지원의 추천을 받아 능 선정과정에 참여해 풍수논문인 산릉의(山陵儀)를 올리며 화성의 융릉 터를 길지(吉地)로 제시했다. 하지만 [서인] 송시열은 "수원은 지리적으로 삼남(三南)의 요충지대인 까닭에 변란이 있게 되면 전쟁터가 될 것이며 수백호의 민가를 일시에 철거하고 분묘들을 옮긴다면  백성의 원성을 사게 될 것입니다."라며 반대하였다.


동원상하봉릉(同原上下封陵)

이후 효종 능은 해마다 보수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송시열과 송준길 양송(兩宋)은 개수(改修)는 가능하나 이장은 절대로 불가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다가 현종 서거 1년 전인 1673년(현종14) 선왕 능을 옮기기로 결정하고 여주 땅으로 천장하게 됐다. 능을 옮겨오면서 능호를 영릉(寧陵)으로 고치고 재실도 함께 옮겨왔다. 


이듬해 인선왕후가 죽자 동원(同原)에 능을 택해 왕비릉을 정혈(正穴)에 묻는다는 풍수설을 이유로 왕릉 앞에 왕비릉을 아래위로 배치하여 조선왕릉 최초에 동원상하봉(同原上下封)의 독특한 쌍릉을 이루게 되었다. 조선 왕릉의 십이지신상을 새긴 [병풍석]은 세조 조에 사라졌다가 성종 조 이후 한동안 다시 쓰였는데 효종 능에서 또다시 폐지되었다.



효종의 인생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몹시 불안하였다. 그는 인조의 둘째 아들로 인조 4년 8살에 봉림대군에 봉해져 1631년(인조9) 13세에 가례를 올렸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의 명으로 아우 인평대군을 비롯한 왕족을 거느리고 강화도로 피난하였다. 


[남한산성]에 고립된 인조가 이듬해 청에 항복함에 따라 형 소현세자 및 척화신(斥和臣)과 함께 청나라 볼모로 잡혀가 심양에 8년간 머물렀다. 청나라에 머무르는 동안 청이 산해관(山海關)을 공격할 때 세자의 동행을 강요하자 이를 극력 반대하면서 자신이 대신 가겠다고 고집해 동행을 막았으며, 이후 청이 서역(西域)을 공격할 때도 세자를 동행해 형을 적극 보호하였다.



1645년 2월 청에서 먼저 귀국한 소현세자의 갑작스런 사망소식에 그해 5월 귀국했는데 이때 많은 중신들이 원손의 세자책봉을 주장했지만 국유장군론(國有長君論)을 내세운 인조의 뜻에 따라 세자로 책봉되고 1649년 인조가 승하하자 창덕궁 인정전(仁政殿)에서 즉위하였다. 


효종은 오랜 기간 청나라에 머물며 강제로 서쪽 몽고와 남쪽 금주위의 송산보까지 끌려 나가 명나라가 패망하는 것을 직접 경험했고 동쪽으로는 철령위 등으로 끌려 다니며 온갖 고초를 겪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국가원로들을 궁궐로 불러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고자 와신상담할 것을 밝혔는데 화답이라도 하듯 송시열은 기축봉사(己丑封事)를 올려 "북벌론"이 국가 대의임을 표방하였다.  


    

하지만 송시열은 효종 조 내내 벼슬을 사양했던 무욕(無慾)의 선비였다. 1658년(효종9) 9년간에 걸친 왕의 간곡한 부탁으로 이조판서 임명을 받았으나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효종이 급서(急逝)했다. 


송시열은 효종의 묘지문을 통해 "갈 길은 먼데 해는 저물어간다. 옛날에 마음을 같이하는 신하가 한둘만 있어도 도움이 된다했는데 지금은 너나없이 덩달아 눈앞의 이익만 꾀하고 있으니 나와 함께 일할 사람이 과연 누구이겠는가."라며 탄식했던 효종을 의리의 군주로 회상하였다. 


인조의 정치적 후계자였던 효종은 부왕이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당한 치욕을 씻는 길이 오직 북벌이라 생각하고 마음 맞는 신하와 함께 북벌(北伐)이란 고단한 외길을 가고자했다. 당시 소현세자의 생각은 달라있었다. 때문에 이들 형제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극명하게 갈린다.


    

소현세자는 굴욕적일지 모르지만, 효종보다는 개방적이고 전향적이었다. 변화하고 발전하는 청을 보며 신문물을 적극 수용하고자 했다. 소현세자심양에 머무는 동안 아담 샬(Adam Schall)과 교류하며, 서구문물의 통로인 청나라에 호의적이었기에 효종과는 전혀 상반되는 견해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소현세자에 대한 효종의 정은 두터웠다. 효종실록 행장(行狀)에서는 "내가 소현세자와 북행하여 험난한 이역 땅에서 어렵고 위험한 지경을 함께 겪었는데 늘 좌우에서 이끌어주며 주야로 떠난 적이 없었다."라며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소현세자와의 애틋한 형제관계를 회상하고 있다.



효종은 봉림대군시절 정치적 견해를 달리했던 형 소현세자에 대한 혈육의 정리(情理)를 지키고자 노력했었다. 소현세자의 죽음 이후에도 형에 대한 효종의 정은 이어져 "귀국한 지 얼마 안 되어, 속절없이 되었으니 항상 슬픈 마음으로 그를 생각하게 된다. 지금 그의 자식들을 내 자식과 달리 본다면 죽은 이의 입장에서 어찌 유감이 없겠는가."라고 했다. 


그러나 북벌의지를 천명하고 오직 그것에 전념하고 있던 효종은 죽은 형과 죄인이 된 형수 강빈, 조카들이 정치적으로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심양에서 함께 고생했던 형수를 역적으로 몰아야 하는 처지였다. 효종은 그들이 억울하게 죽은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 비극을 통해 자신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인조의 적장손을 제치고 차자(次子) 신분으로 왕위에 오른 효종은 山林(在野의 고명한 선비)의 즉각적인 강빈의 신원(伸冤)요구에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형수를 신원하게 되면 조카들도 신원시켜야 했고 이는 효종의 왕위에 대한 정당성 시비가 일 수밖에 없었다. 



효종은 원손(元孫)의 자리를 대신한 자신의 정당성을 북벌에서 찾고 있었다. 그러나 강화조약 시 군비증강 금지조항 때문에 청의 시선을 속이며 군비를 강화해야했기에 표면적으로는 청과의 관계를 돈독히 해야 했었다. 효종 원년 청나라 섭정왕 다이곤(多爾袞: 청 태종 아우)이 상처(喪妻)함에 조선왕실이나 대신들의 여식을 간택해 보내라고 요구했다. 


이때 사신이 가져온 국서로 국면전환의 기회가 마련되는 듯하였다. 조선은 태종 조에도 명나라에 반가(班家)의 여인을 북경으로 보낸 예가 있었다. 이때도 여인들은 명나라로 가기를 꺼렸는데, 하물며 오랑캐라고 업신여기던 청나라에 가고자하는 여인은 없었다. 때마침 성종의 후손인 금림군 이개윤이 자신의 딸을 보내겠다고 나섰다. 


以錦林君 愷胤女爲義順公主

효종은 그녀를 의순공주에 봉하고 오라비 이준에게도 벼슬을 내렸다. 다이곤은 북경에서 천리 밖까지 마중 나와 성혼(成婚)했다고 하는데, 이때 효종은 의순공주가 다이곤의 왕비가 된 것이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당시 다이곤은 청 정국의 최고 실력자였으나, 의순공주가 청의 조정에서 자리를 잡기도 전에 수렵도중 말에서 떨어져 사망하면서 정치보복이 자행돼 다이곤 시신의 머리가 잘렸다.   

  

1656년(효종7) 비운의 의순공주가 결국 환국하게 됨으로써 그녀를 이용하려 했던 북벌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효종은 절치부심하며 차자(次子)로 왕이 된 자신의 명분을 산림(山林)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그들의 지지가 절실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산림이 소현세자 부인 강빈(姜嬪)의 신원을 요구하기 때문이었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민정중이 상소를 올려 강빈의 원통함을 호소했는데 임금이 편전으로 불러들여 그 전말을 조용히 말해 주면서,『강(姜)의 사악한 음모는 의심할 것이 없으니 이후에 다시 감히 언급하는 자가 있으면 역적의 의논으로 다스리겠다.』고 경고하여 이 문제는 시대의 금기가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결국 산림(山林)은 효종의 즉위를 인정하면서 강빈옥사를 김자점과 인조 후궁 조씨의 소행으로 돌리는 절충안을 택했다. 그러나 1654년(효종 5) 연이은 천재지변으로 나라사정이 흉흉해지자 민심 수습차원에서 널리 신하들의 의견을 구했는데, 황해감사 김홍욱이 상소를 올려 이 문제를 정면으로 거론했다. 



[효종실록]에는 김홍욱이 왕에게 호소하길 "가장 듣기 싫은 말을 듣고 크게 의심스러운 옥사를 풀어야 재변이 그칠 것"이라 간언하며, "설령 어미가 죄가 있어도 어리고 연약한 아이들은 몰랐을 것인데 하물며 어미 죄가 명백하지 않은데도 갑자기 유배시켜 애매하게 죽임으로써 영원히 구천(九天)에서 한을 품도록 만들었다."며 아이들의 문제까지 거론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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