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주 Dec 02. 2015

조선왕과의 만남(44)

숙종릉_01


제19대 숙종 1661~1720 (60세) / 재위 1674.08 (14세)~1720.06 (60세) 45년 10개월


Source: Chang sun hwan/ illustrator


▐  명릉(明陵) 사적 제 198호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산30-1 (서오릉 내) 


[서오릉]을 드리운 효경산은 주변의 마을에서 효자가 많이 났다하여 효경산(孝敬山)으로 불린다. 서오릉에서 가장 규모가 큰 명릉숙종과 제1계비 인현왕후 및 제2계비 인원왕후 세 사람이 잠들어 있는 능이다. 명릉은 서오릉(西五陵) 경내와 동떨어진 동편에 단독의 능역을 갖추고 있다. 


희빈 장씨로 인해 폐비가 되었다가 복위돼 35세로 단명한 인현왕후에 대한 회한(悔恨)으로 숙종은 장례를 성대히 치루고 현재위치에 인현왕후의 능을 조영하였다. 숙종은 음양오행에 따라 왕비 능 좌측에 자신의 수릉을 정하고 60세 일기로 승하하자 인현왕후(제1계비) 곁에 쌍릉을 이뤄 나란히 잠들게 됐다. 


뒤에 묻힌 인원왕후(제2계비)의 능은 또 다른 좌측언덕에 단릉을 이루며 동원이강 형식으로 조성되어 있다.   

왕릉은 혼령입장에서 보면 우상좌하(右上左下)의 상례를 따르기 때문에  일반인이 능을 바라보는 위치에서는 좌측언덕에 왕릉을 조성하는 것이 원칙인데 명릉은 서열이 낮은 인원왕후 능이 가장 높은 자리인 좌측언덕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숙종 능보다 상석인 좌측 인원왕후 능

이는 성리학과 풍수설을 중시 여겼던 조선왕실 상설(喪設)과는 배치된 형상이다. 원래 인원왕후는 자신의 사후 숙종 곁에 묻히길 소원하여 명릉에서 400보 떨어진 언덕에 능지를 미리 정해 두었으나, 1757년(영조 33) 71세로 세상을 떠나며 자신이 정해두었던 능지에 묻히지 못했다. 


그녀가 죽기 1달여 앞서  66세의 정성왕후(영조 원비)가 서거하여 며느리인 왕비국상이 치러지면서 [서오릉] 내에 정성왕후홍릉(弘陵) 산릉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당시 영조홍릉을 자신의 수릉지(壽陵地)로 만들라 명했기에 대대적인 공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영조는 계모와 아내의 초상을 함께 치루며 계모가 정해둔 자리에 넓은 소나무 숲을 벌채하는 막대한 비용과 인력을 감당하기 어려웠기에 계모의 유언이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실 인원왕후는 계모이면서 영조를 위기에서 구해주고 왕위에 무사히 오를 수 있도록 도와준 후원자였다.


그러나 그녀는 별도의 정자각과 능호조차 갖추지 못한 채 명릉 한편에 미완성된 능으로 잠들어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인원왕후(제2계비)는 생전에 소원했던 것보다 오히려 남편과 더 가까운 곳에 묻히게 되었고 숙종의 능보다 상석인 왼쪽언덕에 잠들게 된 것이다. 


인원왕후 능(좌) / 숙종과 인현왕후 능(우)

명릉은 숙종의 유지에 따라 능침의 부장품을 줄이고 석물도 실물크기로 간소하게 조영하여 능역조성에 드는 인력과 경비를 절감함으로서 이후 왕릉의 형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능침에는 병풍석을 두르지 않았고 이때 팔각의 장명등도 사각으로 바뀌었으며 인원왕후의 능도 숙종의 쌍릉과 같은 양식으로 조성되었다.  


명릉은 인현왕후가 세상을 떠났을 때 숙종이 직접 택지한 명당이었는데, 숙종과 인원왕후가 이곳으로 능을 택한 일화가 남아있다. 어느 날 숙종이 민심을 살피기 위해 궐을 벗어나, 어느 고개 너머 개울가 길을 지나가고 있는데 냇가에서 한 젊은이가 울고 있었다. 


그 연유를 물으니 갈처사라는 유명한 지관(地官)이 이곳에 무덤을 쓰면 좋다하여 땅을 팠는데 아무리 파 봐도 물이 고이니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숙종은 그 지관이 장난을 쳤다고 여기고 젊은이를 불쌍히 여겨 관청에 가서 쌀 300석을 받아올 수 있도록 서신을 한 장 적어주었다. 



그리고는 지관이 사는 오두막집을 찾아가 젊은이의 일을 따져 물었다. 그러자 지관은 "모르면 잠자코 계시오. 저 땅은 무덤을 쓰기도 전에 쌀 300석을 받게 될 것이니 명당자리로 들어가는 자리라오."라며 숙종에게 오히려 핀잔을 주었다. 


그의 신통함에 놀라 자신이 임금인 것을 밝히고 훗날 자신이 묻힐 명당을 부탁했는데, 지금의 서오릉(西五陵) 명릉 터가 신통한 지관 갈처사(葛處士)가 택한 자리라고 한다.  또한 갈처사가 머물던 “칡 갈(葛)”, “고개 현(峴)”의 칡넝쿨 고개가 지금의 과천시 갈현동이고 개울은 수원천이라 전해진다.


illustrator / 신현

숙종은 1661년 경덕궁(현 경희궁)에서 현종의 외아들로 태어나 1667년(현종8년) 세자로 책봉돼 14세 어린나이로 창덕궁 인정전(仁政殿)에서 왕위에 올랐으나, 수렴청정을 받지 않고 직접 나라를 통치했던 총명한 군왕이었다. 


그의 치세기간은 조선중기 이후 지속돼온 붕당(朋黨)정치가 절정에 이르며 개국 이래 당파싸움이 가장 극심했던 때였다. 남인청남탁남으로, 서인 또한 노론소론으로 그리고 노론화당, 낙당, 파당으로 분열하는 이합집산의 형태가 나타나며 송시열, 김수항, 허적 등 당대의 명사(名士)들이 죽임을 당했다. 


尤菴 송시열

숙종은 46년간을 장기집권하며 왕권강화를 위해 지난날 당파 간 연정(聯政) 방식을 버리고 필요시 붕당을 교체하는 환국(換局) 방식을 택하였다. 환국정치는 한 당파가 다른 당파를 완전히 몰아내고 제1당 만이 정국을 주도하는 방식으로 내각을 자주 교체함으로써 붕당대립을 촉발시켜 임금에 대한 충성을 경쟁토록 유도해 왕권을 강화하는 방법이었다. 


외형상으로 보면 숙종 조는 당쟁이 가장 극심했던 시기였지만 실제로는 치열한 정책대결 속에서 오히려 왕권이 강화되었고,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에 혼란에서 헤어나지 못한 사회를 전반적으로 수습하고 재정비하여 나라발전이 가속화됐던 시기이기도 했다. 



숙종을 떠올리면 빼어난 미모와 술수로 궁녀신분에서 왕비자리까지 올랐던 장희빈 때문인지 마치 여인들의 치마폭에 휩싸였던 호색한으로만 기억하고 있는 경우도 간혹 있다. 하지만 숙종은 [환국정치]를 통해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배후에 연결되어 있던 서인과 남인을 번갈아 바꿔가며 신권(臣權)을 쥐락펴락했던 비범한 군주였으며, 두 여인을 일련의 정략에 이용했던 가장 정치적인 군왕이었다. 


숙종은 백여 년 만에 강건하게 태어난 왕실의 적장자로 부왕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체계적인 제왕수업을 받은 후 정상적으로 왕위에 오른 유일한 왕이었다. 항상 자부심이 충만했던 숙종은 어린나이 임에도 불구하고 즉위 4개월 만에 수렴청정을 거두어버렸다. 



뿐만 아니라 그는 조선시대 손꼽는 성리학의 거두인 송시열을 조정에 들였다 내쳤다 반복했던 조선 오백년 역사상 흔치않은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던 대왕이다. 14살의 숙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제일 먼저 당면했던 문제는 신권을 제어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일이었다. 


숙종은 3차례의 환국을 통해 승자에게는 권력을 쥐어주고 패자에겐 대대적인 숙청이 뒤따르게 함으로써 일거에 신하들을 제압했다. 따라서 신하들 사이에서는 왕의 눈치만 살피며  자신들이 살기위해 반대세력을 몰살(沒殺)해야 하는 정글법칙이 일어나게 되었다. 



숙종은 스무 살이던 재위 6년에 경신환국, 재위 15년에 기사환국, 재위 20년에 갑술환국을 일으켰다. 그때마다 [남인세력]과 [서인세력]의 정권이 뒤바뀌고, 숙종 조 이전 발생했던 사화(士禍)로 목숨을 잃었던 정승보다 더 많은 숫자의 대신들이 세상을 등졌다.


숙종은 즉위하던 해(1674년), 할머니인 효종비의 사망으로 발생한  2차 예송을 통해  손상된 왕실권위와 약화됐던 왕권을 강화하고자 [대공설]을 주장했던 집권세력 서인을 배척하고, [기년설]을 채택함으로써 남인이 집권토록 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50여년 만에 재집권한 남인은 송시열 등 서인의 처벌문제를 놓고 강경파인 우의정 허목 청남(淸南)과 온건파인 영의정 허적 탁남(濁南)으로 분열됐다. 숙종은 온건파인 허적윤휴 등 탁남을 등용하였다. 


2차 예송 시 숙종(14세)

당시 탁남은 북벌론을 재론하며 강화도에 성을 쌓고 군비확장에 박차를 가했는데, 이러한 북벌의 재등장은 숙종 원년 청나라에서 반란이 일어난 것을 핑계로 [남인정권]이 권력을 유지하려는 정책목표이기도 했다. 하지만 숙종은 모후 명성왕후의 사촌동생인 김석주를 기용해 남인세력을 견제하고 있었다. 


1680년(숙종6) 3월 영의정 허적에게 궤장(几杖: 공신에게 하사된 지팡이)이 하사되어 집안잔치를 열었는데 하필 비가 내려 궁중에서 기름장막을 왕의 허락 없이 가져다 사용했다가 때마침 숙종이 이를 알게 되어 크게 진노하였다.


이때 연회에서 병조판서 김석주와 숙종의 장인 김만기를 독주로 죽이고 허적의 서자 허견이 무사를 매복시킬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퍼졌다. 수세에 몰려있던 서인허견복선군을 추대하려는 역모를 꾸몄다고 고발함으로써 남인의 영수 허적, 윤휴 등이 사사되고 [남인세력]이 축출되는 경신환국(경신대출척)이 일어났다. 



이로써 다시 서인들이 등용되었다. 하지만 1683년 서인 김석주가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남인을 박멸하려 하자 소장세력이 그 수법이 졸렬하다 비난하면서, 서인송시열의 노론(老論)과 그의 제자 윤증이 중심이 된 소론(少論)으로 분열하게 됐다. 


노론은 대의명분을 존중하여 명과의 의리를 강조하고, 소론은 실리를 중시하며 적극적인 북방개척을 주장했다. 이때 노론인 송시열과 3척신(김석주, 김만기, 민정중)으로 불리던 외척이 연합해 정치를 주도하고 있었다.


또한 [서인정권]이 5군영제를 완성시키며 병권이 외척에게 넘어감으로써 숙종은 실질적인 병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하지만 인현왕후 중심의 [서인]들과 희빈 장씨를 중심으로 하는 [남인]들은 여전히 대립하고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조선왕과의 만남(4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