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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Dec 07. 2015

조선왕과의 만남(47)

경종릉


제20대 경종 1688~1724 (37세) / 재위 1720.06 (33세)~1724.08 (37세) 4년 2개월


Source: Chang sun hwan/ illustrator


▐  의릉(懿陵) 사적 제 204호 / 서울시 성북구 석관동 산1-5


경종이 잠들어 있는 의릉은 북한산 줄기에서 이어지는 천장산(현 高凰山)자락에 둘러싸여 있으며 풍수적으로 뛰어난 길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의릉경종에 살아생전의 삶만큼이나 죽어서도 애닮은 능이다. 1962년 당시 최고의 권력기관이었던 [중앙정보부]가 능역주변에 들어서면서 34년간 철저하게 가려져있던 능이다.

죽어서조차 왕실 가족능역으로 가지 못하고 현세에는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던 정보부에 둘러싸여 제대로 숨 한번 크게 쉬지 못했다. 비공개 능이었던 의릉은 [국가정보원]이 헌인릉 옆으로 이전하면서 1996년 5월 일반인에게 다시 공개됐다. 


위, 아래로 배치한 의릉

당시 중앙정보부는 정자각과 홍살문 사이에 일본식 정원과 연못을 만드는 등 왕릉을 제멋대로 훼손했는데 국가정보원 이전 후 잔디가 복원돼 현재의 [의릉 능원]을 되찾게 되었다. 의릉은 경종과 계비인 선의왕후 능을 앞뒤로 배치한 상하이봉릉(上下異封陵)으로 조성했는데, 이는 여주 효종의 영릉(寧陵)과 같은 형식이다. 


일반적으로 쌍릉은 좌우로 나란히 놓이지만 이렇게 상하로 능을 배치한 것은 좌우로 능을 조성할 경우 능침이 정혈(定穴)을 벗어난다는 풍수설을 따랐기 때문이다. 위쪽에 있는 경종 능침에만 곡장이 둘러져 있고 왕비는 담장을 두르지 않았으며 [왕릉]과 [왕비릉]의 모든 석물은 각기 배치했다. 


두 능에는 봉분주위에 병풍석을 세우지 않고 십이간지 문자가 새겨진 12칸의 난간석을 둘렀다. 능 석물양식은 부왕인 숙종의 뜻에 따라 규모가 작고 간소하게 제작돼 문무인석이 사람 키 정도로 작게 세워져 있으며, 특이한 것은 호석(虎石)의 꼬리가 위로 치켜져 올라가있어 능을 지키려는 수호석물의 의지가 엿보이는 듯하다.


꼬리가 올라붙은 호석

경종숙종의 맏아들로 태어나 두 달 만에 원자로 봉해졌다. 숙종은 3명의 왕비가 있었지만 이들에게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를 둘러싸고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이 시기상조론을 주장하다가 사사되고 인현왕후가 폐출되었다. 1690년 3살 때에 세자로 책봉되면서 생모인 장희빈이 왕비가 되었다. 


하지만 1694년 갑술환국으로 폐위됐던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장씨는 다시 빈(嬪)으로 강등되면서 숙종은 세자를 인현왕후의 양자로 입적시켰다. 때문에 경종은 생모가 사사되었을 때 인현왕후의 상중(喪中)이어서 호적상의 상주로서 중전의 빈소를 지키고 있어야 했다. 


당시 조정의 분위기는 친모 장씨가 의지했던 [남인]이 무너지고 그나마 세자를 보호하려 했던 [소론]마저 숙종이 대거 숙청해버림으로써, 연잉군을 지지하는 노론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경종은 14세 때 어미 장씨의 죽음을 목도한 정신적 충격으로 위 질환을 앓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세자시절 내내 무기력한 허약증을 보이며 말도 없고 소심한 모습을 보였다. 후일 경종이 즉위하면서 자신을 배척하고 연잉군을 지지했던 노론의 숙청을 단행한 것을 보면 그의 소심함은 성격 탓도 있겠지만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트집을 잡히지 않기 위한 처세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경종은 세자시절에 6살 아래인 연잉군으로 인해 끊임없이 불안한 지위에서 생활하였다. 더욱이 장희빈이 죽은 뒤로 숙종은 틈만 나면 세자에게 "누구의 자식인가?"라고 꾸짖으며 노론들과 폐세자 문제를 상의하기까지 했다. 


1717년 쇠약해진 숙종은 세자의 다병무자(多病無子)를 우려해 [노론] 이이명을 불러 연잉군을 후사로 정하기로 하고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했다. 이를 간파한 [소론측]은 세자의 흠을 잡으려는 처사라며 극렬히 반대했는데, 이때부터 세자를 지지하는 [소론]과 연잉군을 지지하는 [노론]간의 권력투쟁이 극도로 심해져 갔다.



이러한 혼란스런 정황(政況)에서 1720년 숙종이 승하하면서 소론의 지지를 받아 33세에 어렵사리 왕위에 올랐다. 경종이 즉위함에 따라 숙종의 세 번째 왕비인 인원왕후가 왕대비가 되었는데 그녀는 연잉군을 양자로 입적해 왕세제의 자리에 앉히고 후일 영조를 왕위에 올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경종은 숙종이 병환으로 시달리던 3년간 부왕을 대신해 대리청정을 하면서 국정을 돌본 경험이 있었기에 정사를 처리하는데 서툴지 않았으며 결코 무능력하거나 녹록한 왕이 아니었다. 그는 [신임사화]를 통해 숙종마저 실패했던 노론 4대신을 숙청하는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경종은 즉위하면서 [소론]과 [남인]을 등용하며 노론을 압박하였다. 하지만 이듬해인 1721년 경종의 질환이 심해져 정무수행이 힘들어지자 왕권이 추락하면서 권신의 전횡과 당파 간 음모가 더욱 심해졌다. 당시 [노론]과 [소론]은 경종의 등극을 계기로 기존의 유교시비에서 왕통에 관한 충역(忠逆)시비로 논지가 바뀌었다.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축출된 뒤 [서인]은 장희빈의 처벌문제를 놓고 대립했는데, 노론은 장희빈을 사사할 것을 주장한 반면 소론은 세자를 위해 장희빈을 살리자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1721년(신축년)과 1722년(임인년) 두 해에 걸쳐 커다란 옥사가 발생했는데, 두 해에 일어난 옥사를 신임사화라 부른다. 


경종 즉위 1년 만에 [노론]은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하는 일을 주도하면서 동시에 세제의 대리청정을 강행하려 했다. 왕의 병약함을 이유로 왕위계승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면서 노론인 영의정 김창집과 좌의정 이건명 등이 이복동생인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하자는 주장을 펼쳤다.


이에 경종은 자신의 지지기반이던 [소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비 인원왕후의 동의를 얻어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토록 하였다. 이때 노론은 한 발 더 나아가 민감한 사안이던 세제(世弟)의 대리청정을 주청하자 경종은 이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소론은 연잉군을 세제로 세우려 함은 왕위를 뺏으려는 속셈이라 하며 왕의 보호를 명분으로 대리청정의 부당함을 극렬히 반대해 다시 친정을 재개하게 되었다. 그해 12월 [소론]의 강경파였던 김일경이 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한 노론 4대신(김창집, 이건명, 이이명, 조태채)을 임금에 대한 불충이라며 탄핵하여 유배 보내고 정국을 주도함으로써 [소론정권]을 수립하였다. 


이어 1722년 노론일파가 왕을 시해하고자 이이명을 추대할 음모를 꾸몄다고 목호룡이 고변해 대대적인 신임사화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8개월간에 걸쳐 국문이 진행되며 그 결과 노론 4대신이 사사됐으며 수백 명에 이르는 노론들이 화를 입었다. 


소론 김일경은 풍수지관이던 목호룡을 사주해 사건을 일으켰는데 이때 [노론]은 이 사건이 조작극이라고 항변했지만 경종은 이를 묵살해 버렸다. 이로써 경종 재위 중 정권을 전횡하던 소론들은 노론의 지지를 받던 연잉군 마저 없앨 궁리를 했다. 



목숨이 위태로운 처지에 놓인 연잉군은 왕대비에게 자신을 지켜 달라 부탁하기에 이르렀다. 김일경이 경종의 양자를 세우려하자, 인원왕후는 "연잉군은 왕위를 이을 하나밖에 없는 왕족이니 그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말라"하며 연잉군을 비호해 주었다. 이런 혼란 속에 경종은 등극한지 4년 만에 이승을 등졌다. 


일설에 의하면 경종은 연잉군에 의해 독살됐다는 설이 있지만 당시의 의료방법이 비과학적이기에 의혹으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경종은 말년 건강이 악화되면서 자리에 눕게 되었는데 이때 연잉군게장연시를 진상(進上)하여 왕이 이것을 먹고 죽었다 한다. 


게와 감은 궁합이 상극인 음식으로 같이 먹으면 소화불량과 식중독 위험성이 높은데 이를 함께 먹은 후 탈이 나 죽었다는 민간 처방의 해석이다. 더욱이 젊어서부터 위 질환을 앓고 있던 경종이었기에 일부 설득력이 있어 보이며 미묘한 시기에 경종이 갑자기 죽음으로서 당시 사람들은 연잉군을 의심했던 것 같다. 



1728년(영조4) 일어난 "이인좌의 난"은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 숙빈 최씨가 사통(私通)해 얻은 자식이며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는 이유를 내세워 반란을 일으켰던 사건이었다. 부왕에게 자신의 어미를 고변해 죽음에 이르게 한 장본인이 숙빈 최씨다 보니 경종의 눈에는 연잉군이 곱게 보이지 않았을지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기록에는 경종과 영조가 형제지간의 깊은 우애를 나눈 것으로 나타나 있다. [경종실록]에는 "왕께서 하교하기를 나는 10여 년 동안 기이한 병이 있거니와 정유년에 대리청정의 명을 받든 후 내 몸을 돌볼 겨를이 없었는데 등극하고부터는 증세가 더욱이 깊어졌다. 


세제는 장년이고 영명하므로 청정하게하면 국사를 맡길 데가 있어서 내가 안심하고 조섭할 수 있을 것이니 이제부터 모든 국사를 세제를 시켜 재단하게 하라. 하셨는데, 이날 밤에 불충한 최석항이 승지 및 홍문관과 함께 배석하여 성명을 거두셨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경종과 연잉군

또한 경종은 연잉군에게 하늘의 이치를 정치에 직접 접목하게 하라는 의미로 표신(標信: 궁궐출입문표)에 신하 및 백성들과 끊임없이 소통하라는 통(通)자를 새겨 넣어주었다는 실록기록이 있다. 


1778년 정조가 할아비인 영조의 행적을 기록한 영종대왕행록(英宗大王行錄)에는 "영조는 경종의 병환 중 약을 달이고 음식시중을 들며 옷에서 허리띠를 풀지 않고 4년을 하루같이 했는데 좌우에서 그의 게으른 기색을 보지 못했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왕세제에 책봉돼 궁궐로 돌아온 연잉군이 병약한 경종의 병수발에 정성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영조는 생전의 경종에 대해 "윤리로는 형제이고 의리로는 부자간 사이여서 참으로 지극한 슬픔이 끝이 없다"고 평하며 경종의 먼 친척들 일에까지 챙기며 친히 별제를 지냈다 한다. 하지만 당시 연잉군은 경종이 와병하던 시기에 적극적으로 어의들을 통제하는 자리에 있다 보니 독살의 주모자로 의심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다. 



이러한 행보로 인해 영조는 즉위 초부터 그 정통성을 심각하게 의심받게 되고 심지어는 군란을 일으킨 [소론] 강경파 이인좌에게 경종의 살해범으로 지목되어 국문 중 "나으리"라는 소리까지 들어야 했다. 이복형제였던 경종과 영조의 속내를 정확히 들여다볼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역사는 쟁취한 자에 의해 씌어 진다는 말이 실감나 보인다. 


경종 조에는 서양의 수총기(水銃器)를 모방해 소화기가 제작되었고 서양의 문신종(問辰鐘: 자명종)이 만들어졌으며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밝히는 남구만의 "약천집(藥泉集)"이 간행되기도 했다. 경종은 세자시절부터 신변상으로나 정치상으로 온갖 수난과 곤욕을 겪으며 재위기간 4년을 병석에서 지내야만 했던 왕이었다. 


[노론]과 [소론]의 당쟁으로 조정이 편할 날이 없던 와중에서 특별한 업적도 남기지 못한 채 37살의 나이로 자식하나 없이 박복한 삶을 마감했다. 그는 왕대비인 인원왕후와의 마지막 독대를 마친 직후에 영원히 눈을 감았다. 아버지의 사약을 받고 죽은 어미에 대한 애증과 자식을 갖지 못했던 한 남자로서의 좌절감이 심화되면서, 동생과는 정적(政敵)이 될 수밖에 없었던 가엾은 왕의 넋을 달래본다.    


상하이봉 의릉



제20대 경종 계비 선의왕후 1705 ~ 1730 (26세) 


의릉쌍릉을 이루어 함께 묻힌 선의왕후 어씨는 영돈녕부사 어유구의 여식으로 본관은 함종(咸從)이다. 1718년 (숙종44) 첫 번째 세자빈 심씨가 열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해 9월 14세에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가례를 올리고 1720년 경종의 즉위로 왕비가 되었다. 


그녀는 매사에 조심스럽고 온유한 성품을 지녔으나 연잉군의 세제책봉에는 적극 반대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슬하에 소생이 없던 까닭에 소론의 강경파였던 김일경과 함께 종실인 소현세자의 후손인 밀풍군의 아들 이관석을 양자로 들여 지아비인 경종의 후사로 삼으려 하여 조정에 파란이 일기도 했다. 


선의왕후와 인원왕대비

하지만 이 계획은 대비 인원왕후(왕대비)에 의해 저지되고 말았다. 1724년(경종4) 경종이 죽자 결혼 6년 만에 홀로되어 20세의 왕대비가 되었다. 1726년(영조2) 경순왕대비의 존호를 받았으나 26세에 이승을 등져 상하이봉(上下異封)으로 남편 곁에 잠들게 되었다.




제20대 경종 원비 단의왕후 1686~1718 (33세)


▐  혜릉(惠陵) 사적 제 193호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2-1 (동구릉 내) 


[동구릉] 경내에 서쪽능선에 위치한 현종숭릉 좌측 산줄기에 경종의 원비인 심씨 능이 있다. 혜릉은 당초 세자빈 묘로 조영된 묘역인지라 능역이 전반적으로 좁고 낮은 언덕에 능이 조성돼있어 아담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심씨는 세자빈의 신분으로 소생 없이 생을 마감했기 때문에 경종과 같이 묻히지 못하고 홀로 단릉에 잠들어 있다. 


이후 1720년 경종이 즉위하면서 비로소 단의왕후로 추존되고 혜릉이란 능호를 받아 왕비릉의 상설(喪設)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1950년 한국전쟁으로 홍살문과 정자각이 불타 없어지고 주춧돌만 남은 상태였으나 1995년 새로이 복원해 왕릉의 면모를 다시금 갖추게 되었다.  


동구릉 혜릉

단의왕후 심씨의 본관은 청송(靑松)으로 청은부원군 심호의 여식이다. 1696년(숙종22) 11살의 나이에 숙종과 장희빈의 아들인 세자 의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경종과 가례를 올렸다. 별궁에 들어와 지낼 때도 단정하게 앉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에 대한 기록은 단지 "세자빈 심씨는 품성이 어질고 어릴 때부터 총명했으며 덕을 갖춰 양전(兩殿: 인현, 인원왕후)과 병약한 세자를 섬기는 데 손색이 없었다."는 간단한 기록뿐이다. 심씨는 타고난 조신함으로 왕실 어른에 사랑을 받았다지만 당시 복위된 인현왕후와 폐위된 희빈 장씨와 관계 속에서 상당한 갈등과 마음고생을 겪었을 것으로 미뤄 짐작해본다. 


   

그 때문인지 심씨경종이 즉위하기 2년 전인 1718년(숙종44) 2월 급작스레 병을 얻어 세자빈의 신분으로 소생 없이 세상을 떠났다. 이에 숙종은 그녀의 죽음을 비통해하며 시호를 내려, 단의(端懿) 빈으로 삼았다. 경종이 즉위하던 1720년 혜릉이란 능호를 받고 왕비로 추봉되었다. 


별다른 기록이나 사연 없이 세자빈으로 조용히 살다가 생을 마감한 단의왕후혜릉은 그녀 생전의 품성만큼이나 단아한 모습으로 역사 속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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