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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Dec 05. 2015

조선왕과의 만남(46)

숙종원비 능, 장희빈 묘, 최숙빈 묘


제19대 숙종 원비 인경왕후 1661 ~ 1680 (20세) 



▐  익릉(翼陵) 사적 제 198호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산30-1 (서오릉 내)


[서오릉]은 세조의 장자 의경세자가 요절하자 그의 명복을 기리기 위해 세조가 직접 답사를 통해 택지한 명당이다. 55만평의 광활한 서오릉 경내에 의경세자경릉(추존왕 덕종)이 조성된 후 그의 아우 예종창릉에 안장되면서 세조의 가족능이 이뤄지는 듯했던 능원(陵園)이었다. 


하지만 서오릉은 조성된 지 220여년이 지나 숙종과 그의 4명에 여인들이 이곳을 점령하여 마치 그들만의 혼령이 넘나드는 아방궁(阿房宮)을 이룬 듯하다. [서오릉]에는 숙종의 원비인 ①인경왕후 익릉이 있고 숙종과 2명의 계비인 인현왕후와 ③인원왕후명릉이 있으며 희빈 장씨대빈묘가 함께 있다.    


서오릉 숙종관련 능

뿐만 아니라 숙빈 최씨(동이)가 인근의 파주시 광탄면 소령원에 잠들어 있으니, 숙종은 사후에도 가히 여복이 넘치는 군왕인 듯싶다. 인경왕후는 광산(光山) 김씨인 광성부원군 김만기의 여식이며, 숙종의 첫 번째 왕비다. 1670년(현종11) 10세 세자빈에 간택돼 의동(義洞) 별궁에 들어가 이듬해 세자빈에 책봉되었다. 


1674년 숙종이 즉위하면서 14세에 왕비가 되었으나 2년 뒤 16세에 정식으로 왕비책명을 받았다. 인경왕후의 아비 김만기는 노론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노론은 서인에서 분열된 파당(派黨)으로 [서인]의 거두였던 김장생이 김만기의 고조부였다.



김만기는 1673년(현종14) 효종영릉(寧陵)을 천장할 때 산릉도감의 당상관을 맡았다. 이듬해 병조판서에 머물며 2차 예송(禮訟) 때 상소를 올려 자의대비(인조 계비)의 [대공설]을 주장했던 인물이다. 숙종이 즉위하자 장인이던 김만기는 광성부원군과 총융사를 겸하며 병권을 장악해 [남인]들의 질시를 받기도 했다.


인경왕후가 사망한 1680년 경신환국 때는 훈련대장으로 남인과 맞서며 공을 세우기도 했다. 숙종 조에 구운몽(九雲夢)으로 한글소설의 선구자가 된 서포 김만중 또한 인경왕후 숙부였다. 그는 인현왕후가 폐출되는 것을 반대하다 [남인]의 탄핵을 받고 남해도에 유배 중, 흐려진 임금의 마음을 참회시키고자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를 쓰기도 했다.

 

     

[사씨남정기]는 명나라 때 간계한 첩 교씨가 정실 사씨를 내쫓고 간부(姦夫)와 밀통해 못된 짓을 하다 처형된다는 내용으로 사씨 부인과 요첩 교씨를 인현왕후장희빈에 빗대 쓴 소설이다. 당시 김만중은 궁녀를 통해 이 책을 왕이 읽도록 유인하여 숙종이 잘못을 깨닫고 인현왕후를 복위하게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김만중은 대단한 효자여서 모친을 위해 쓴 구운몽 외 어머니 일대기를 썼는데 "정경부인 윤씨행장"에는 인경왕후가 어린 시절 할머니인 윤씨에 의해 반듯하게 키워져 세자빈에 간택됐을 때 의젓하게 행동했다고 기록돼 있다. 


김만중 謝氏南征記

인경왕후는 장씨가 후궁에 오를 때 이미 세상에 없었기에 숙종의 여인 중 유독 장희빈과 맞닥뜨리지 않았던 여인이다. 두 명의 공주를 낳았으나 일찍 죽었으며 1680년(숙종6) 자신도 천연두로 20세에 요절했다. 


이때 숙종은 천연두를 겪지 않았음으로 약방도제조 영의정 김수항의 건의에 따라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했다. 왕비는 음력 10월에 천연두 증세를 앓기 시작했는데 발병 8일 만에 경덕궁 회상전(會祥殿)에서 운명하였다. 


익릉은 [서오릉]의 능역 중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참도가 계단식으로 놓여있어 숙종의 명릉보다 더욱 장엄하게 느껴진다. 이는 숙종이 왕릉의 능제를 단순화하고 석물을 간소하게 하라는 명이 내려지기 전에 조성되어 임진왜란 이후의 양식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인경왕후 익릉


제19대 숙종 후궁 희빈 장씨 1659 ~ 1701 (43세) 


▐  대빈묘(大嬪墓) 사적 제 198호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산30-1 (서오릉 내)

        

희빈 장씨는 조선 역사상 유일하게 궁녀의 신분으로 왕비자리까지 올랐던 입지전적의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장희빈 묘는 원래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문형리에 있었으나 1970년 도시화 개발로 현재의 위치로 이장했다. 


[서오릉 경내] 경릉에서 밑으로 내려와 좌측으로 조금 돌아가는 후미진 곳에 작은 규모로 묘가 조성돼 있다. 묘의 위치나 석물 등 전체적인 조형이 일반 사대부 묘보다도 초라한 것을 보며 희빈 장씨에 대한 후대 역사가들의 평가를 짐작할 수 있다. 


숙종명릉 옆으로 옮겨올 때 지관의 의견을 따라 장희빈의 기를 누르기 위해 봉분 뒤에 바위를 두었으나, 후일 그 바위를 뚫고 나무가 자라자 세인들은 장희빈의 기(氣)가 너무 세서 그렇다는 후일담을 남기고 있다. 실제 봉분 뒤에 두 쪽의 바위가 있고 그 사이에 나무가 자라고 있다.


봉분 뒤 두 쪽 바위

희빈 장씨는 조선왕 숙종의 빈으로 경종의 생모이다. 본명은 옥정으로 전하며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아비는 사역원 부공사 장형이며, 어미가 여종출신 이었기에 천인신분이었다. 일찍 죽은 장씨의 아비대신 장씨 일가를 거두었던 종백부 장현은 조선역관들의 수장이자 장안에 최고의 재력가로 당시 국중거부라 불리었다. 


그는 인조 17년 역과에 장원으로 합격해 한학교수를 거쳐 종1품 숭록대부를 지냈다. 청나라 행(行)에 인조의 왕자들을 수행해 각별한 친분을 쌓았으며 효종의 절대적인 신임과 비호를 받아 왕실의 종친과 끈끈한 교우지간을 유지했다. 장씨의 입궐 시기는 불분명한데 아비 장형의 신도비문 기록에 따르면 희빈 장씨가 어린나이에 입궁하여 성장한 것으로 돼있다. 


illustrator / 김현정

장옥정이 궁에 들어가게 된 배경에는 자신의 몸을 의탁하던 종백부 장현이 경신환국에 휘말려 유배형에 처해지게 되자 남인들의 제의를 받아 궁녀로 입궐시켰다는 설과 인조계비인 자의대비(장렬왕후)의 사촌동생 조사석의 주선으로 입궁했다는 설이 있다. 


장씨는 자의대비를 모시던 중 1680년 겨울 인경왕후와 사별한 20세의 숙종과 인연을 맺고 왕의 정인(情人)이 되었다. 숙종실록에는 장씨숙종의 총애를 받기 시작한 무렵부터 왕을 모시게 됐다는 기록이 있으나 같은 해 숙종의 모후 명성왕후 김씨의 미움을 받고 궁에서 쫓겨났었다. 


이때 자의대비숭선군(인조의 다섯째 아들)에게 친필서찰을 보내 장씨숭선군 부인의 보호를 받으며 지낼 수 있었다. 명성왕후가 사망한 뒤 3년 상이 끝나자 자의대비숙종인현왕후를 설득해 1686년 장씨를 재 입궐시켰다. 


illustrator / 장순환

이때 비밀리에 창경궁에 처소를 짓는 등 장씨에 대한 숙종의 총애가 지나치자 서인과 인현왕후는 크게 반발했다. 그해 장씨를 다시 내치기 위해  [서인]의 영수 김수항 종손녀인 영빈 김씨를 후궁으로 간택했지만 빼어난 미모와 영악함으로 숙종의 사랑을 독차지한 장씨는 오히려 종4품 숙원으로 봉해졌다. 


[숙종실록]에는 인현왕후가 장씨의 교만함을 훈계하려고 매질을 명하고, 시어머니 명성왕후가 꿈에 나타나 계시하기를 "장씨가 짐승의 화신이며 불순한 남인무리의 사주를 받고 입궁했으니 쫓아내야 한다." 했다고 주장했던 기록이 실려 있다. 또한 인현왕후는 장씨의 팔자에 아들이 없다는 주장을 하여 훗날 그녀 자신이 폐출되는 원인이 되었다. 



당시 남인세력이었던 장희빈과 서인을 대표하는 인현왕후는 정치적 적대관계에 있었다. 1688년 소의에 오른 장옥정은 그해 숙종의 첫아들 이윤(경종)을 낳았다. 하지만 [서인]들은 숙종의 득남 소식에 하례조차 드리지 않았고, 산후조리를 위해 입궁하던 장씨의 생모 윤씨의 가마를 가로채 불태워 버렸다. 


이에 숙종이 해당 관원에게 벌을 주려하자 [서인]들이 반발함으로써 크게 진노한 왕은 경신환국 때 쫓겨났던 남인 일부를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숙종이 서둘러 아들을 원자(元子)로 책봉하려하자 서인들은 좀 더 후일을 기다리자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1689년(숙종15년) 정월 숙종은 아들 윤(昀)을 원자로 책봉하고 장소의를 희빈으로 봉했다. 또한 장씨의 생부 장형을 영의정으로 추증하고 조부, 증조부, 외조부까지 추증하였으며 김석주에 의해 가산을 빼앗기고 유배당했던 장씨의 종백부 장현을 복직시켜 희빈 장씨의 입지를 세워주었다. 


그러나 [서인]의 반발이 심해지고 급기야 송시열인현왕후의 나이가 많지 않음을 주장하며 원자를 취소할 것을 상소하자, 숙종과 남인들은 이미 명호(名號)가 결정돼 종묘에 정식으로 고한 것을 번복하라는 것은 왕실을 능멸하는 행위라고 반박하였다. 결국 서인들은 모두 참혹한 형벌을 받고 파직되었으며 [서인]의 거두 송시열은 제주도 유배 중 정읍에서 사사되었다. 



그해 4월 23일 자의대비의 복상기간 중에 인현왕후의 생일하례를 생략하라는 숙종의 하명이 무시되고 대신들의 하례와 선물이 전달되자, 숙종은 분개하여 민씨를 서궁에 유폐했다. 또한 인현왕후 민씨의 품성과 행실이 성종 조의 폐비 윤씨보다 나쁘고 희대의 악후(惡后)로 손꼽히는 문정왕후에 견줄만하다며 노골적인 비난을 퍼붓고 폐출할 것을 선고하였다. 


당시 80여명의 서인들이 반대상소를 올렸고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남인들도 반대하였지만, 숙종은 인현왕후를 폐하여 사가로 폐출하였다. 5월 13일, 희빈 장씨는 왕비에 올랐으나 자의대비의 복상기간 탓에 1690년에서야 정식으로 왕후에 책봉되고 원자 또한 3세의 나이에 세자에 올랐다(己巳換局). 



무과에 급제해 종6품 포도부장을 지내던 오라비 장희재는 장씨가 중전이 되면서 훈련원부장을 거쳐 금군별장과 총융사 및 한성판윤에 오르게 되었다. 기사환국 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숙종은 폐비사건을 비유한 김만중의 "사씨남정기"를 읽고 폐비사건을 후회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694년(숙종20) [서인]의 김춘택 등이 폐비의 복위 운동을 꾀하다가 고발되었다. 이때 [남인]의 영수 우의정 민암 등이 이 기회에 반대당인 [서인]을 완전히 제거하려고 수십 명을 하옥하고 범위를 넓혀 옥사를 일으켰다. 


때마침 숙종은 폐비에 대한 반성으로 옥을 다스리던 민암을 파직해 사사하는 등 남인들을 유배하고 소론 남구만 등을 등용해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시켰다. 이러한 갑술환국으로 이미 죽은 송시열김수항 등이 복권(復權)되고 [소론세력]이 다시 들어섰다. 



남인이 몰락할 때 장희재가 장씨에게 보낸 서찰에 폐비 민씨에 관련된 내용이 논란이 돼 여러 중신들이 장희재를 죽이자고 했으나, 세자에게 화가 미칠까 염려해 용서하게 되었다. 결국 장희재는 제주도로 유배되고 장희빈은 창경궁 취선당(就善堂)으로 옮겨졌다. 


1701년(숙종27) 8월 인현왕후가 사망하자 왕비와 함께 노론에 있던 숙빈 최씨희빈이 평소 인현왕후를 저주했던 사실을 왕에게 고했다. 취선당 서쪽에 신당을 설치해 민씨가 죽기를 기원했던 것이 사실로 드러나자 마침내 희빈에게 사약이 내려지고 장희재는 처형됐으며 취선당의 궁인과 무녀 등도 참형에 처해졌다.



이 사건은 무술이나 방술 따위로 남을 저주했다하여 "무고(巫蠱)의 옥"이라 기록하고 있으며 이때 왕세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생모인 장희빈을 사사해서는 안 된다고 극력 반대했던 영의정 최석정이 유배되면서 소론이 몰락하게 되고 다시 노론이 득세하게 돠었다. 


장희빈은 1701년 음력 10월 10일 사사됐는데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는 "숙종실록"과 "승정원일기"에는 숙종의 명으로 자진한 것으로 기록돼 있지만 "연려실기술"과 "인현왕후전"에는 사사된 것으로 씌어져 있어, 장씨가 사사되었는지 자진(盡)했는지는 현재도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당시 조정안팎에서는 장씨의 죽음과 무고사건 조사과정 및 판결에 의구심과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인현왕후전"이나 "연려실기술"에는 장씨의 어미가 첩이었고 오라버니 장희재가 누이 덕에 출세한 한량출신이었으며 그녀가 죽을 때 경종의 하초(下焦)를 잡아당겨 불구로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모두 영조 조에 편찬된 내용이다. 


하지만 당시 서녀(庶女)는 양반의 피를 이었다고 해도 궁녀가 될 수 없었고 장씨숙종의 총애를 입기 전부터 장희재는 이미 포도부장에 재직하고 있었다. 또한 경종이 성 불구자였다는 주장은 청나라가 연잉군을 왕세제로 인정하지 않고 청 사신을 보내자, 노론이 펼친 주장이었다. 


희빈 장씨 묘

이후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야사를 통해 장씨가 경종을 성불구로 만들었다고 조작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내용을 민간에 기정사실화해 영조가 경종의 뒤를 이은 것이 정당하며 경종을 독살할 이유는 없었음을 전파했을 것이다. 당시 경종 비는 임신조차 불확실한 고작 16세의 나이였다. 


청국 황제도 경종에게 서찰을 보내 이후에라도 양자를 들여 뒤를 잇게 하라고 할 정도로 연잉군과 [노론일파]를 의심하고 있었던 점에서 기록된 주장들이 희빈 장씨경종을 비하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악성 소문임을 엿볼 수 있다. 


조선왕조의 오백 년사에 용모가 매우 아름다웠다고 유일하게 기록되어 있는 희빈 장씨는 궁녀에서 후궁을 거쳐 왕비까지 오르며 수많은 흉문과 일화를 남긴 채 향년 4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경종은 부왕인 숙종이 후궁출신은 왕비가 될 수 없다는 어명을 내렸기에 즉위 후에도 어미 장씨를 왕비로 추존치 못하고 결국 "옥산부 대빈"으로 추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사당(祠堂)은 대빈궁으로 종로구 궁정동의 칠궁 경내에 있다. 칠궁은 7명의 후궁 신주 등을 모셔놓은 사당으로  왕의 생모이면서 대비가 되지 못한 일곱 후궁의 사당이 모여 있는 곳이다. 


궁정동(宮井洞) 지명은 영조 생모의 사당이 세워진 [육상궁동]과 따뜻한 우물이 있었던 [온정동]을 합쳐 1946년 궁정동으로 불리게 됐다. 칠궁 중 [대빈궁]은 유독 왕후만이 사용하는 원형기둥 양식을 보이는데, 이는 장희빈이 한때나마 국모의 위(位)에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제19대 숙종 후궁 숙빈 최씨 1670 ~ 1718 (49세) 


▐  소령원(昭寧園) 사적 제 358호 /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 267

 

소령원은 비공개 묘원으로 파주 광탄면 고령산기슭 중단부에 동향을 바라보고 있고 원역(園域)의 좌우가 비좁고 봉분이 위치한 언덕이 길게 뻗어있어 비좁고 답답한 형세를 이루고 있다. 능이 아닌 묘의 시설을 갖추고 있지만 봉분 뒷면에는 곡장이 둘러져있고 병풍석과 난간석 없이 석마와 석양을 각각 두필씩 배치하였다. 


봉분정면에는 혼유석, 비석, 장명등이 세워져 있고 좌우에 문인석과 석마가 배열돼 있다. 조정신료들의 반대로 소령묘를 왕비릉으로 격상시킬 수 없었던 영조는 [소령원]의 사초지(莎草地) 앞에 왕릉에서만 볼 수 있는 정자각을 세웠다. 소령원영조의 효심과 비애가 뒤엉켜 있는 묘원(墓園)이었다.

 

소령원(昭寧園)

숙빈 최씨숙종의 후궁이자 영조의 생모이다.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최효원의 여식이다. 최효원은 애초 선략장군행(宣略將軍行) 충무위 부사과였으나 영조 10년 관례에 따라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최씨는 7세에 궁중의 청소와 설거지 등 허드렛일을 하는 무수리로 궁에 입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1681년(숙종7) 인현왕후숙종의 계비로 간택되었을 때 12세 나이로 왕비를 따라 궁에 들어왔다는 설도 있다. 야사에 의하면 최씨의 고향은 전라북도 태인(泰仁)으로 1728년(영조4) 이인좌의 난 때 태인현감 박필현이 가담하여 태인현이 폐현될 위기에 처했으나 영조가 어머니의 고향이라 하여 관대히 넘어갔다고 한다.     



또한 숙빈 최씨의 이름은 "복순" 이며 어려서 가족이 전염병으로 모두 죽고 고아가 되었는데, 나주목사 일행을 만나 목사의 부인이자 인현왕후의 친척인 민씨가 거두었고 훗날 인현왕후가 궁에 들어갈 때 따라 들어가 궁인이 되었다고 전한다. 


인현왕후를 섬기며 궁 생활을 했으나 1689년 인현왕후가 폐출되고 희빈 장씨가 왕비에 오르자 최씨는 밤마다 인현왕후가 복위되기를 기도하고 있었는데 이때 중전 장씨에게 염증을 느끼고 있던 숙종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고 1693년(숙종19) 24살에 숙원이 돼 아들 영수(永壽)를 낳았다. 



그러나 영수는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나고 이듬해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되며 그 해 연잉군(영조)을 낳고 숙의가 되었다. 조선왕실에서 무수리 출신이 후궁이 된 사례는 최씨가 유일하다. 이어 아들 하나를 더 낳았으나 태어난 지 사흘 만에 죽었으며, 1699년(숙종25) 정1품 숙빈에 봉해졌다.


최씨는 인품이 온화하고 신중했으며 겸손함을 갖춰 예의와 배려가 깊었다고 한다. 최씨는 첫 번째 계비인 인현왕후 민씨와 친분이 두터웠으며 희빈 장씨가 중전일 때는 그녀에게 모진 박해를 받다가 인현왕후가 [갑술환국]으로 복위되자 평상을 되찾았다. 



1701년 인현왕후가 죽은 뒤에는 더욱 지극히 숙종을 섬겼으나 숙종이 장희빈의 전례가 재발될 것을 우려해 궁녀에서 왕비로 오르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었기 때문에 최씨는 인현왕후 사후에도 왕비가 되지 못했다. 1704년 연잉군이 11세에 혼례를 치룬 후 궐 밖으로 나가 살 때 숙종은 7년이 지난 후에 비로소 최씨가 왕자와 함께 살도록 했다. 


[숙종실록]에 최숙빈에 대한 기록은 장희빈의 무고(巫蠱)를 왕에게 고했다는 것과 연잉군의 혼례 전에 숙종이 별도로 마련해준 이현궁(梨峴宮) 사가에 나가 살고 있었다는 기록정도만 남아있다. 더욱이 숙빈 최씨가 이현궁으로 물러난 후 그녀가 죽을 때까지 숙종이 따로 궁으로 불러들이거나 이현궁으로 행차를 했다는 기록이 없다. 


숙빈 최씨와 연잉군

때문에 숙종은 최씨가 당시 조정의 실세인 서인을 등에 업고 아들을 내세워 권력을 휘두르는 일이 없도록 경계를 했거나 희빈 장씨를 죽음에 이르도록 고변했던 최씨 또한 마땅치 않게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추측해본다. 최씨는 1716년(숙종42) 갑작스럽게 병색이 나타나 병세가 깊어가면서 효성 지극한 아들의 등극을 보지 못하고 숙종44년 4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최씨는 후궁신분에 따라 왕비의 능을 갖추지 못하고 묘에 묻혔다. 그녀의 아들 연잉군이 왕세제를 거쳐 1724년 왕에 오르자 궁정동 [칠궁 경내]에 생모 최씨의 사당을 지어 "숙빈 묘"라 칭하고 이곳을 자주 찾아가 참배하였다 한다. 또한 1753년(영조29) 최씨의 사당을 [궁]으로 무덤은 [원]으로 격상하여 사당의 궁호를 육상궁(毓祥宮)이라 하고 묘호는 소령원(昭寧園)으로 칭하였다.


소령원 장명등 안에서 본 정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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