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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Nov 29. 2015

조선왕과의 만남(42)

현종릉_01


제18대 현종 1641~1674 (34세) / 재위 1659.05 (19세)~1674.08 (34세) 15년 3개월

 

Source: Chang sun hwan/ illustrator


▐  숭릉(崇陵) 사적 제 193호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2-1 (동구릉 내)


숭릉은 [동구릉]의 중심인 태조 건원릉 남서쪽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때문에  다른 능에 비해 방문객의 발길이 드문 탓인지 멧돼지가 간혹 출몰한다하여 출입이 통제된 비공개 능이다. 


출입금지 구역 안으로 울창한 숲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 들어가니 넓게 트인 능역이 눈앞에 펼쳐지는데, 숭릉의 풍경은 마치 [동구릉]과 동떨어진 전혀 다른 지역처럼 느껴진다. 숭릉은 동구릉(東九陵) 경내의 다른 왕릉보다 상대적으로 널찍하고 호젓한 능역이다.



더욱이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정자각의 지붕이 [팔작지붕]으로 세워져 시원스러움이 더해지는 능이다. 높지 않은 언덕에 왕릉과 왕비릉을 하나의 곡장 안에 쌍릉으로 조성하였고 병풍석 없이 난간석이 두 능을 감싸고 있다.


팔작지붕은 3칸 지붕인 일반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지붕 끝자락에 날개 같은 익랑(翼廊)이 추가돼 화려한 정자각을 이루고 있다. [팔작지붕]과 [익랑]은 명나라 양식으로 숭릉의 정자각에서만 볼 수 있는데, 당시 조정분위기는 오랑캐 청에 대한 반발심리가 남아있어 이미 망해버린 명나라의 풍속을 따르려는 경향이 만연해 있었다. 


숭릉 정자각

조선의 지배층들은 분수를 깨달아 큰 나라를 모시는 성리학적 중심사상인 사대주의에 젖어 중국문화가 조선으로 이어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명의 문화를 그대로 취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다. 


느닷없이 명나라의 풍을 따랐던 숭릉의 [정자각]은 그 화려함 뒤에 감춰진 당시 수난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현종은 조선의 역대 왕 중 유일하게 외국에서 출생한 왕이자, 단 1명의 후궁도 두지 않은 왕이다.



조선조에 후궁이 없던 왕은 현종 외 단종경종순종이 있다. 단종은 어린나이에 세조에 의해 강제로 왕비를 맞아 곧 사사되었고, 경종연잉군(영조)을 왕세제로 삼으려는 노론 때문에 후궁을 맞을 수 없었으며, 일본에 의해 강제로 황위에 올랐던 순종은 나라 형편상 후궁을 들일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심성이 어질던 현종은 조강지처의 거친 성정 때문에 자신의 뜻대로 후궁을 들일 수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현종은 부왕이 봉림대군 시절 청의 볼모로 가있던 심양에서 태어났으며 1649년(인조 27) 세손에 책봉되고 1651년(효종2)에 왕세자로 진봉되었다. 



현종재위 15년은 대부분 예송(禮訟)을 둘러싼 당쟁으로 인해 왕권이 많이 약화돼 있었다. 부왕의 급서로 현종이 즉위하자마자 복제(服制)라는 예론문제에 부딪히며 왕권은 뒷전으로 밀리고, 중신들의 예론정쟁만이 조정을 뒤흔들었다. 


궁중상례로 인조계비인 자의대비 조씨의 상복(喪服)이 당쟁화 된 것이다. 당시 사가(私家)에서는 주자가례에 의한 사례의(四禮儀: 관혼상제의례) 준칙이 지켜졌지만, 왕가에는 오례의가 준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국조오례의]에는 효종과 자의대비 관계와 같은 사례에 따른 지침이 없었다. 


당시의 국상은 성종 조 완성된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있었는데, 적장자가 죽으면 부모는 3년간 상복을 입고 그 이하 다른 차자(次子)가 죽으면 1년간 상복을 입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이때의 [예송]은 겉으로 보면 복상(服喪)기간의 문제였지만 사실은 유교의 종법(宗法)질서가 왕가에까지 미치는 것인지가 핵심 쟁점이었다. 



1차 예송은 인조의 차자인 효종이 죽자 일반사가와 동일하게 차자로 볼 것인지 왕통을 계승한 적장자로 예우할 것인지를 결정해야하는 문제였다. 이에 따라 예법적용이 달라지는 것은 정국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임으로 각 정파 간에 양보할 수 없는 논쟁으로 번져간 것이다. 


조선중기에는 이황(東人)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과 이이(西人)의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 등에 성리학사상이 사회발전과 맥을 같이했다. 이기이원론은 만물의 존재가 이(理)기(氣) 두 요소로 이루어졌다는 이론으로 성리학에서는 [이기이원론]을 수용했지만, 이기일원론은 현실을 개혁해야 한다는 실천철학으로 기(氣)를 강조하였다. 



조선후기 들어 [예송논쟁]이 격화된 것은 성리학의 주류인 예학(禮學)을 통해서 수구적 사상으로 회귀하려 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이후 신분제 해체에 대한 민중들의 열망이 강해지자 신분질서를 강화하여 기득권을 사수하려는 지배층 의지가 예학으로 귀결되었다. 


하지만 신분강화를 목적으로 했던 예학을 집대성한 송익필(宋翼弼)이 노비로 전락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후 조선의 [예학]은 송익필의 제자 김장생과 그 아들 김집, 그리고 송시열송준길이 주도하는 [서인세력]의 이념이 되어 현종 조에 이르러 성리학의 주류가 되었다.


조선의 예법은 "경국대전"과 "국조오례의" 그리고 중국의 "주례", "주자가례(朱子家禮)" 등을 복합해 만들었으며 이에 따른 상복에는 참최(3년 복), 재최(1년 복), 대공(9개월 복), 소공(5개월 복), 시마(3개월 복) 등 5복제도(五服制度)가 있었다.



인조의 적장자였던 소현세자 상(喪)에 계모였던 자의대비가 맏아들의 예(禮)로 3년 상(喪)의 상복을 이미 입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 둘째아들인 [효종의 상]을 당해 얼마간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가 문제되었던 것이다. 


1660년(현종1) 남인 허목과 윤선도 등이 "왕과 일반인의 예법은 달라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며, 효종이 왕위를 계승하였으니 장자로 인정해 대비의 상복에 대해 [3년 복상]을 주장하며 서인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당시 집권파인 서인 송시열과 송준길 등은 "천하의 예법은 같다" 는 주장을 하며 효종이 인조의 장자가 아니고 차자(次子)이므로 계모인 대비 조씨의 복상은 [1년 복상]인 기년설이 옳다는 주장을 고집하고 있었다. 



이무렵 조정은 1575년(선조8) 동인에게 배척되었다가 인조반정으로 정치계에 복귀한 [서인세력]이 정치중심에 있었다. [동인계열]은 북인과 남인으로 분파된 뒤에 북인에게 배척됐던 [남인세력]이 인조 조에 복권되면서 서인과 남인의 대립이 갈수록 첨예화되고 있었다. 


인조와 효종 조에 [서인]과 [남인]의 관계는 감정적 대립이 적었고 특히 학문적 관계에서는 상호교섭이 원활했다. 그러나 효종의 죽음으로 예론이 당쟁으로 점화되고 당파 간 감정이 격화되는 극한대립이 발생되었으나, 현종은 서인주장인 기년설을 채택함으로써 서인이 득세하게 되었다. 


이때 효종은 남인 허적을 형조판서에 유임시키며 훗날 [남인]이 재기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었다. 이로써 [예송]은 종결되는 듯했지만 논쟁이 다시 지방으로 번져가며 그 시비가 더욱 커지자, 1666년(현종7) 조정은 기년복 결정을 재확인하면서 이에 대해 항의를 하면 이유를 불문하고 엄벌에 처한다는 포고령을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74년(현종 15)에 생모 인선왕후(효종 비)가 죽자, 할머니인 자의대비(인조계비)의 복상문제로 2차 예송이 또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모후의 국상에서 대비의 복상기간은 부왕보다 한 단계 낮은 격식으로 치르게 되어, 선왕의 전례에 따르면 9개월 복상하는 것이 정답이지만 현종의 생각은 종전과 달라져 있었다. 


이 때 남인이 기년설(1년 복상)을 주장하자, 서인은 대공설(大功說; 9개월 복상)을 주장하고 나섰다. [서인]과 [남인]은 효종 승하 때와 같은 논리를 주장한 것인데, 현종은 장인 김우명과 [남인세력]의 기년설 주장을 채택하였다. 



사실 현종은 선왕(효종)을 차남으로 간주해 정통성에 상처를 냈던 1차 예송논쟁에 불만이 있었다. 즉위 초 19세의 어린 나이였던 현종은 왕권이 확립되지 않은 터라 집권세력의 주장을 따를 수밖에 없었지만 2차 예송논쟁 때에는 자신의 뜻을 관철시킬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남인기년설을 채택하고, 선왕의 국상 때 자의대비 복제를 1년으로 정했던 송시열의 죄를 물어 유배함에 따라 서인은 조정서 물러나고 [남인세력]이 득세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듯 현종 조의 조정은 국력을 오직 예론(禮論)에 쏟아 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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