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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Dec 08. 2015

조선왕과의 만남(49)

영조릉_02


제21대 영조 1694~1776 (83세) / 재위 1724.08 (31세)~1776.03 (83세) 51년 7개월



▐ 원릉(元陵) 사적 제 193호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2-1 (동구릉 내)


영조는 스스로 소식하고 검약한 생활을 통해 절제의 모범을 보이며 [탕평정치]를 통해 백성을 위한 실질적인 개혁조치를 단행했다. 병역을 대신해 징수했던 포목 2필을 1필로 감하는 균역법(均役法)을 시행해 민생의 고통을 줄였으며 얼굴에 글자를 새기는 잔인한 형벌을 금지했다.


양반들이 백성을 형벌하는 것을 금하고 사형집행 시 3심 제도를 거치도록 했으며 신문고(申聞鼓)를 부활해 백성들의 억울함을 알리도록 했다. 화려하지만 조선여인들의 머리를 무겁게 짓누르던 가채(가발)를 없애고 금주령을 내리는 등 사치와 낭비적 요소의 폐습을 교정하였다.



경국대전 이후 변화된 세상에 맞도록 법을 재정비해 "속대전"을 편찬하고 농업을 장려해 민생안정에 힘썼다. 1763년에는 일본통신사 조엄이 고구마를 들여와 훗날 흉년 때 식량으로 대신할 수 있게 되었다. 화차와 조총제작을 위해 주전(鑄錢) 제조를 중단시키고 서자도 관리로 등용토록 기반을 마련했다.


또한 붕당의 근원지인 서원건립을 금하고 동색금혼패를 대문에 걸어 같은 당파의 혼인을 막았다. [영조 3대 치적]을 탕평, 균역, 준천(竣川)으로 꼽는데, 홍수 때마다 범람하여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었던 청계천변에 돌을 쌓는 대대적인 준천공사를 시행하였다.


illustrator / 정윤정

또한 세자의 대리청정(영조25년) 이후 50여회 잠행(潛行)을 통해 백성들의 사정을 살피기도 했다. 그밖에 역사상의 충신들에 대한 추존사업을 시행하면서 지난날 절의를 지키다 죽어간 많은 이들의 충절비(忠節碑)를 세웠다.


영조는 새로운 학풍을 진작시키며 실학의 기틀을 마련해 인쇄술이 개량되고 많은 책이 보급돼 사회, 경제, 문화의 부흥기가 이뤄졌다. 실용정책의 영향으로 조선은 이익을 선봉으로 실학이 자리 잡게 되어 정조 조에는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루게 되었다.


하지만 [탕평책]을 내세운 정국(政局)은 노론이 우위를 점하는 정치상황이 지속되면서 일부 소외된 [소론]의 반발을 불러오는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경종의 죽음과 영조의 출생에 대한 괴소문은 항상 [소론]의 은밀한 조롱거리였다.


영조 잠행(潛行)

1755년(영조31) 나라를 비난하는 글이 나주객사에 붙여진 벽서사건이 발생했다. 영조즉위 초 나주로 유배된 소론 윤지가 국문과정에서 영조의 왕세제 때 일을 또다시 발설하였다. 이때 노론영조의 노여움을 이용해 [소론]을 정계에서 완전히 제거하려했다.


당시 대리청정을 하고 있던 사도세자가 벽서사건 해결에 나섰는데 그는 부왕의 분노와 [노론]의 간계를 간파하지 못하고 소론에 대해 온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이를 계기로 정치적 열세에 있던 [소론]과 [남인] 등이 세자를 옹호하고 나섬으로써 영조세자 간에 미묘한 긴장감이 형성되었다.


세자가 왕위를 이을 경우 자신들에게 미칠 불이익을 우려하던 [노론]은 66세이던 영조김한구의 딸을 계비로 맞아들이면서 입지가 강화되었다. 이러한 때 세자는 칼을 휘둘러 궁녀를 죽이고 궁을 빠져나가 제멋대로 돌아다니며, 여승을 궁에 끌어들이는 행동으로 [노론]에게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



[노론]의 사주를 받은 정순왕후세자의 난행을 영조에게 과대 포장해 부자사이를 이간질하여 개인적 편애가 심했던 영조세자를 더욱 멀리하며 갈등이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노론]은 세자를 폐위코자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올렸는데, 이를 보고 분노한 영조세자에게 자결을 명했으나 세자가 이에 응하지 않자 폐서인으로 강등시키고 뒤주에 가두어 굶어 죽게 했다. [붕당정쟁]이 불러온 왕실의 참혹한 비극이었다.


이후 영조는 뒤늦게 후회하며 세자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고 정조를 왕세손으로 삼아 자신의 생존 시 정치를 맡기고 [노론]을 견제토록 하여 왕위를 물려줌으로써 자식을 죽인 회한을 조금이나마 덜고자 했다.  



영조는 왕세제 때부터 당론에 휘말려 온갖 고초를 겪었으나 자신의 출생신분과 정통성에 대한 열등감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과감한 개혁조치와 탕평책을 단행해 과열된 붕당을 완화해가며 각 방면에 걸쳐 18세기 조선후기의 중흥을 이끌었던 영주(英主)였다.


그는 민생을 위한 정치를 뿌리내린 세종이후의 성군(聖君)이었으며 그가 마련한 민생안정을 바탕으로 손자 정조는 더욱 큰 선정을 베풀 수 있었다. 하지만 생모 최씨에 대한 안타까움을 평생 간직하며 세자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붕당발호의 과도한 경계심으로 세자를 죽인 아픔을 삭여야 했다.


영조는 절름발이 탕평책(蕩平策)으로 그의 생전에 당쟁의 혼란을 완전히 잠재우지 못한 채, 83세를 일기로 경희궁 집경당(集慶堂)에서 숨을 거두었다.   

 

 


21대 영조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 1745 ~ 1805 (61세)

 

정순왕후는 김씨는 오흥부원군 김한구의 여식으로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김한구는 조선후기의 무신으로 효종 조에 소현세자 부인인 강빈의 신원을 주청하다 장살당한 김홍욱의 현손이다. 1757년(영조33) 영조 정비 정성왕후 66세로 세상을 떠나고 두해가 지난 1759년 영조는 부왕인 숙종의 유지에 따라 후궁들 중에서 새 왕비를 뽑지 않고 15세의 김씨를 왕비로 간택해 창경궁에서 가례를 올렸다.


당시 영조의 나이는 66세로 김씨는 무려 51살의 나이가 벌어지는 연상인 남편을 맞았다. 그녀는 자식뻘인 사도세자 내외보다도 무려 10살이나 어렸을 뿐만 아니라, 노령(老齡)의 남편 때문인지 자식을 갖지 못한 채 손자뻘인 정조보다 장수하는 삶을 살았다.


왕비간택

김씨의 왕비간택 당시 영조가 친히 나와 좌정해 있었는데 김한구의 여식만이 홀로 지정된 자리를 피하여 앉았다. 이에 영조가 “어찌하여 피해 앉는가?”라고 묻자, 김씨가 대답하길 “아비의 존함이 여기 있는데 어찌 감히 그 자리에 넙죽 앉겠습니까?”라고 답하여 영조가 내심 기특히 여겼다.


이어 영조가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은 무엇인고?"라고 물었는데 모든 규수들이 산 또는 물이 깊다고 답한 반면 유독 김씨는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 답하였다. 또한 "세상에서 어떤 꽃이 가장 아름다운가?"라는 질문에 "꽃의 자태와 향기는 빼어나지 않지 않지만 백성들에게 따뜻한 실을 전해주는 목화가 가장 아름다운 꽃"이라 답변해 영조를 감탄시켰다고 전한다.


이후 왕비로 책봉되고 나서 상궁이 옷의 치수를 재기위해 잠시 돌아서달라고 하자 단호한 어조로 "네가 돌아서면 되지 않느냐!"라며 상궁을 꾸짖었다 하니, 어린나이에도 범상치 않았던 정순왕후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계비 김씨의 친정은 [노론세력]의 가문이었으나 소론에 기울어져있던 사도세자는 [노론]에 비판적이었다.


illustrator / 박상훈

더욱이 김씨는 자신보다 연상이었던 세자내외와 빚어지는 갈등 때문에 계비와 그의 친정은 1762년(영조38) 영조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영조 조에는 정순왕후의 친정인 [경주 김씨] 측과 세자빈 혜경궁 홍씨의 친정인 [풍산 홍씨] 측의 양대 척신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노론의 세력이었다.


당시 영조는 탕평책을 펼쳤지만 정권의 실세는 [노론]이 차지하고 있었으며 세자의 장인인 홍봉한 또한 [노론]의 중심인물이었다. 때문에  정순왕후의 친정뿐만 아니라 홍봉한은 사위인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하도록 주도하였다.


하지만 사도세자가 죽은 후 영조 말년에는 왕세손(정조)을 놓고 정순왕후 오라버니 김귀주가 이끄는 세력과 세자 장인인 홍봉한 세력이 맞서 대립하게 되면서, 이후 [노론]은 정순왕후 친정을 중심으로 하는 벽파(僻派)와 정조 조에 시파(時派)가 대립하는 정치적 배경이 되기도 했다.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홍인한정후겸 등 선왕의 척신일파 숙청을 단행했다. 영조 말년 세손의 외조부인 홍봉한을 비롯한 [풍산 홍씨]들은 시파에 가담해 세손을 보호했으나, 홍인한(홍봉한 아우)은 정후겸벽파와 결탁해 세손을 모함하며 정조 즉위를 반대했다.


한편 사도세자를 모함하고 세손의 외조부인 홍봉한을 탄핵했던 정순왕후 오라버니 김귀주는 자신의 과거허물을 덮고 권력에 빌붙기 위해 정조가 즉위하자 한성판윤을 제수 받고 홍인한정후겸의 탄핵에 앞장섰다. 하지만 정조홍인한정후겸에 대한 처벌이 마무리되자 김귀주혜경궁에게 문안하지 않았다는 핑계로 흑산도로 귀양 보냈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의 속성이 덧없어 보이는 대목이다. 정순왕후와 7살 아래 손자였던 정조 사이는 늘 편치 않은 긴장관계가 유지됐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양측이 갈등을 벌였다는 실록의 기록은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정조정순왕후를 극진히 대했다고 전해진다.



정조가 편찬한 명의록(明義錄)에는 세손이 위기에 처했을 때 내전에서 세손을 도와 신변을 보호함으로서 정조 즉위에 정순왕후의 공이 있었다는 내용이 수록돼 있는데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 당시 정조는 [벽파]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정순왕후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정순왕후에게 정성을 다함으로써 자신이 효자라는 사실을 부각시켜 생부인 사도세자 복권에 대한 명분을 쌓고자 했을 것으로 미뤄 짐작해본다. 정순왕후는 1800년 [순조]가 11세로 즉위하자 대왕대비로서 4년간에 수렴청정을 하면서 스스로 여군(女君)과 여주(女主)로 자칭하며 과감하게 국정을 주도하기도 했다.


조정신하들로 부터 개인별 충성서약을 받는 등 실질적으로 국왕의 모든 권한과 권위를 행사하였다. 그녀는 정조장례가 끝나자마자 자신과 대립되는 [소론] 시파인물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이때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과 정조의 친모 혜경궁 홍씨의 오라비인 홍낙임 등이 처형되었다.


illustrator / 이철원

이듬해는 정조가 묵인했던 천주교를 강경하게 탄압해 1801년 신유박해를 일으켰다. 당시 탄압정책은 정조의 천주교 묵인론을 정치적으로 부정하여 [남인]과 [시파]를 제거하고자 벌린 숙청이었다. 이로 인해 정약용 등의 [남인]과 [시파]를 축출하고 국왕친위대인 장용영(壯勇營)을 혁파해 정조가 다져놓은 정치 틀을 부정하였다.


이러한 정책들은 그녀의 친정인물인 김관주김용주 등 [노론] 벽파가 뒷받침했다. 1802년 정조의 유지에 따라 [소론] 시파김조순의 여식을 순조비로 책봉하였으나, 1803년 12월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순조의 친정이 선포되자 정세가 바뀌게 되었다.


정조의 친위세력이었던 김조순에 의해 대부분의 [벽파]와 정순왕후의 친정세력이 숙청되고 자신의 영향력도 약화되기에 이르렀다. 그녀는 허망한 말년을 보내며 수렴청정을 거둔지 1년 뒤인 1805년(순조5) 1월 창덕궁 경복전(景福殿)에서 61세의 일기를 마감하여 원릉 영조 곁에 무심(無心)히 잠들게 되었다.



영조재위 시 산릉지 조성 및 천장사례

   

 ① 경종 의릉(1724년)

 ② 경종비 의릉(1730년)

 ③ 추존 진종(효장세자) 영릉(1728년)

 ④ 진종비 효순왕후 영릉(1751년)

 ⑤ 숙빈 최씨 소령원(1753년)

 ⑥ 영조원비 정성왕후 홍릉(1757년)

 ⑦ 숙종계비 인원왕후 명릉(1757년)

 ⑧ 추존 장조(사도세자) 융릉(176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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