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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Dec 02. 2015

조선왕과의 만남(45)

숙종릉_02


제19대 숙종 1661~1720 (60세) / 재위 1674.08 (14세)~1720.06 (60세) 45년 10개월

     


▐  명릉(明陵) 사적 제 198호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산30-1 (서오릉 내) 


1689년(숙종15) 인현왕후가 가례를 치룬지 6년이 넘도록 자식이 없자, 총애하던 남인가(家)의 장희빈 아들(경종)에 대한 세자책봉 논의과정에서 시기상조라는 상소를 올린 송시열이 사사(賜死)되고 서인들은 유배되거나 죽임을 당했다. 


이로써 9년 만에 노론(老論)이 몰락하고 인현왕후가 폐위되는 기사환국이 일어나며 [남인정권]이 또 다시 집권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이듬해 장희빈은 정비(正妃)가 되고 아들이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이후 숙종은 장씨의 방자한 행동으로 그녀에게 염증을 느끼며 민씨를 폐한 일을 후회하게 되었다. 



1694년(숙종20) 서인 김춘택 등이 폐비 민씨의 복위운동을 하자 집권세력인 남인은 수십 명을 체포해 국문하며 [서인일파]를 타도하려 했다. 이를 문제 삼아 갑술환국이 발생하여 남인이 대거 축출되고 5년 만에 [서인세력]이 재집권했다. 


이로부터 [남인]은 재기불능의 상태로 전락하였다. 복권한 소론(少論)들의 요구로 숙종은 폐비 민씨를 창덕궁 경복당(景福堂)으로 불러들여 왕비로 복위시켰다. 빈으로 강등된 장씨는 중전으로 복위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한때 오라버니 장희재가 인현왕후 민씨를 모해하려는 서찰이 발각돼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소론의 남구만이 세자의 앞날을 생각해야 한다고 간청하여 겨우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1701년 인현왕후가 죽은 후 장희빈의 거처인 취선당 서쪽에서 민비가 죽기를 기원하며 자신의 복위를 꾀한 신당(神堂)이 발견되었다. 인현왕후를 죽게 하려고 신당에 무당을 데려와 굿을 하며 왕비를 저주했던 사건이 밝혀지며 진노한 숙종은 희빈 장씨가 스스로 자진케 했는데 이를 듣지 않자 끝내 사약을 내렸다. 


이때 장희빈의 선처를 간언한 [소론] 대신들이 파직됨으로써 노론이 대거 조정에 진출하게 됐는데, 이 사건을 무속신앙에서 비롯됐다 하여 "무고(巫蠱)의 옥"이라고 한다. 



이러한 연속된 [환국정치]는 이후 조선 당쟁사에서 정치보복이 일상화 되는 단초가 됐지만 숙종은 대외전란이 없던 평화로운 가운데 가장 치열했던 당쟁을 끌어안고 환국정치 통해 강한왕권을 바탕으로 임진왜란 이후에 무너졌던 사회전반의 문제를 대부분 해결함으로써 민생안정과 경제발전에 상당한 치적을 남겼다. 


숙종은 선왕 대에 겪었던 외침에 대비해 즉위 이듬해 개성남포에 산성을 쌓고 수도방어를 위해 강화도에 망루를 축조했으며 [북한산성]을 대대적으로 개축하여 [남한산성]과 함께 한양수비의 양대 거점으로 삼았다. 


또한 군사제도를 종래 4군에서 5군영체제로 전환해 효율적인 군제로 개편하고 압록강 주변의 무창, 자성 2진(鎭)을 개척해 옛 영토를 회복했다. 이 과정에서 청나라와 국경분쟁이 일어나자 청과 협상해 백두산 정상에 [정계비]를 세워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illustrator / 정윤정

경제적으로는 임진왜란 이후에 일부 실시해오던 [대동법]을 경상도와 황해도까지 확대해 전국적인 토지개혁을 완성시켜 전정(田政)을 종결함으로서 백성들의 조세부담을 줄였다. 양인의 군포(軍布)를 감해 주고 점차 활발해지는 경제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상평통보]를 주조하고 중앙 및 지방관청에 통용토록 장려했다. 


이러한 숙종의 경제시책은 조선후기 상업발달과 사회경제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해 막부정권을 상대로 협상 끝에 울릉도독도에 출몰하는 왜인을 쫓아내고 출입을 금지했다. 이때 울릉도 지도가 제작되기도 했다. 


한편 노산군을 복위시켜 단종 묘호를 종묘에 올림과 동시에 사육신(死六臣)의 명예도 회복시켰으며 소현세자 빈 강씨를 복위시켜 왕권강화 측면에서 과거사 재정립 작업이 이뤄졌다. 또한 이순신 사당에 현충(顯忠)이란 호를 내리고 의주에 강감찬 사당을 건립해 백성의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또한 노론의 대명의리론 주장에 따라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운 명의 은공을 갚는다는 뜻으로 명나라 신종(神宗) 제사를 행하는 대보단(大報壇)을 창덕궁에 설치하기도 했다. 그밖에 국가질서 강화를 위한 각종 편찬사업이 활기를 띠며 조선후기 성리학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숙종 조 중반이후에는 잇단 흉년과 질병으로 인구가 감소되었으나 민생안정이 정착됐던 숙종 43년에는 조선의 인구가 680여만 명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1697년(숙종23)에는 황해도 구월산을 무대로 활약해오던 장길산의 농민군 세력이 커지게 되었다.


한양에서는 중인 및 서얼들이 장길산 무리와 합세해 새 왕조를 세우려다 발각되는 일이 일어나는 등 크고 작은 어수선한 일들이 횡행하기도 하였다. 숙종은 애증편향이 심했고 그로 인하여 당쟁을 격화시켜 정치에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하지만, 사실 그는 아내들의 희생을 담보해가며 정국을 운영해 간 비정하며 강인했던 군왕이다. 


illustrator / 박시백

때문에 [붕당정치] 하에 손상되었던 왕권의 강화에 비상한 능력을 발휘하며 재위 46년간 조선조 중흥의 기틀을 다지는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숙종인경왕후, 인현왕후, 인원왕후인 3명의 왕비와 희빈 장씨, 숙빈 최씨 등 9명의 아내를 두었으며 1718년(숙종44)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위임하였다. 


1720년 병환이 위독해지자 좌의정 이이명을 불러 사관의 입회 없이 연잉군경종의 후계자로 삼도록 하라는 유지를 남긴 뒤에 경덕궁 융복전(隆福殿)에서 60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이러한 유명(遺命)은 후일 신임사화의 화근이 되었다.




제19대 숙종 제1계비 인현왕후 1667 ~ 1701 (35세)

      

인현왕후 민씨는 병조판서 민유중의 여식으로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숙종 원비 인경왕후가 죽은 후 1년 뒤인 1681년(숙종7) 대비 김씨와 서인세력들의 추천으로 가례를 올리고 15세에 계비가 되었다. 민씨가 태어날 때 집안에 광채가 빛났고 출산직후에 향긋한 향기가 났다고 전해진다. 


때문에 그녀의 백부는 민씨가 너무 아름답고 착해 요절하지 않을까 걱정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민씨는 결혼초기부터 숙종의 애정을 받지 못한 것으로 전한다. 더욱이 대비(명성왕후) 김씨의 사후 숙종은 과거 대비 김씨에 의해 출궁됐던 궁인 장씨를 환궁시켜 후궁으로 삼고 총애하였다.   


  

인현왕후는 예의가 바르고 덕성이 높아 국모로서 만백성의 추앙을 받았지만 왕자를 낳지 못했다. 그녀는 장희빈을 견제하고자 숙종에게 후궁들이기를 간하여 김수항의 종손녀인 영빈 김씨를 간택후궁으로 추천해 입궐시키기도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1688년 후궁 장씨가 아들 균(경종)을 낳자 숙종의 총애는 더욱 장씨에게 쏠리게 되었다. 이듬해 숙종은 균을 원자로 정하고 세자로 책봉하고자 했으나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 등이 상소를 올려 송나라 철종의 고사(古事)를 예로 들면서 원자정호(元子定號)를 후일로 미룰 것을 주장했다. 


이 문제는 결국 기사환국으로 이어져 서인들이 쫓겨나고 인현왕후 역시 폐서인되어 안국동 사가로 내쳐지게 되었다. 울진문화원에서 간행된 "울진설화"에 수록된 설화를 소개해 본다. 안국동 감교당에서 죄인처럼  5년간의 세월을 보내고 있던 인현왕후는 마침내 자결할 생각으로 독약을 앞에 놓고 울다가 잠이 들었다. 



그런데 꿈에 한 백발의 노인이 나타나, "천축산 불영사에 있는 중인데 괴로우시더라도 3일만 더 기다리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라 했다. 과연 3일 뒤 인현왕후는 복위된다는 전갈을 받게 되었고 민씨는 이 꿈이 신기하여 왕께 아뢰었다.  


왕이 울진으로 사람을 보내 알아보니 꿈속에 노승이 중종 조에 양성법사로 밝혀졌다. 이에 숙종은 현몽 예언에 감사하여 불영사 주변10리 안의 땅을 시주했다고 전한다. 1694년 숙종이 다시 [남인]들을 몰아내고 서인들을 기용한 후 민씨는 환궁 비망기를 받아 환궁한 뒤 왕비로 복위했다.


그녀는 예의바르고 정숙했다 전하나 장희빈에게 매질을 하거나 폭언을 하는 등 상반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민씨는 복위 후 숙종의 명으로 세자 균을 자신의 양자로 입적했고 복위된 지 8년 만인 1701년 폐병으로 창경궁 경춘전(景春殿)에서 35세의 젊은 나이로 운명(殞命)하였다.


     

"오호라, 현후의 맑은 자품(資品)으로 일개 혈육이 없고 어진 성덕으로 하수(遐壽)를 누리시지 못하시고 천도(天道)가 과히 무심한지라. 이는 반드시 과인의 실덕무복함을 하늘이 미워하사 과인으로 하여금 무궁한 한이 되게 하시는 도다.(생략)..." 


조선의 3대 궁중문학인『인현왕후전』에는 왕의 애달픔 속에 생을 마친 인현왕후의 장례 때 숙종이 제문을 지어 민비의 명복을 빌었던 기록이 전해지고 있기에 당시 숙종이 지녔던, 회한(悔恨)의 깊이를 가늠해 볼 수 있을 듯하다.  


숙종과 함께 잠들어 있는 인현왕후


제19대 숙종 제2계비 인원왕후 1687 ~ 1757 (71세)

    

인원왕후 김씨는 숙종의 두 번째 계비로 순안현령 김주신의 여식이며 본관은 경주(慶州)다. 그녀는 인현왕후 민씨가 서거하자 이듬해인 1702년(숙종 28) 16세 나이로 42살이던 숙종의 3번째 왕비로 책봉됐다. 


1711년(숙종37) 25세 천연두를 앓다 회생하여 얼굴에 곰보 흔적이 남아있었다 하니, 숙종의 사랑을 받기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자식이 없던 인원왕후는 34세에 과부가 되어 경종이 즉위하면서 왕대비가 되고, 4년 뒤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38세에 대왕대비가 되었다.



아비 김주신소론이었지만 그녀는 남편인 숙종사후에 노론으로 당색을 바꿨다. 경종을 내세우던 [소론]과 연잉군(영조)을 지지하는 [노론]은 대립하며 경종의 후사가 없음을 빌미로 노론측은 연잉군을 왕세제(王世第)로 세우려했다. 


이에 맞서 [소론]은 양자를 들여 세자를 책봉하려 했다. 이때 인원왕후가 나서 "경종의 춘추가 아직 젊고 만일 변고가 있더라도 선왕의 혈통인 연잉군이 있는데 누가 망령된 짓으로 선왕의 혈통을 막으려 한단 말인가?"라며 대신들을 꾸짖기도 했다.  


  

하지만 소론들은 끊임없이 연잉군을 제거하려 했는데 이때 연잉군보다 일곱 살 위였던 인원왕후는 [노론편]에 서서 연잉군을 지지해 왕세제 책봉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연잉군이 역모의 주범으로 용의선상에 오르자 몸소 보호하였다. 


인원왕후는 1721년(경종1)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시키고 양자로 입적했으며 훗날 노론의 4대신과 함께 연잉군이 왕위에 오르도록 지원했던 결정적인 인물이었다. 영조 33년 창덕궁 영모당에서 71세로 운명해 숙종 능의 서편에 동원이강 형식으로 동떨어져 한적히 잠들어 있다. 


인원왕후 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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