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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Dec 08. 2015

조선왕과의 만남(48)

영조릉_01


제21대 영조 1694~1776 (83세) / 재위 1724.08 (31세)~1776.03 (83세) 51년 7개월


Source: Chang sun hwan/ illustrator


▐  원릉(元陵) 사적 제 193호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2-1 (동구릉 내) 


조선왕조 27대 역대 왕 중 가장 장수했던 영조는 무려 52년의 긴 세월동안을 왕위에 머물러 있었다. 또한 영조경종을 포함한 숙종 3부자는 102년간 조선을 통치해 518년 조선역사의 5분에 1을 차지하고 있다. 그중 경종의 치세가 4년에 불과하니, 가히 조선의 한 세기(世紀)를 [영조]와 [숙종]이 통치한 셈이고 이들이 대왕의 반열(列)에 속해있는 이유 중 하나이다. 


영조는 재위기간이 길다보니 왕실의 산릉원을 8차례 조성하거나 천장하면서 산릉제도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영조는 원비 정성왕후가 66세에 승하하자, 그녀의 능을 [서오릉] 경내 부왕 숙종이 잠들어있는 명릉 인근에 조영하여 능호를 홍릉(弘陵)이라 했다. 


이때 그 곁을 훗날 자신의 자리로 정해 쌍릉으로 묻히기를 바라며 수릉지(壽陵地)를 비워놓았다. 하지만 영조는 정작 자신이 원하던 홍릉의 원비 곁에 잠들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 묻히게 되었다. 영조가 승하하자 손자인 정조는 [동구릉] 건원릉 서쪽 두 번째 산줄기에 영조를 안장하고 할아버지의 수복(壽福)을 기려 능호를 원릉(元陵)으로 정한 것이다. 



이곳은 당초 효종의 능인 영릉이 조영됐던 곳으로 현종 14년 능지가 불길하며 석물에 틈이 벌어져 빗물이 스며들 염려가 있다고 남인들이 주장해 봉분을 열고 여주로 천장한 파묘(破墓) 터였다. 당시 봉분을 열어보니 우려했던 것과 달리 별 문제없이 깨끗하여 이로 인한 당쟁이 발생되며 영릉도감의 책임자까지 파직됐던 사건이 일어났던 곳이다. 


더욱이 이곳은 경종의 능지로 추천됐던 곳이며 이때 영조가 파묘 자리임을 들어 추천을 물리쳤던 터이기도 하다. 영조의 장례위원장이던 정조가 할아버지의 수릉지로 정해놓은 명당을 제쳐두고, 파묘라고 꺼리던 자리에 능지를 택하자 신하들의 반대가 잇달았다. 하지만 정조는 이를 애써 외면하고는 이미 기와 혈이 소멸된 파묘 터에 영조의 능을 조성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노쇠해진 영조가 세손에게 자신의 계비인 정순왕후의 목숨만은 부디 보전해 달라는 유언을 남겨, 그 유훈을 따라 왕대비 정순왕후를 의식한 정조가 선왕을 원비 곁인 홍릉에 묻지 않았다는 설이 있으나, 사도세자 죽음에 대한 정조의 복수심에서 비롯됐다는 설이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쌍릉인 영조 원릉

결국 영조는 원릉에 묻히고 계비 정순왕후는 29년이 지난 1805년(순조5)에 영조 곁에 나란히 잠들게 되었다. 원릉은 반세기가 넘는 세월을 왕위에 머물렀던 조선 최장수 왕의 능이지만 비교적 능역이 아담하고 단출하게 조영된 능이다. 


왠지 다소 초라해 보이기도 하지만 평생 검약과 절제를 덕목으로 삼았던 그의 살아생전 모습과 달라 보이지 않는 능이다. 원릉은 병풍석을 세우지 않고  하나로 둘러진 난간석 안에 쌍릉을 조성했다. 


[조선왕릉]은 일반적으로 상중하 3계단으로 나뉘어 [중계]에 문인석을 [하계]에 무인석을 세웠는데, 영조의 능은 중계와 하계의 구분을 두지 않고 문무인석을 같은 단(段)에 배치한 점이 눈길을 끈다. 또한 무석인이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기에 위풍당당한 모습보다는 어쩐지 유약한 장수(將帥)의 자태를 보이고 있는 듯 느껴진다.


     

영조숙종의 2남 서자로 태어나 1699년(숙종25) 6세에 연잉군에 봉해지고 1721년(경종1) 왕세제로 책봉됐다. 그의 생모 숙빈 최씨는 궁중 하인 중에서도 직급이 가장 낮은 무수리 출신이었다. 어미의 천한신분 때문에 그는 왕자이면서도 이복형이던 세자와는 전혀 다르게 주위의 은근한 멸시를 받으며 오랜 동안 궁궐외곽의 초라한 집에서 어렵게 자랐다. 


영조의 어미에 대한 효심을 전하는 계압만록(鷄鴨漫錄)의 한 야사를 소개해 본다. 숙종보다 앞서 세상을 떠난 최씨는 빈(嬪)의 예우조차 받지 못하고 양주 땅 어느 산기슭에 묻혔는데 그 묘가 매우 초라했다. 때문에 이를 마음 아파했던 영조는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오랜 노력 끝에 어미 묘를 소령원(昭寧園)으로 승격시켰다.

 

   

어느 날 영조가 궁을 나와 잠행하던 중 향나무를 팔고 있는 나무꾼에게 어디서 나무를 캐왔느냐 물으니, 나라님의 모후를 모신 [소령릉]이 있는 양주 고령산에서 캐왔노라 했다. 무식한 나무꾼은 능(陵)과 원(園)을 구별하지 못해 능이라고 말했는데, 항상 어미 묘를 능으로 바꾸고 싶어 했던 영조소령릉이란 소리에 감격하게 되었다. 


하여 향나무를 비싼 값에 사주고 나무꾼을 소령원 능참봉에 제수했다 전한다. 영조가 연잉군에 머물던 18세기 초 조선조정은 중종 이후 2백여 년간 지속돼온 [붕당정치]가 절정에 이르러 당파대립이 극에 달해있었다. 과열된 당쟁은 목숨까지 내걸며 살아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적을 제거하는데 혈안이 돼있었다. 



숙종 조의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몰락하고 정권을 잡은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며 이들의 치열한 권력다툼은 경종이 왕위를 잇는 과정에서 피바람을 몰고 왔다. 숙종사후 왕권을 쥐락펴락 했던 신하들로 인해 [노론]의 지지를 받고 있던 연잉군과 [소론]이 지원하던 세자는 왕위를 둘러싼 당쟁에 휘말려야 했다. 


이때 세자장희빈의 자식이라는 부담감을 안고 있었고, 연잉군은 어미가 천인출신이라는 출생에 대한 열등감을 품고 있었다. 장희빈을 제거한 [노론]은 후일에 발생할지 모를 세자의 보복을 차단하고자, 세자의 병약함을 내세워 숙종으로부터 왕세자의 뒤를 연잉군이 잇도록 하라는 명을 받아냈다.  


이러한 노론의 술책은 왕권을 뒤흔드는 목숨 건 모험이었다. 그들로 인해 왕세제에 오르게 된 연잉군은 허약한 경종이 요절해 자신이 왕위를 넘겨받거나 경종의 왕위를 넘본 역당으로 몰려 죽어야하는 운명적 기로에 서있었다. 경종이 재위 4년간 [소론]을 지원하는 동안에 [노론]은 왕세제를 통한 대리청정을 실행해 정권의 주도권을 되찾으려 했다. 


illustrator / 김유종

경종 즉위 이듬해 노론은 왕의 다병무자(多病無子)를 이유로 후계자를 정할 것을 주청하면서 경종을 잇는 숙종혈통은 연잉군 밖에 없음을 들어 숙종계비 인원왕후에게 도움을 청해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켰다. 하지만 이때 연잉군은 소를 올려 왕세제의 자리를 극구 사양하였다. 

    

연잉군이 세제에 봉해지자 [노론]은 또다시 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청했다. 왕을 무시하는 건의에 마지못해 청정을 수락했지만 심기가 편치 않던 경종은 [소론]의 "시기상조론"과 성균관 및 팔도유생들의 반발을 명분으로 친정을 재개했다. 


이때 대대적인 신임사화로 [노론]이 실각하면서 경종시해 모역에 왕세제가 가담했다는 음모로 신변에 위협을 받은 연잉군은 계모인 인원왕후에게 달려가 세제자리를 물리쳐 달라고 호소했다. 평소 연잉군을 감쌌던 대비는 정황을 간파해  왕세제를 보호하라는 한글교서를 내려 상황을 무마시켰다. 



이러한 때 경종이 갑자기 후사없이 요절하게 되면서 오랜 세월 앞날을 기약할 수 없었던 연잉군은 마침내 왕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천신만고 끝에 왕위에 오른 영조는 요절한 경종죽음에 대한 의혹으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는 소문과 그의 어미가 [노론]의 지원을 받은 천한 무수리 신분으로 노론의 한 세력가에게서 태어난 자식이라는 풍문까지 퍼졌다. 출생에 대한 열등감을 지니고 있던 영조로서는 참기 힘든 낭설이었다.


군왕을 음해하는 이러한 요인들이 지나친 당쟁에서 비롯됐다고 판단한 영조는 붕당(朋黨) 갈등을 해소하는 것을 국정과제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영조는 그가 왕세제로 책봉된 이후부터 더욱 격화된 노소론의 당론으로 수차례 당쟁에 휘말려 생명의 위협까지 느꼈기 때문에 정국안정을 위한 탕평책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1725년(영조1) 영조는 신임옥사를 일으킨 [소론] 과격파를 숙청하고 노론을 다시 정계로 불러들이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영조가 의도하였던 [탕평정국]과는 달리 [노론] 내 강경세력인 준론자(峻論者)들이 [소론]에 대한 공격을 일삼자 1727년 노소론의 강경파를 축출하는 정미환국을 단행하였다. 


이 무렵 그는 국왕이 정국을 주도해야 요순시대처럼 탕평의 치세가 실현될 수 있다는 의지를 강력히 주창하며 이를 따르는 탕평론자를 등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조는 왕위 정통성 확보와 탕평정국을 조급히 서두르다가 정계에서 밀려난 [소론] 과격세력과 갑술환국 이후 소외된 [남인] 반발세력이 연합해 영조의 왕위를 부정했던 이인좌(李麟佐)의 난(1728년)을 맞게 되었다.


소현세자의 증손인 밀풍군을 추대한 반란은 그 규모가 20만 명에 이르렀다. 영조가 이인좌를 친국했으나 그는 왕이 숙종의 친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왕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다가 참살됐다.  이인좌의 난으로 마음에 상처를 입은 영조는 이후 열등감이 더해져 훗날 자신의 자식까지 죽이는 비극을 낳게 되었다. 


illustrator / 우승우

이를 계기로 영조는 노소론 중 [탕평책]을 따르는 온건파들을 고르게 등용하며, 당파 간 서로 견제하도록 하여 정권을 독점할 수 없게 했다. 초기에는 재능에 관계없이 탕평론자를 중심으로 노소론만 등용했으나 이후 탕평책이 안정되자 당색을 초월해 노론, 소론, 남인, 소북 등 4색을 고르게 등용하며 [탕평정국]의 기반을 확대시켜 나갔다. 


숙종이 [환국정치]를 통해 왕권을 강화해가며 조선후기를 열었던 반면, 영조는 요순시대의 치세를 목표로 [탕평정치] 통해 조선사회를 개혁했던 계몽군주이다. 그는 성균관에 탕평비를 세워 자신의 의지를 알리고 붕당갈등의 중심인 이조전랑 통청법(通淸法)을 철폐하였다. 이조전랑은 삼사(三司)의 언관들이 인사권을 장악하며 집권세력을 강화하는 도구로 악용돼 왔기에 혁파가 불가피했다. 


요순(堯舜)의 임금을 이상형으로 한 탕평론의 왕도정치를 펼치려면 왕이 신하들보다 우위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영조는 이를 실현하기 위해 높은 학식의 신하들과 강론하는 경연을 재위 52년간 무려 3,400회 이상을 열었다. 월평균 5.5회에 달하는 경연 횟수는 조선조 최다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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