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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Dec 13. 2015

조선왕과의 만남(53)

순조릉_01


제23대 순조 1790~1834 (45세) / 재위 1800.07 (11세)~1834.11 (45세) 34년 4개월 


(The source : ILLUST / Chang sun hwan / illustrator)

 

▐  인릉(仁陵) 사적 제194호 /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산13-1 (헌인릉 내)   


서울 서초구 대모산자락에 자리한 인릉은 1970년대만 해도 경기도 광주군에 속했으나 강남개발과 함께 서울로 편입된 능지이다. 이곳에 순조 능은 조선 제3대 왕인 태종 헌릉 능역 안에 함께 있어, 무려 412년의 시대를 건너 뛴 조선 [초기]와 [후기]의 능원양식을 함께 볼 수 있는 곳이다. 


경희궁 회상전(會祥殿)에서 승하한 순조는 이듬해인 4월 안동김씨 세력에 의해 인조가 잠들어 있는 파주 교하의 장릉(長陵) 왼쪽 산줄기에 申向(북서향)으로 안장되면서 능호를 인릉이라 하였다. 하지만 22년 뒤 순조 비(순원왕후)의 동김씨 세력이 약화되자, 반대로 세력이 커진 효명세자 빈(신정왕후)의 친정 풍양조씨순조의 능이 풍수상 불길하다 주장하고 나섰다.   


헌인릉

이들의 세력싸움은 당초 순조의 능지를 정할 때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엔 인조의 능 우측언덕에 자리 잡아 공사를 했으나 산릉의 흙빛이 흡족하지 못하다하여 장릉 경내(境內)로 옮겨 재공사를 했다. 당시 풍양조씨를 따르던 상지관 이시복은 흙빛을 은폐했다는 명목으로 참형에 처해졌으며 이때 산릉도감을 맡았던 이면승은 이중 공사에 따른 과로로 산릉 공사현장에서 사망하기도 했다. 


이후 철종 6년 인릉 천장에 대한 논의가 있었는데, 실록 1월 기사(記史)에는 "인릉의 능을 봉안한지 21년이나 되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외의(外議)가 서로 논쟁이 있다고 하니, 나의 마음이 송구스럽다. 이 일이 지극히 중차대함으로, 경들과 상의하여 결정하려 한다."고 기록돼 있다.


결국 순조의 능침은 천장논의가 있던 이듬해인 1856년(철종7) 현재위치인 내곡동 헌릉 서쪽언덕에 북좌남향(子坐午向)으로 천장되었다. 이 자리는 당초 세종소헌왕후의 능침이 있던 자리였는데 흉터라 하여 세조가 천장을 주장하고 예종 때 실행에 옮긴 터였다. 



그러나 400여년이 지난 철종 조에 지관들은 이곳이 혈이 뭉친 곳이 풍만한 길지라고 호평했다 하니 세월을 두고 명당과 흉당을 넘나들던 풍수가들의 견해가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순조의 묘호는 당초 순종이었으나 순원왕후의 국장을 치르며 순조로 바뀌었는데, 당시 최장수 조정 정략가였던 중추부영사 정원용홍경래의 난을 평정한 공적으로 종(宗)을 조(祖)로 바꿀 것을 주청해 이루어졌다.

 

인릉합장릉 이지만 겉으로 봐서는 마치 단릉처럼 보인다. 봉분이 하나인 합장릉은 왕과 왕비의 혼령을 각기 모시기 위해 혼유석을 두개로 놓게 되는데, 인릉의 혼유석(魂遊石)은 하나만 설치하여 [단릉]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능침에는 12칸의 난간석만을 둘렀으며 나머지 상설은 국조상례 제도를 따르고 있다. 


인릉의 석물은 여주로 천장할 때 이곳에 파묻고 간 세종 영릉의 석물들을 일부 재사용했다. 때문에 장명등은 조선초기의 팔각등 양식으로 세워져 있고, 문무석인은 생동감 있는 표정과 이목구비의 표현 등이 정교하여 조선후기 석물조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특히 무인석은 당시 홍경래의 난을 물리친 장군처럼 우람하며 사실적으로 조각돼 있다.



19세기에 접어들며 시작된 순조 조는 18세기 영조정조의 태평기(太平期)를 거치며 물품 및 화폐경제의 발달로 상민(常民)들의 사회의식이 성장하던 시기였다. 반면에 세도정치의 폐단으로 조정기강이 문란해져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극심한 사회혼란이 일어났던 시기이기도 했다. 순조정조의 둘째 아들로 정조 14년 후궁 수빈 박씨의 몸에서 태어났다. 


[정조실록]에 따르면 "오색무지개가 종묘 우물에 뻗어있으며 상서로운 빛이 궁궐 숲을 둘러싸고 있으니, 이 어찌 하늘이 주신 기쁨이 아니겠는가."라며 순조의 탄생을 화려하게 기록하고 있다. 사도세자의 비극을 몸소 체험했던 정조였기에 자신의 아들인 순조를 각별히 아끼고 귀히 여겼다는 기록도 [순조실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정조는 정비였던 효의왕후에게서 자식을 얻지 못하고 의빈 성씨가 낳은 맏아들 문효세자 마저 1786년(정조10) 어린나이에 요절하자, 둘째 아들을 1800년(정조24) 정월 세자로 책봉했다. 그 해 6월 정조가 승하하자 11세의 어린나이로 왕위에 올라 1802년(순조2) 김조순의 여식을 뒤늦게 왕비로 맞이했다.


즉위 후 1804년까지 5년여 간 어린 순조를 대신해 증조할아버지 영조의 제2계비였던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는데 이 기간 동안 그녀는 문예부흥기를 일궈냈던 정조의 커다란 치적에 역행하는 정치를 주도하였다. 



이 시기에 정순왕후는 영조 조에 사도세자 폐위를 주장했던 오라버니 김귀주를 비롯한 심환지 등의 벽파와 뜻을 같이하고 있었기에 수렴청정기간 동안 정조 조에 집권세력이었던 시파의 숙청에 주력하였으며 이는 곧 천주교의 박해로 이어졌다. 


1801년(순조1) 조선사회의 질서를 바로잡는다는 명분으로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재시행해 연대책임을 강화하였디. 이는 한 집에서 천주교도가 적발되면 다섯 집을 모조리 처벌하는 방식으로 천주교도를 색출하는데 이용되었다. 



이때  정조 조에 집권했던 정적(政敵)인 [시파]를 보복코자 천주교를 탄압하는 신유사옥을 일으켜 300명의 교인이 학살됐으며, 천주교를 학습하거나 따랐던 정약용 등의 남인시파의 주요인물들이 처형되거나 유배되었다. 천주교 탄압은 순조의 친정(親政) 뒤에도 계속되어 1815년 경상도와 강원도의 천주교인들을 잡아 죽였던 을해박해를 비롯해 1827년에도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수많은 교인들이 검거돼 처형되었다. 


수렴청정 시기에 한편으로는 관아에 예속된 공노비를 없애고 서얼허통(庶孼許通)을 시행하는 등의 조선후기 신분질서 변화정책이 나오기도 했다. 1804년(순조4)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거두면서 그해 12월부터 순조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당시 대왕대비 정순왕후는 경주김씨로 [노론] 벽파의 가문이었으나, 정조의 유지를 받들어 순조의 장인이 된 김조순은 [남인] 시파였다. 순조의 친정이 시작되자 김조순이 정치에 관여하여 정국의 주도권을 거머쥐면서 이때부터 안동김씨의 새로운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당시에 시파를 옹호하며 정조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던 김조순은 벽파와의 관계에서도 중립을 지켰던 곧은 성격의 인물이었다. 또한 그는 순조 즉위 후 여러 요직이 제수됐으나, 항상 조심하는 태도로 벼슬을 사양하며 오직 순조를 돕는 일에만 전념하였다. 


이러한 김조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를 둘러싼 친족세력들로 인해 후일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기반이 조성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순조는 처가 친족들인 척신세력에 맞서며 선왕의 여러 정책을 모범으로 하여 국정을 주도코자 노력했다. 



1808년(재위8) 이후로는 정승 김재찬의 보필을 받아 관원을 직접만나 실무를 챙기고 암행어사를 파견해 백성들이 원하는 바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또한 부왕인 정조의 빛나는 업적을 잇기 위해 "대학유의", "만기요람" 등 학문과 정사에 관한 서적을 편찬하고 친위부대의 강화와 하급 친위관료 육성 등으로 국정을 파악하고 왕권을 강화하려 했다. 


하지만 정치현실은 순조의 노력과 뜻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수렴청정의 그늘은 오랫동안 그의 뒤를 따라다녔고 두 왕실(순조비 김씨, 순조모 박씨) 집안의 권력다툼은 순조의 국정운영을 더욱 어렵게 했다. 


혈연을 중심으로 하는 [안동김씨]와 [반남박씨] 등이 조정요직을 독점해 중앙과 지방의 인사권을 장악함으로서 그들을 견제할 세력이 없었다. 이러한 세도정치로 뇌물수수와 매관매직 등 부정부패가 극에 달하며 [안동김씨] 일족에게 줄을 대어 관직에 나가는 것이 상식화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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