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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Dec 12. 2015

조선왕과의 만남(52)

정조릉_02


제22대 정조 1752~1800 (49세) / 재위 1776.03 (25세)~1800.06 (49세) 24년 3개월


 

▐ 건릉(健陵) 사적 제206호 /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 1-1 (융건릉 내) 


중인의 신분으로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충청도 연풍 현감 자리까지 올랐던 김홍도는 산수화(山水畵)와 풍속화(風俗畵)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 당시에 신윤복과 같은 화가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는 검서관(檢書官)이던 이덕무와 장용영(壯勇營) 장교이던 무사 백동수가 작업해 간행한 군사서적으로 전투기술과 동작 하나하나를 그림과 글로 해설한 실전 훈련서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Source: Chang sun hwan/ illustrator

정조는 빈곤한 백성의 구제를 위해 자휼전칙을 공포하고 형정(刑政)을 개혁하는 등 제도의 개편에도 힘썼다. 실학이 널리 보급되면서 사회적분위기는 양반은 물론 중인과 평민층까지 문화에 관심을 갖게 돼 문화의 황금시대를 꽃피운 조선후기의 문예 부흥기를 이루게 되었다.     


정조 조에는 안동 김씨들이 정치일각에 집권하게 되었는데, 이때에 후일 세도정치의 기반이 형성되었다. 당시 사회문제로 대두된 천주교에 대해서는 일시적인 종교현상으로 인식해 성리학의 진흥(振興)만이 서양학을 막을 수 있다는 정학(正學)을 내세워 유연하게 대처했다. 


1791년(정조15) 선비 권상연윤지충이 조상의 신주(神主)를 소각하고 천주교식으로 모친의 장례를 치른 것에 대해 무부무군(無父無君) 사상을 신봉했다는 죄명으로 사형에 처해진 신해(辛亥)박해가 일어났다. 정조는 이 사건을 가톨릭 교주인 권일신을 유배시키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더 이상 가톨릭 교도에 대한 박해를 확대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천주교가 유교의 전통을 부정하는 것만은 용납지 않는 강온정책을 병행하였다. 당시 신도들의 대부분이 집권세력이던 [남인]에 속해있었기 때문에 문제는 더욱 심각하게 번져나갔다. 이 사건을 둘러싸고 조정의 [남인]은 가톨릭교를 묵인하는 신서파(信西派)와 가톨릭교를 탄압하는 공서파(攻西派)로 대립하게 되었다. 


정조의 사망이후 정치적으로 그와 대립하던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면서 1801년(순조1) [신유박해]로 신서파가 결정적인 타격을 받을 때까지 10년간의 암투가 지속되었다. 정조는 아비에 대한 효심이 깊어 선친 묘가 있는 양주 영우원(永祐園)을 수원으로 이장하며 현륭원(顯隆園)이라 개명하고 정기적으로 참배하였다.


또한 현륭원 주변인 수원에 성곽을 축조하여 그 안에 행궁(行宮)을 만들고 신도시를 건설해 그의 개혁에 총결산을 이루었다. 정조는 재위 14년에서 19년까지 한성에서 수원에 이르는 경유지인 과천, 안양, 시흥, 안산, 화성에 행궁을 설치했다. 


illustrator / 이윤희

1796년(정조20) 수원 화성(華城)을 축성한 후 팔달산 동쪽기슭에 576칸 규모의 화성행궁을 건립했다. 가장 큰 규모의 [화성행궁]은 원래  관아로 사용했던 건물이었으나 행궁으로 고쳐지은 이후에도 평시에는 화성부 유수가 집무하는 관아로 활용했다. 


1789년(정조13) 현륭원 이장(移葬)이후 정조는 1800년까지 11년간 12차례의 능행을 거행하였다. 이때마다 그는 화성행궁에 머물며 여러 행사를 치렀다. 1795년에는 선친의 능과 가까운 [화성행궁]에서 혜경궁 홍씨의 환갑잔치를 열기위해 5,000여명 인원과 800필의 말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을묘원행(乙卯園幸)을 거행하기도 했다.   


한중록(恨中錄) / illustrator 정윤정

화성행차 중 가장 규모가 컸던 이 행렬에는 정조 친위대 군사가 3천여 명 동원되었는데, 정조는 군복차림으로 장용영(壯勇營)의 군사를 지휘함으로써 강력한 왕권과 뚜렷한 개혁의지를 나타냈다. 


이렇듯 [화성행궁]과 [화성]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개혁적 계몽군주인 정조가 지향했던 왕권강화정책의 상징물로 정치, 군사적인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당시 수원 화성(華城)은 [남인]의 실학자인 정약용을 통해 가장 선진적인 축성기술을 도입해 성을 쌓고 또한 화성을 포함한 수원일대를 자급자족 도시로 육성하고자 했다. 


화성행궁(illustrator / 정효선)

이곳에 둔전(屯田: 국영농장)을 설치하고 경작을 위한 물의 확보를 위해 몇 개의 저수지를 축조하여 선진농법 및 농경방식을 시험적으로 추진하였다. 또한 자유로운 상행위가 가능토록 해 수원일대 상인들의 유치가 쉬워지면서 [화성]은 정조 조 정치개혁의 산출물이 되었다. 


정조는 적당한 때 왕위를 물려주고 노론의 거점인 [한성]에서 벗어나 친모와 함께 [화성]에 머물고자 화성축성을 단행했으며, 왕실직속 친위대인 장용영을 설치하여 군권을 장악함으로써 실질적인 통수권을 행사토록 했는데 이 또한 노론을 견제하려는 정책의 일환이었다. 



정조는 개혁과 대통합을 착수하며 많은 업적을 남겼으나 1794년(정조18)에 발병한 부스럼 병이 격무와 과로로 악화돼 49세에 예기치 못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면서 장용영이 혁파되고, 그가 육성했던 세력들이 대거 축출되는 등 정조가 추진했던 개혁의 산물은 대부분 무산돼 역사 속으로 퇴장되고 말았다.     


창경궁 영춘헌(迎春軒)에서 승하한 정조의 죽음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독살설이 제기되고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구체적인 사료(史料)는 없다. 다만 정조가 승하한 해 8월 경상도 인동의 남인출신 거족 장현광의 후손 장현경과 친족인 장시경 3형제 등이 정조의 독살을 주장하며 원수를 갚겠다고 거병했다는 역모 고변이 제기돼 장씨 일족이 대대적으로 처벌된 인동작변(仁同作變) 사건이 있었다. 



당시 정약용은 고래(정조)가 해달(노론)에게 죽임 당했다며 정조의 독살설을 암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2009년 2월 정조심환지에게 보낸 어찰(御札)이 발견되었고, 정조 스스로 자신의 건강악화에 대해 서찰에 토로한 내용이 다수 나오면서 그의 독살설에 대한 이의가 제기되기도 했다. 그는 생전에 부친 곁에 묻히고 싶어 하여 사도세자가 있는 현륭원(융릉)아래에 안장되었다가 후일 현재의 자리로 천장하게 되었다.   

 

"지난한 여정을 거쳐 왕위에 오르신 대왕께서는 기울어가는 후기조선을 개혁정책과 탕평을 통해 화합을 실현코자했던 군주로 역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개혁과 대통합을 통하여 만백성의 삶이 평안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꾸며, 스스로 성인군자로서의 군사(君師)가 되기를 희망했던 전하의 애민(愛民)사상을 되새겨보며 끝없는 경의를 표하옵나이다.


수원 화성(華城)


제22대 정조비 효의왕후 1753~1821 (69세) 


효의왕후 김씨는 좌참찬 김시묵의 여식으로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조선시대 제천 청풍의 본관을 갖은 왕비는 현종의 비이자 숙종의 모후였던 [명성왕후]정조 비인 [효의왕후] 2명이 있다. 효의왕후는 삼간택을 거쳐 별궁으로 들어갔으나 천연두를 앓아 이듬해인 1762년(영조38년) 10세 나이에 어의궁(於義宮)에서 세손과 가례를 올리고 세손빈에 책봉되었다. 


두 여인은 혈육적으로도 가까워 명성왕후효의왕후의 고모였지만, 두 여인은 같은 일가의 왕비이면서 서로 다른 삶을 살았다. 명성왕후는 성격이 매우 사납고 처신이 거칠어 남편 현종은 후궁을 한명도 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정조는 정비인 효의왕후 외에 4명의 후궁이 있었다.   


이처럼 정조가 4명의 후궁을 둔 것은 정비 효의왕후의 불임과 관련이 있다. 그녀는 왕자를 낳고자 갖은 노력을 했으나 끝내 태기가 들어서지 않았다. 실록에 등장하는 효의왕후 행장(行狀: 죽은 후 생전행적을 적은 글)은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illustrator / 이철원

"효의왕후가 어떤 징후가 있자 아이를 가진 것 같아 정조가 매우 기뻐하며 서둘러 산실을 마련했다. 그러나 1년이 지나도 결국 혈육을 두지 못하였다." 이는 효의왕후가 불임에 대한 스트레스로 이른바 상상 임신을 한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다. 명성왕후와 달리 온순했던 그녀는 홀로된 시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지성으로 섬겨 영조의 총애를 받았다. 


또한 우애가 극진하여 화완(和緩) 옹주가 그를 몹시 괴롭혔으나 조금도 개의치 않았고 특히 시누이에 해당하는 청연과 청선 두 군주(郡主: 왕세자 정실에서 태어난 딸)와는 더욱 우애가 돈독했다. 청선군주의 상(喪)을 당하였을 때는 스스로 슬픔을 이기지 못할 정도로 비통해 했고 그 자녀들을 친자식처럼 보살펴 주었다. 


1776년 정조가 왕위에 오르며 왕비가 되었으나 왕후 김씨에게서 소생이 없자, 1778년 정조의 측근이었던 홍국영이 자신의 누이동생을 빈(嬪)으로 들여보내 정조의 후궁으로 만들고, 그 여동생이 양자로 삼은 완풍군을 세자로 만들려고 하는 과정에서 효의왕후와 충돌이 있었다.



1779년 원빈 홍씨가 입궁한지 1년 만에 병사하자 홍국영은 왕이 새로운 빈을 맞아들이지 못하도록 극력 반대하고 급기야는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의 아들을 원빈의 양자로 삼아 완풍군에 봉하고, 다시 [상계군]으로 개봉하여 왕의 후계자로 삼도록 함으로써 자신의 세도정권 유지에 급급하였다.     


홍국영이 원빈을 죽인 장본인이 효의왕후라고 모함하며, 1780년 왕비를 독살하려고 독약을 탄 음식을 왕비 전에 넣었다가 발각되자 정조는 효의왕후의 손을 들어주며 집권 4년 만에 홍국영의 가산을 몰수하고 내쳤다. 효의왕후 김씨는 슬하에 소생이 없어 1790년(정조14) 수빈 박씨가 아들(순조)을 낳자 양자로 입적하여 왕세자로 삼았다. 


정조, 효의왕후 합장릉

김씨는 온후하고 사정(私情)에 흐르지 않는 성품을 갖추어 사가에 내리는 은택(恩澤)을 매우 경계했다. 때문에 수진궁과 어의궁에 쓰고 남는 재물이 있어도 궁화(宮貨)는 공물이라 하여 사사로이 사가에 재물을 내린 적이 없었으며 또한 일생을 검소하게 지냈기에 그녀가 지닌 옷이나 소장품은 좋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효성이 지극해 60세가 넘어서도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와 혜경궁 홍씨를 극진히 공양하여 궁중사람들로 부터 칭송을 받았으며 정조 승하 후 왕대비에 올랐다. 그녀는 정조로 부터 순조 때까지 수차에 걸쳐 존호(尊號)가 올려 졌으나 모두 거절하였고 1820년(순조20) 68세가 되어 여러 대신들이 하수연(賀壽宴)을 베풀고자했으나 이마저 사양하였다. 


정조비 효의왕후는 창경궁 자경전(慈慶殿)에서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화성 건릉정조와 함께 합장하여 평안히 잠들어 있다.

  



正祖 還御行列圖
 

정조가 을묘원행(乙卯園幸)을 통해 화성궁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환갑잔치를 치루고 환궁하는 길에 시흥행궁에서 하룻밤을 머물고자 행궁에 들어서는 행렬도 그림 (흰천막으로 감싼 혜경궁 가마)



화성의 융릉행차 시 한강을 건너기 위해 노량진에 임시로 36척의 배를 연결해 다리를 만든 모습의 그림 (정조는 정약용에게 도강설계를 맡겨 경비를 줄였고 배주인들에게 음식을 베풀고 비용을 지불했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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