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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Dec 08. 2015

조선왕과의 만남(50)

영조원비 능


제21대 영조 원비 정성왕후 1692~1757(66세)  



▐  홍릉(弘陵) 사적 제 198호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산30-1 (서오릉 내)


홍릉영조가 [서오릉] 경내에 명혈을 택해 원비 정성왕후의 능지를 정하면서 장차 함께 묻히고자 왕비 능의 오른쪽에 자리를 비워둔 우허제(右虛制)로 조영한 능이다. 능의 석물도 훗날 자신의 능과 함께 조성될 것을 미리 염두에 두고 쌍릉을 전제하에 배치하여 능역이 웅장해 보인다. 


하지만 정조홍릉자리를 버려두고 [동구릉] 내 원릉으로 영조의 능지를 정함으로서, 현재 능의 좌측 공간은 비어있고 석물만이 [쌍릉 양식]으로 남아 있다. 석물은 숙종명릉 형식을 따라 기본적으로 간소하게 조성돼 있고, 무인석 갑옷의 등과 투구에는 물고기 비늘무늬가 화려하게 조각돼 있지만 홍릉은 역사 속에서 세인의 관심을 끌지 못한 채 외로운 능으로 남아있는 듯하다.


좌측이 비어있는 외로운 홍릉

정성왕후는 첫날밤 영조에게 소박을 맞은 왕비이다. 평생을 열등감에 시달렸던 지아비를 만나 험난한 세월을 보내며 남편을 도와 서른 살이 넘어 가까스로 왕비가 되었지만, 그나마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죽는 날까지 고독하게 살다간 여인이었다. 


정성왕후 서씨는 달성부원군 서종제의 여식으로 본관은 달성(達城)이다. 한양 가회동에서 태어난 서씨의 가문에는 조선전기 유명한 학자였던 서거정 등이 있지만 혼례를 치룰 시기에 그녀의 친정은 그다지 내세울만한 명문가가 아니었다. 아비인 서종제는 소과에 합격했으나 대과에는 합격하지 못하고 진사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곤궁한 삶을 살았다.


정성왕후는 1704년(숙종30) 13세에 연잉군과 가례를 올려 군부인이 되었고 1721년 왕위에 오른 경종이 병약하고 후사가 없자 연잉군이 왕세제로 책봉되면서 세제 빈에 봉해졌다. 1724년 경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31세의 연잉군이 왕위에 오르자 서씨는 33세에 비로소 왕비가 되었다. 



정성왕후는 어질고 너그러운 성품을 가졌다고 전해지는데 당쟁으로 인해 어지러운 정국 속에서도 숙종과 경종 부인인 왕대비를 극진히 모시며 내명부를 지켰으나 소생은 얻지 못했다. 서씨가 자식이 없을 수밖에 없었던 소박에 관한 한중록(恨中錄)의 야사를 전해본다. 


서씨와 혼인한 연잉군은 첫날밤을 보내던 중, 수줍어하는 새색시가 마냥 귀여웠다. 연잉군은 서씨의 손을 잡고 손등을 어루만지며 "어찌 부인의 손이 이리도 부드럽단 말이오? 마치 두부를 만지는 것처럼 연하고 부드럽구려."라며 칭찬을 하자, 군부인 서씨가 "여태 살아오면서 고생이라는 것을 모르는 손이옵니다. 그저 부끄럽사옵니다."라고 했다. 


이는 평범한 답변이었지만 연잉군은 그 말이 마치 무수리 출신이던 어미와 자신을 비아냥대는 것 같이 느껴져 그 날 이후로 서씨를 찾지 않았다고 전한다. 영조는 어미에 대한 열등감으로 인해 한미(寒微)한 집안의 아내에게 조차 주눅이 들게 된 것이다.



이후 정성왕후는 소생을 갖지 못하고 대신 사도세자를 친자식처럼 아끼게 되었다. 연잉군은 세제로 책봉이 되자 당시 처소(處所) 내인이던 이씨(훗날 정빈)를 총애하며 그녀의 처소를 찾는 일이 많았는데, 정빈 이씨는 첫아들 효장세자를 잃고 나서 마음에 병을 얻어 앓다 죽었다. 


이후로는 침방 내인인 이씨(훗날 영빈)에게 총애를 쏟았는데 영빈 이씨는 영조나이 마흔둘에 사도세자를 낳았다. 당시 영빈 이씨영조의 성향에 따라 [노론 편]에 있었고, 시어머니 인원왕후(숙종 계비)는 궁궐에 들어올 때 [소론]이었다가 숙종연잉군 때문에 노론으로 당색을 바꾸어 그녀의 친정과 등을 지고 살았다.

    

하지만 정성왕후는 친정이 [소론]이었던 것도 있지만 그녀가 아끼던 사도세자소론을 지지하고 있었기에 지아비 영조와 당색을 달리하고 있었다. 이러한 엇갈린 당론으로 인해 서씨 영조에게 더욱 미움을 받았던 것 같다. 



그 때문인지 정성왕후는 33년간 왕비에 머물렀지만 영조가 그녀의 처소를 찾았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가 지은 [한중록]에 실린 일화에는 정성왕후가 병을 얻어 몹시 위중했는데, 영조는 병세를 듣고도 찾지 않다가 그녀가 거의 죽게 되자 비로소 병소를 찾았다고 전한다.  

   

당시 영조는 죽어가는 왕비를 돌보기보다 통곡하며 슬퍼하던 사도세자의 옷매무새가 흐트러진 것을 꾸짖었다. 이런 와중에 왕비가 운명하게 되었는데 영조는 여전히 태연한 채 내인들에게 아내를 처음만나 지내왔던 일들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바람에 장례절차가 지연되고 있었다. 


때마침 영조 사위인 정치달의 부고(訃告)가 전해졌는데 그는 영조가 가장 좋아했던 화완옹주의 남편이었다. [영조실록]에는 영조가 국상 중에 부마(駙馬)에게 거동하려 했는데 승지와 대사간이 말리자, 왕은 그들을 해임시키고는 궐을 빠져나와 화완옹주의 초상집에 갔다가 자정 넘어 돌아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illustrator / 박시백

살아생전 지아비의 사랑과 관심에서 멀어져있던 정성왕후는 이렇듯 죽어서도 외로움이 지속되었다. 정성왕후가 홀로 머물렀던 대조전(大造殿)은 왕가의 자손(龍子)을 낳는 곳이라 하여 지붕위에 용마루가 없다. [한중록]에 의하면 평소 대조전에 머물던 정성왕후는 몸이 편찮거나 위중할 때면 거처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는 종묘와 사직을 잇는 왕손을 생산하는 고귀한 처소에 병마(病魔)가 머물지 못하도록 각별히 배려했음을 깨닫게 한다. 그녀는 오랜 궁 생활을 하면서 권력을 휘두르지 않았고 다만 사도세자영조 사이의 갈등을 풀기 위해 노심초사하던 중 병을 얻어 창덕궁 관리각(觀理閣)에서 6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영조는 [서오릉] 경내 부왕인 숙종이 잠들어 있는 능 인근에 홍릉을 조영하고 그 옆에 자신의 자리를 비워 놓았다. 영조정성왕후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열등감으로 더욱 모범적인 군주를 지향했던 영조로서는 조강지처에 대한 부부간의 예를 보이고 후일 그곳에 자신이 묻히는 것이 당연한 처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정성왕후

그 때문인지 영조는 그렇게 냉대했던 정성왕후를 보내며 그녀의 행장(行狀)에 "왕궁생활 43년 동안 항상 웃는 얼굴로 맞아주고 양전(兩殿: 숙종과 경종비)을 극진히 모시고, 게으른 빛이 없었으며 숙빈 최씨(영조 생모)의 신주를 모신 육상궁 제전에 기울였던 정성을 고맙게 여겨 기록한다."라고 적고 있다. 


정성왕후를 떠나보내며 한 평생을 함께 했던 부인에 대한 영조의 엇갈리는 애증을 엿볼 수 있다. 후일 정조영조의 뜻을 어기고 [서오릉] 정반대 방향인 [동구릉] 경내 원릉을 정해 영조를 묻음으로써 홍릉정성왕후 홀로 잠들게 되었으며 조선왕릉 중에서 유일하게 "옆자리가 비워진 능"으로 남게 되었다.

    

화려해 보이는 왕실 여인들의 이면에는 항시 무관심과 고독이 가려진 그늘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후궁도 아닌 왕실 내명부 최고의 정비(正妃)였음에도 불구하고 살아서나 죽어서나 외로움을 면치 못하게 된 정성왕후홍릉은 덩그러니 비어져있는 자리로 인해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그 처연함이 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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