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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Dec 12. 2015

조선왕과의 만남(51)

정조릉_01


제22대 정조 1752~1800 (49세) / 재위 1776.03 (25세)~1800.06 (49세) 24년 3개월

 

Source: Chang sun hwan/ illustrator


▐ 건릉(健陵) 사적 제206호 /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 1-1 (융건릉 내)


1800년 49세의 정조가 승하하자, 그의 유지에 따라 생부의 능인 현륭원(훗날 융릉) 동쪽 두 번째 언덕에 안장되었다. 그로부터 21년 뒤인 1821년(순조21) 효의왕후가 별세하여 그녀를 건릉부근에 안장하려고 하자, 순조 비(순원왕후)의 아비인 김조순이 당시의 건릉부근이 풍수상 좋지 않아 길지를 찾아 천장해야한다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명당을 물색한 결과 [현륭원] 서쪽의 산줄기를 찾아내 그해 정조 능을 현륭원 서쪽언덕으로 천장하고 효의왕후와 합장하면서 오늘날 건릉을 이루게 되었다. 당초 효의왕후의 능호는 정릉(靜陵)으로 정했으나 이때 건릉으로 합장함에 따라 별도의 능호를 쓰지 않게 되었다.

     

사진작가 / 임성환

건릉(健陵) 정조효의왕후합장능이지만 혼유석(魂遊石)이 하나다.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을 두른 차이를 제외하고는 융릉(隆陵) 상설과 흡사하다. 실제 사람 크기에 가까운 문석인과 무석인의 조각은 매우 사실적이며 무석인은 금관조복을 입고 있다. 


19세기 왕릉 석물제도의 새로운 모범을 보여주고 있는 융릉건릉정조 조의 융성했던 기운과 양식을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능원아래 정자각과 비각은 6.25 전쟁당시 무너졌던 것을 1992년에 다시 세웠다. 정자각 남쪽 참도(參道)가 시작되는 곳에 홍살문이 세워져 있으며 융릉과 마찬가지로 정자각까지 참도 좌우에 박석(薄石)을 깔아놓은 것이 다른 왕릉에 비해 특이하다.


참도(參道)와 박석(薄石)

정조사도세자혜빈 홍씨의 둘째 아들로 영조 28년 창경궁에서 태어났다. 친형이던 의소세손이 3살 나이로 죽게 되자 정조는 뒤늦은 8살이 돼서야 비로소 세손에 책봉됐는데 이때까지의 그에 삶은 순탄하였다. 그러나 1762년(영조38) 11세로 가례를 올렸던 그 해 아비인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게 되는 과정에서 할아버지 영조에게 아비를 살려달라고 애원했던 어린 세손은 이후 왕위에 오르기까지 고단한 여정을 거쳤다. 


사도세자가 죄인으로 죽게 됨으로서 정조는 죄인의 아들이라는 연좌제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으며 이 때문에 그가 왕위를 계승한다는 것은 큰 허물이 될 수밖에 없었기에, 1764년 영조는 왕위계승의 정당한 명분을 갖추기 위해 영조의 장자인 효장세자의 양아들로 삼아 왕통을 잇게 하였다. 

    

illustrator / 정윤정

이로 인해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이끌었던 노론은 세손이 즉위할 경우 자신들이 제거될 것을 두려워하여 세손을 끌어내릴 음모를 실행하기 시작했다. 세손의 왕위계승을 반대하던 정후겸 등의 [노론세력]은 그를 비방하거나 해치려고 했고, 심지어는 세손의 거처에 자객이 침입해 염탐하는 일들이 발생했다. 


[노론]이 세손을 차기 왕으로 인정하지 않을 것을 걱정했던 영조는 1775년 11월 좌의정 홍인한과의 독대를 통해 이를 해결하기 위해 대리청정을 거론했다. 이때 홍인한은 "동궁은 노론 소론을 알 필요 없고 이조판서와 병조판서에 누가 제격인지 알 필요가 없으며 조정의 일은 더욱 알 필요가 없다"는 삼불필지설(三不必知說)을 내세워 대리청정을 반대했으니, 그가 왕위에 오르는 과정은 참으로 힘든 여정이 아닐 수 없었다. 


    

더욱이 홍인한은 세손이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 조사하고 다닌다는 허위소문을 퍼트렸다. 이에 세손의 측근인 홍국영소론을 사주해 홍인한을 성토하고 세손의 대리청정을 지지하는 상소를 올리게 했다. 이로써 영조홍인한을 삭탈관직하고 1775년(영조51) 12월 세손의 대리청정을 명했다. 홍인한은 이에 항의상소를 올리고 세손을 고립시키기 위해 측근인 홍국영을 살해하는 계획까지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대리청정 후 3개월 남짓한 이듬해 3월에 영조가 승하하자, 대보(大寶: 옥새)를 세손에게 전하라는 유명에 따라 경희궁 숭정문(崇政門)에서 25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정조는 당파싸움의 희생양이 된 아비를 추상하고 홍국영을 통해 왕권을 위협하는 정적 노론 벽파에 대한 숙청을 단행했다.  

  

 

정조는 재위 24년간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영조탕평책을 계승 발전시키고 신분에 관계없이 능력과 학식위주로 인재를 등용하며 많은 개혁정책을 추진하였다. 당시 정조는 며느리(순조 비)를 시파 안동김씨 일문(一門)에서 간택했는데, 이는 후일 정조일대의 최대 실수가 되고 말았다. 


정조 때 소외됐던 벽파순조 초기에 다시 정국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는데, 이를 견제하던 순조 비안동김씨 외척세력이 세도정치를 주도하게 되면서 조선은 왕권을 잃고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정조는 즉위당일 조회에서 자신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 밝히고 종통(宗統)은 비록 영조의 명에 의해 효장세자를 잇게 되었으나, 사도세자 또한 국왕의 생부로서 숭배해야 할 것임을 천명하였다.  



동시에 장헌이란 존호(尊號)를 부여해 장헌세자로 일컬었고 생모인 혜빈을 혜경궁으로 올려 그녀에 대한 조정문안 순위를 왕대비 아래에 두고 중전보다는 앞서게 하였다. 또한 경기도 양주군(휘경동) 배봉산에 있던 아비의 묘를 영우원(永祐園)으로 올리고, 이어 영조의 유지를 받들어 양(養)부모를 [진종]과 [효순왕후]로 추숭하였다. 


하지만 정조 사후기록에는 그가 당시에 [진종]의 추숭을 그다지 마뜩찮게 여겼다고 전하고 있다. 이때 경상도 안동유생 이도현사도세자를 추숭하자는 상소를 올렸으나, 정조는 [노론] 벽파를 의식해 이를 수용하지 않고 오히려 이도현 부자를 처형하기도 했다. 


영조 조 중반이후 [노론세력]은 우위를 점하고 있던 척신세력과 그들을 타파하려는 청류(淸流)세력으로 나뉘어 정국을 주도하고 있었다. 특히 영조 말년에는 영조계비 정순왕후숙의 문씨 등의 [왕실세력]홍인한, 정후겸 등의 [척세력]세자를 모해하여 여러 차례 곤란을 겪었는데, 막상 정조가 즉위한 뒤에도 [노론]과 [남인]의 당쟁은 지속되고 있었다. 



당시 [노론] 중 청류(淸流)세력은 탕평책을 반대하며, 외척이 참여하지 않는 깨끗한 정치를 주장하며 자신들을 청명당(淸明黨)이라 했다. 하지만 [남인]은 이들 [노론세력]을 "한쪽으로 치우친 간사한 무리" 라는 뜻으로 벽파(僻派)라고 부른 반면, 노론은 [남인세력]을 "시류에 편승해 탕평책을 지지하는 아첨 무리"라며 시파(時派)라 불렀다. 


정조 영조탕평책을 반면교사로 삼아 이를 계속 추진하며, 선왕 때 집권했던 척신(외척) 세력을 숙청하고 [노론]의 청류세력을 조정의 중심부로 끌어들이며 그간 소외됐던 남인을 등용해 정치적 통합을 이루고자 했다. 정조는 세손시절 고모 화완옹주가 대리청정을 방해하고 그의 좌장인 홍국영을 제거하려 했던 죄목으로 그녀를 서녀(庶女)로 강등시키고 홍인한정후겸 등을 사사했다.



또한 문숙의를 사저로 내쫓아 사사시키고 그녀의 오라비와 어미를 노비로 강등했으며 대비 정순왕후의 오라비인 김구주도 숙청하였다. 이때에 외조부인 홍봉한도 탄핵을 받았으나 정조는 끝내 홍봉한과 정순왕후는 보호해 주었다. 


정조의 이러한 조치는 그의 정적들을 긴장하게 했고, 궁지에 몰린 벽파 홍상범은 궁중에 자객들을 보내 정조를 암살하려 모의하였다. 정조 즉위년 7월 28일 거사를 정해 홍상범이 20여명 자객과 함께 궁궐에 잠입했으나 정조의 호위대에게 발각돼 홍상범 일가가 유배되기도 했다. 

   

illustrator / 소명

이때 정조의 외숙인 홍낙임이 암살모의 연루자로 이름이 올랐으나 혜경궁의 요청으로 정조는 친국 끝에 홍낙임을 석방해 주었다. 그러나 이들의 역모사건은 계속되어 이듬해 사도세자와 경빈 박씨의 소생이던 은전군을 추대하고 정조를 시해하려다 발각됨에 따라 홍상범 일당은 주살되고 은전군은 자결을 거부하다 끝내 사사되고 말았다. 


당시의 모반은 환관과 궁녀뿐만 아니라 왕의 호위병까지 연루돼 있었기에 정조홍국영으로 하여금 궁궐을 호위하는 숙위소(宿衛所)를 설치해 자신의 신변을 보호케 하였다. 이를 계기로 홍국영은 숙위소에서 모든 정사를 결제하면서 정조의 정적에 대한 숙청작업을 단행하였다.



정조는 규장각(奎章閣)을 정비해 능력 있는 인물을 대거 등용하며 친위세력을 키워나갔다. 문치를 추구하는 정책인 우문지치(右文之治)와 인재양성의 의지표명인 작인지화(作人之化)를 규장각의 2대 명분으로 내세워 문화정치를 표방했다. 특히 세손시절부터 자신을 경호해온 홍국영을 절대적으로 신임하여 숙위소 대장과 도승지에 임명했다.


하지만 홍국영이 누이 원빈(元嬪)의 갑작스런 죽음이후 권력유지를 위해 왕위종통을 바꾸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1780년(정조4) 홍국영을 몰아내고 규장각 인재를 중심으로 정사를 직접 주재하였다. 그는 영조가 척신들을 중용했던 것과는 달리 [외척세력]을 제거하고 [기득권세력]을 약화시켜 친정체제를 구축하는데 주력하였다. 



정조는 노론 송시열에 대한 경의를 표하였고 [노론]의 건의를 받아들여 재야의 [산림학자]들을 중용하기도 했다. 영조 조에 시작된 문물제도 정비를 완결했으며 우수한 인재를 뽑기 위해 소외받던 서인(西人)과 북인을 채용하고 서인(庶人)도 기용하며 특히 남인 학자를 우대해 주자학을 배격하고 실사구시와 이용후생(利用厚生)을 목표로 하는 실학을 크게 발전시켰다. 


또한 임진자 등을 만들어 인쇄술을 발전시키고, "국조보감" 및 "오륜행실도"와 "무예도보통지" 등의 많은 서적을 편찬하였다. 이때 도화서화원(圖畵署畵員)으로 1781년(정조5) 정조의 초상을 그렸던 김홍도는 조정에서 간행한 [오륜행실도]의 삽화를 그렸다. 그는 왕명을 받고 은밀히 일본의 지도를 확보하기 위해 홀로 쓰시마 섬에 가서 일본지도를 모사(模寫)해 가지고 돌아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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