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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Nov 28. 2015

조선왕과의 만남(41)

효종릉_02


제17대 효종 1619~1659 (41세) / 재위 1649.05 (31세)~1659.05 (41세) 10년



▐  영릉(寧陵) 사적 제 195호 /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산83-1 (영녕릉 내)


분개한 효종은 "상소를 보니 모골이 송연해진다" 면서, 김홍욱을 압송해 친국하였다. 영의정 김육, 좌의정 이시백 등이 "성상의 덕에 손상이 될까 염려스럽다"고 말리자 효종은 "후세에 악명을 남기더라도 내가 감당할 것인데 경들이 무슨 상관인가?"라며 형문(刑問)을 감행했다. 


김홍욱은 대신과 삼사(三司: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를 부르며 "어찌해 말하지 않는가! 옛 부터 말하는 자를 죽이고도 망하지 않은 나라가 있었는가? 내가 죽거든 내 눈을 빼내어 도성 문에 걸어 두면 나라가 망해가는 것을 보겠나이다."라며 울부짖었다고 한다. 


김홍욱은 장사(杖死; 곤장 맞아 죽음)했는데 구언(求言)에 따른 상소는 처벌하지 않는 관례를 깬 것 이어서 당시 큰 반발이 일었다.  前 판서 조경은 "대신은 보필하는 도리를 상실하였고 대간(臺諫)은 입을 다무는 것이 습관이 되었으며 언로는 막히고 아첨하는 것이 풍조를 이루었다"고 비판했고, 부사직 정두경도 "김홍욱에 대한 처분이 지나쳤다."고 비판하였다. 


    

이런 항의에 대해 효종은 "국사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을 내가 가상하게 생각한다."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산림(山林)을 모두 적으로 돌리면 사실상의 국정운영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은 효종과 산림을 더욱 멀어지게 만들었고 사대부를 죽인 효종에 대한 거부감은 더욱 커져갔다. 


강빈옥사 이후로 세 아들은 멀리 제주도에 유배되었는데 석철과 석린은 그곳에서 일찍 죽고 막내 석견은 1656년(효종7) 경안군으로 복위되었다. 1649년 효종은 즉위 후 청나라와 연결돼 있던 김자점 등 친청파를 조정에서 몰아내고자 김상헌송시열김집송준길 등의 대청파(對淸派)를 중용해 은밀히 [북벌계획]을 수립했다. 



이들은 청을 군사적으로 응징하는 것이 군부국(君父國)인 명나라에 대한 신자국(臣子國)의 당연한 의무라는 논리로 북벌을 이념적으로 지원하였다. 이러한 북벌론은 양란(兩亂)이후 체제붕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지배층에 국가재조(國家再造)라는 안정책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궁지에 몰린 김자점 등 친청세력이 역관 이형장을 통해 이를 청나라에 밀고함으로써 청의 간섭이 이뤄짐에 따라, 즉위 초에는 왜정(倭情)이 염려된다는 이유로 남방지역에만 군비를 펼칠 뿐 적극적인 군사계획을 펼칠 수 없었다.


1651년(효종2) 조선에 강경책을 폈던 청나라의 섭정 왕 도르곤이 죽자 조선에 대한 태도가  크게 달라져 뜻밖에 북벌계획을 추진해나가기 좋은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 기회를 이용해 친청파에 대한 척화세력의 대대적인 공세가 시작되어 그해 12월에는 귀인 조씨의 옥사를 계기로 김자점 등의 친청파에 대한 숙청을 단행했다.


illustrator / 박시백

청에 머물던 역관들도 세력이 약화되면서 효종은 북벌을 최우선 정책으로 수립하며 군비개편은 물론 훈련을 강화하고 화승총병을 늘리기 위해 사냥꾼인 포수를 무장으로 특채하여 군사양성을 위한 실제임무를 맡겼다. 이러한 군 인사정책은 당시 매우 파격적인 것으로 효종의 군사강화책 중 가장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효종 3년 북벌 선봉부대인 [어영청]을 대폭 개편하고 금위군을 기병(騎兵)화 하는 동시에 지방군의 군사력약화를 시정하기 위해 영장제도(營將制度)를 강화했다. 효종 6년에는 모든 금위군을 내삼청에 통합하고 [남한산성]을 근거지로 하는 [수어청]을 강화하는 등 대대적인 군제개혁을 단행하였다. 


또한 600여명의 금위군을 1천명으로 증원하고 한성 외곽방위를 대폭 강화하기 위해 성지(城池: 성 둘레에 파놓은 연못)를 보수하며 군량을 저장해 강화도 일대의 수비를 보강해 나갔다. 그밖에도 능마아청(能麽兒廳)을 설치해 무장들에게 군사학을 강의하고 평야전투에 유리한 장병검(長柄劍)을 제작했으며 네덜란드인 하멜을 통해 화포와 조총제작 등 신무기 개량에 힘을 기울였다.



효종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청나라는 국세가 더욱 강해져 북벌을 실천으로 옮기지 못했다. 다만 청의 요청에 따른 2차례 나선(羅禪: 러시아) 정벌서 군비강화의 성과가 있었다. 이후 [나선정벌]을 핑계로 북방지역에도 산성을 보수하고 금위군의 군복을 협수단의(夾袖短衣)로 바꿔 행동에 편리하게 하는 등 집념어린 군비확충에 노력했으나 재정이 뒤따르지 못해 부작용이 일어나기도 했다.  


효종은 병자호란 이후에 흐트러진 경제질서 확립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몇 차례의 전란으로 경작하지 않는 밭이 늘다보니 농산물이 급격히 감소하고, 파산한 농민들이 촌락을 떠나는 등 국가체제를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경제사회 질서가 붕괴위기에 놓여 있었다.



효종은 이러한 위기를 부세제도의 개혁, 농업생산의 증대, 사회윤리의 강화로 극복코자 했다. 김육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1651년에는 충청도 1658년에는 전라도 연해안 고을에 대동법(大同法)을 확대 실시해 성과를 거두고 전세(田稅)를 1결당 4두(斗)로 고정화 해 백성의 조세부담을 덜어주었다. 


당시 군비확충에 필요한 동철(銅鐵)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동전유통을 반대했지만, 김육의 강력한 주장으로 화폐개혁을 단행해 상평통보를 주조하고 유통토록 하였다. 또한 1653년(효종 4) 일상생활과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는 역법(曆法)을 개정해 태음력의 옛 법에 태양력의 원리를 결합시켜 24절기 시각과 1일간 시간을 계산해 제작한 [시헌력]을 사용하게 했다.


illustrator / 김회룡

효종은 조선을 문치의 나라에서 무치의 나라로 바꾸려했던 왕이었다. 그는 사대부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송시열과 손을 잡고 왕위에 머무는 동안 오직 북벌만 준비하다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독살설에 휘말린 왕들처럼 그도 자신의 갑작스런 죽음을 예견하지 못한 채 의혹의 죽음을 맞았다. 


북벌에 대한 산림(山林)의 동의를 얻어내기 위해 이조판서 송시열과 독대한지 두 달 만에 장년의 나이로 급서하였다. [효종실록]에 기록된 그의 병세는 머리에 난 종기가 얼굴로 번진 것이었다. 당시 효종을 진단한 어의들은 침을 통해 종기의 독을 배출해야 한다는 처방을 내렸는데, 때마침 수전증으로 집에서 요양하던 어의(御醫) 신가귀가 입궐을 청하여 침을 놓게 되었다.



이때 다른 어의가 경솔하게 침을 놓아서는 안 된다며 만류했으나 효종은 신가귀에게 침을 놓으라 명했다. 늙은 어의가 떨리는 손으로 꽂은 침이 임금의 혈락을 범해 침구멍으로 피가 그치지 않고 솟구쳐 나왔다. 혼미해진 왕은 송시열과 약방제조를 불렀으나 이들이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효종은 평생을 북벌에 집착하며 군비확충에 몰두한 군주였으나, 이를 뒷받침할 재정이 부족해 군비보다 현실적인 경제재건을 주장하던 신하들과 뜻이 맞지 않아 자주 충돌했다. 재정 빈약과 대신들의 비협조로 그는 결국 재위 10년간 북벌에 대한 의지만 불사르다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41세의 일기로  허무하게 창덕궁에서 승하하였다.  


illustrator / 정윤정

자신이 묻혔던 명당을 놔두고 [서인]과 [남인]의 권력다툼 때문에 여주로 천장해야 했던 효종의 영릉은 세종대왕의 능과 달리 찾는 인적들마저 없다. 효종은 급서 당시 많은 피를 흘리고 시신이 부어 있었기 때문에 시신을 맞춤 관에 넣을 수 없어 널을 이은 관을 사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장지논란 때문에 파문이 그치지 않았고, 재위 10년보다 사후 15년간의 길고 지리 하게 전개된 예송논쟁으로 편할 날이 없던 효종이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편히 잠들지 못했던 그의 혼령은 지금도 이곳을 되돌아보는 발자욱마저 희미하기에 모진 세월을 겪어야 했던 군주의 고독함이 읽혀지는 듯하다.  


사진작가 / 임성환

   

제17대 효종비 인선왕후 1618 ~ 1674 (57세)    

 

효종 영릉 아래 묻힌 인선왕후는 우의정 장유의 여식으로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1631년(인조9) 14세에 봉림대군과 가례를 올리고 병자호란 후 소현세자 내외와 남편 봉림대군을 따라 청국의 볼모로 잡혀가 많은 뒷바라지를 하면서 심양에서 현종을 낳았다. 


1645년 소현세자 사망 후 봉림대군이 세자가 되었으나 즉시 책봉을 받지 못하고 이듬해 소현세자 강빈이 사사된 후에 비로소 세자빈으로 책봉됐다. 효종이 즉위하며 왕비에 진봉되었고 슬하에 소생으로는 현종과 6명의 공주를 두었다. 인선왕후효종 못지않은 북벌론 지지자였으며 효종과 더불어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 



그녀는 남편을 도와 굿판을 근절하고 금주령을 내리는 한편 이불색상을 적색과 청색 2가지 색으로 통일해 전시에 군복으로 활용하는데 일조했으며 이렇게 절약해 마련된 재원은 모두 북벌계획에 사용했다. 효종이 침을 맞다 과다출혈로 숨지고 아들 현종이 즉위하자 1661년(현종2) 왕대비가 되었으나, 세력이 커진 조정대신들에 의해 실권을 갖지 못했다.


인선왕후는 몸이 무척 뚱뚱했다고 전해지며, 현종 15년 질병을 얻어 회상전(會祥殿)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이때 그녀보다 6살 어린 시어머니 조대비가 생존해 있었기에, 효종의 승하이후 조대비의 복상(服喪)이 또다시 불거져 그녀의 죽음은 송시열 윤휴 [제2차 예송논쟁] 시발점이 되었다.



그녀는 여주에 효종과 함께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의 형식으로 안장됐다. 영릉(寧陵)은 효종과 인선왕후의 [쌍릉]이지만 능이 좌우가 아닌 상하로 배치되어 다른 왕릉과 사뭇 다른 모습을 이루고 있다. 이는 풍수적 논쟁에서 비롯된 것으로 효종의 능을 이곳으로 옮긴지 5개월여 만인 1674년 2월 인선왕후가 숨을 거두자, 왕은 생모의 유언에 따라 봉분을 선왕 옆에 쌍릉으로 조성하라 명하였다. 


이때 민유중(훗날 숙종장인)이 풍수상의 이유를 들어 왕비릉을 왕릉 아래에 쓸 것을 주청했다. "만약 쌍릉을 좌우로 쓴다면 정혈(正穴)이 가운데에 있어 혈이 비어버리게 됩니다. 지관들이 모두 말하기를 아래 혈(穴)이 매우 길하다 하오니 상하(上下) 혈로 쓴다 해도 이치상 쌍릉과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릉과 왕비릉을 좌우로 나란히 놓을 경우에 생기 왕성한 정혈을 비켜가야 하기 때문에 정혈이 흘러내리는 상하혈 자리에 왕릉과 왕비릉을 배치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이조판서 이상진은 능을 위아래로 조성할 경우 위의 땅을 파면 그 아래는 맥이 끊긴다하여 반대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곳 영릉이 풍수지리상 좌우 쌍릉이 옳은지 상하 쌍릉이 옳은지 모르겠지만 당시 민유중의 의견이 채택돼 오늘날 [영릉]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조선왕릉 중 동원상하릉 형식으로 조성된 왕릉은 훗날 제 20대 경종의릉(懿陵)에서 또다시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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