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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Nov 29. 2015

조선왕과의 만남(43)

현종릉_02


제18대 현종 1641~1674 (34세) / 재위 1659.05 (19세)~1674.08 (34세) 15년 3개월


Source: Chang sun hwan/ illustrator

 

▐  숭릉(崇陵) 사적 제 193호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2-1 (동구릉 내)


조선왕조 특징을 보면 왕권을 강화하고 기득권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군왕이 척신세력을 이용하곤 했는데 현종 조에는 오히려 중전인 명성왕후(明聖王后)와 그 아비 김우명이 나서 당파를 형성한 세력들과 합세하며 왕권을 더욱 혼란에 빠지게 했다. 명성왕후는 성격이 과격해 거친 행동을 서슴지 않는 여인이었다.


김우명 또한 영의정을 지낸 선친 김육과 달리 진사시에 합격하고도 학문에 뜻이 없어 강릉(명종 능) 능참봉을 거쳐 세마(洗馬)직을 지낸 한미한 위인이었으며, 사위 현종이 즉위하자 국구(國舅)가 되어 오위도총관과 호위대장을 겸직하면서 서인남인사이를 오가며 그들이 뒷거래를 해오면 한통속이 돼 결탁했던 탐욕스런 인물이었다.     


서인 측에 머물렀던 김우명 숙종 초에 민신의 대부복상(代父服喪: 실성한 아비 대신 손자가 상주가 된 것) 문제를 다룰 때 남인에 동조했다. 하지만 명성왕후홍수의 변을 꾸며 왕족과 남인을 제거하고자 했다. 홍수(紅袖)는 붉은 옷소매를 입던 궁녀를 지칭한다. 당시 현종에게는 후사를 이을 아들이 한 명밖에 없었다.

 


반면에 현종 아우인 인평대군은 복창군, 복평군, 복선군 등 3명의 아들을 두어 이들을 삼복(三福)이라 불렀다. 명성왕후인평대군남인과 힘을 합해 자신의 외아들을 해치고 이들 중 한명을 왕으로 추대할지 모른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숙종이 즉위하자, 삼복을 제거하기 위해 이들이 궁녀들과의 불륜관계를 맺고 있다고 아비 김우명 통해 거짓 상소를 올렸다. 이는 후일 무고로 밝혀지면서 김우명의 처벌이 논의되자, 그녀는 편전에 나타나 "내 말이 맞다!" 며 악을 쓰고 대성통곡하며 아들 숙종을 다그쳤다.


이때 남인 윤휴 등으로부터 "왕조창건이래 전례가 없었다."라며 공박을 당했다. 결국 김우명의 처벌은 무마되고 삼복이 귀양 가는 것으로 마무리됐지만, 1680년(숙종6) 경신대출척 때 복선군남인 허견의 추대를 받아 역모를 꾀했다는 서인 김석주 무고로 삼복은 끝내 사사(賜死)다.



당파적 입장이 매우 강했던 명성왕후숙종의 총애를 받았던 [남인세력]의 여인인 장옥정(장희빈)을 그녀의 집안이 남인과 가까웠다는 이유로 궐 밖으로 내치면서 [남인세력]과는 견원지간(犬猿之間)이 되었다. 현종은 선왕 대에 흔들렸던 조선의 지배질서 확립을 위해 노력했다.


북벌을 중단하는 대신 화승포 등을 제조하여 강화도에 배치하고 훈련별대를 창설해 군비를 강화했다. 1668년 김좌명에게 명해 10만여 동철활자를 주조하고 강화도 정족산성에 사고(史庫)를 마련해 역대실록을 보관하게 했다.


송시열의 건의로 동성통혼을 금지시켰으며 국가재건을 위한 호구증가를 유도하고자 양민의 입승(入僧)을 금지하고 어린승려는 환속하게 했으며 산간지방 유민들을 호적에 편성하고 국경을 넘어가는 월북인(越北人)을 범죄로 다스렸다.



아울러 부족한 나라살림을 위해 영직첩과 공명첩을 대량 발급하고 천민 중 양처(良妻)의 소생은 양인으로 전환토록 하여 조선의 신분제 해체에 크게 기여하였다. 사실 2차 예송현종이 인조반정 이후 50년간 집권해온 [서인세력]의 지배체계를 무너뜨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는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과 추종세력들을 정연한 논리로 몰아붙이며 국왕위에 군림하던 서인들을 몰아내고 자신의 의도대로 남인을 등용하게 됐으나, 예론논쟁 중이던 현종 15년 8월 갑작스런 복통이 발병한지 25일 만에 급서했다.



당시 논쟁와중에서 서인 김수홍을 내쫓고 남인 허적을 영의정에 임명해 집권세력을 교체하고 있었는데 이때 허적현종의 급작스런 병세가 서인들과 연관돼 있다고 판단해 장인 김우명과 매제 심익현으로 하여금 병실을 지키도록 했지만 이미 현종은 혼수상태에 있었다.     


결국 현종은 당쟁으로 지새웠던 남인서인의 극단적인 [예송]에 시달리다 그의 치적을 남기지도 못한 채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에서 왕성한 34세 나이에 한 많은 이승을 하직했다. 그는 죽어서도 현종실록 편찬과정으로 인해 편히 잠들 수 없었다.


현종실록은 숙종 1년부터 편찬이 착수되었으나, 도중 [서인]이 몰락하고 남인이 조정을 장악하자 편찬작업이 일시 중단됐다가, 숙종의 독촉을 받고 숙종 3년에 겨우 완성한 졸속의 실록이었다. 이때의 [현종실록]은 편찬과정에 현종 말부터 숙종 초에 걸쳐 득세한 [남인]이 많이 참여했기 때문에 서인이 주축이 됐던 현종 초의 예론도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illustrator / 정윤정

따라서 이러한 처사가 [서인]으로는 불만 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1680년(숙종6) 경신환국(庚申換局)을 계기로 [남인]이 숙청되고 서인이 다시 조정을 장악하자 현종실록이 3개월 만에 만들어져 미흡하다 주청하며 서인중심의 "실록개수청"을 설치해 1683년 [현종개수실록]을 완성했다.


조선왕조실록 중 수정실록은 "선조실록"과 "경종실록"이 있으나 "현종실록"은 개수실록에 해당된다. 이러한 정쟁의 결과로 현종실록이 부득이 개정과 수정을 거쳐 [현종개수실록]이란 이름으로 남아있는 것을 보면 당시의 당쟁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현종(顯宗) 쌍릉

1679년 숙종은 그간 20년에 걸친 기해복제(己亥服制) 문제의 재론을 금하는 엄명을 내려 이후 조정에서 거론되는 일이 없었지만, 이후에도 내면적으로는 많은 시비가 지속되고 있었다. 현종이 잠들어 있는 숭릉의 석물들은 여주로 천장하며 [동구릉] 경내에 파묻고 간 선왕 효종영릉 석물을 대부분 재사용했다.


조선왕릉 정자각은 모두가 단아하고 정갈한 [맞배지붕]인데 반해  유독 숭릉의 정자각은 [팔작지붕]과 좌우에 익랑(翼廊)을 갖추고 있어 그 화려함을 더하고 있지만 안타깝던 효종의 혼령은 그와 어울리지 않은 팔작지붕을 벗 삼아 호젓이 잠들어 있는 듯하다.



제18대 현종비 명성왕후 1642 ~ 1683 (42세)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는 영돈령부사 김우명의 여식으로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1651년 10세에 현종과 가례를 올리며 세자빈으로 책봉돼 1659년 18세 왕비에 올랐다. 김씨는 영의정이던 김육의 손녀로 소시적부터 남달리 총명해 한 번 보고 들은 것은 잊지 아니하고 사서(書史)에 통달했으며, 식견과 도량이 빼어났다는 평을 들었던 여인이었다.


조선의 왕비 중 세자빈· 왕비· 대비의 세 과정을 모두 거친 왕비는 현종 비 1명뿐이다. 명성왕후는 1661년 원자(숙종)를 낳고 이후  3공주를 두었다. 남편 현종이 한명의 후궁도 들이지 못할 정도로 지능이 비상하고 성격이 사나워 궁중 일을 다스림에 거친 처사가 많았다.


명성왕후 (illustrator / 이철원)

하지만 천재(天災)로 인해 백성들이 곤궁해지자 특별히 궁에 명하여 내탕고에 남아있는 쌀과 포를 진휼청(賑恤廳)으로 돌려 구휼정책을 펴기도 했다. 명성왕후홍수의 변 사건을 꾸몄다가 증거가 발견되지 않아 무고로 판명되자 큰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이때 남인들은 명성왕후를 조선중기 중종의 계비로서 권력을 휘둘렀던 문정왕후에 빗대어 "문정왕후를 다시 보겠다."라고 비아냥거리며 김씨의 정치 간섭을 비난하였다. 이 사건으로 명성왕후의 아비 김우명은 두문불출하다 울화병으로 사망했고 이를 계기로 [서인]과 [남인]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紅袖之變

1683년(숙종9) 23살이던 아들 숙종이 기괴한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자 다급한 마음에 무속신앙에 의지해 무당을 불러 들였는데 무당은 숙종에게 삼재(三災)가 있어 기질을 앓고 있는 것이니, 왕의 쾌유를 위해서 모후(명성왕후)가 삿갓을 쓰고 홑치마를 입은 채 물 벌을 서야한다고 주장했다.


명성왕후는 터무니없는 무당의 주장을 받아들여 혹독했던 그해 겨울에 삿갓을 쓰고 홑치마만 입은 채 물벼락을 맞았고 결국 그 후유증으로 지독한 독감을 얻어 12월 창경궁 저승전(儲承殿)에서 42세로 생을 마감함으로써 [동구릉] 경내 숭릉현종과 함께 나란히 묻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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