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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Dec 13. 2015

조선왕과의 만남(54)

순조릉_02


제23대 순조 1790~1834 (45세) / 재위 1800.07 (11세)~1834.11 (45세) 34년 4개월



▐  인릉(仁陵) 사적 제194호 /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산13-1 (헌인릉 내)  


이렇듯 인사제도의 기본인 과거제도가 문란해져 양반의 관료체제가 흔들리며 신분질서가 무너지고 이들의 수탈로 인해 나라 조세징수가 크게 흔들렸다. 탐관오리의 중간수탈과 토호(土豪)의 세금전가는 일반 농민층에 집중돼 지주의 핍박에 시달리던 농민층의 몰락을 촉진했다. 


조선후기 순조의 재위기간은 척신(戚臣)들의 횡포와 수해 및 전염병 등의 자연재해로 각종 사회혼란이 일어났다. 순조는 연이어 지속되던 악재 속에서 백성들의 아픔을 보듬으려 노력하였다. 하지만 1809년의 유례없는 기근으로 민심이 피폐해지자 잦은 민란(民亂)이 발생했다.


그중 순조 11년 평안도사람들을 차별하는 것에 대한 불만을 품고 일어난 홍경래의 난은 조선개국 이후 발생했던 최대 규모의 민중반란이었다. 홍경래는 순조 즉위해 부터 조선의 북쪽지역을 돌아다니며 정세를 파악하고 동조자를 모아 반란을 계획하고 있었다. 

  

illustrator / 정윤정

뛰어난 무사들을 거느렸던 홍경래는 몰락한 양반과 부농지주 및 상인들을 규합하여 수탈에 시달리던 농민들과 함께 1811년 민란을 일으켜 8개 군을 장악하였다. 연이어 남쪽으로 진격하려다 관군에게 패하자 정주성(定州城)으로 들어가 저항했다. 


이듬해인 1812년(순조12) 관군이 화약을 폭파해 성을 무너뜨리고 들어가 반란을 진압하며 홍경래는 전사하고 봉기군무리 중 1,900여명이 효수형에 처해졌다. 당시 홍경래의 난은 새로운 개혁의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고 실패로 끝났지만, 낡은 지배체제에 저항했던 정치적 사건으로 후세의 민중운동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험난한 정권을 장악하지 못했던 순조홍경래의 난을 진정시킨 뒤 가장 먼저 민생을 보살폈다. 그러나 순조는 난에 대한 근본수습책을 마련하지 못함으로써 이후 국정주도권은 외척간의 경쟁에서 승리한 안동 김씨에게 돌아가고, 이른바 세도정치가 자리 잡게 되어 왕은 적극적인 권한을 행사하지 못했다. 



때문에 이후에도 크고 작은 농민봉기나 모반사건이 끊임없이 지속됐다. 그해 한성에 도적과 거지 떼가 들끓었고 1813년 제주도의 토호인 양제해와 1815년 용인의 이응길이 민란을 일으켰다. 1817년 흉서(凶書)사건, 1819년 모반운동, 1826년 청주 괘서사건이 발생하고 1821년에는 서부지방에 전염병이 크게 번져 10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불행하게도 순조의 34년 재위기간 중에는 19년에 걸쳐 수재(水災)가 발생하는 등 크고 작은 천재지변이 잇달아 발생했다. 1826년 봄 순조는 굶주린 백성들을 보고 한탄하기를 "집집마다 들어가 보면 텅 비어있고 마을마다 나가보면 밥 짓는 연기가 끊겼다." 


"백성의 어버이가 되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충분히 먹고 배를 두드리는 즐거움을 누리게 하지는 못할지언정 흉년이 들어 굶주려 죽는 이들조차 구제하지 못하니, 어찌 내가 쌀밥과 비단옷을 편안하고 아름답게 느끼겠는가?"라며 왕실곳간을 열어 백성을 구제하는데 쓰도록 하였다. 



한때 순조는 [안동김씨]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또 다른 방책을 강구하며 1819년(순조19) 조만영의 딸을 세자빈으로 삼아 [풍양조씨] 일문을 중용하였다. 이로써 일시 권력의 중심이 풍양조씨로 넘어갔지만 세도정치 문제는 해결되지 못했다. 


1827년(순조27) 세도정치로 인한 잦은 민란과 수차례의 천재지변으로 의욕을 상실한 38세의 젊은 순조는 국정일선에서 물러나, 19세 아들 효명세자(익종)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고 정국분위기를 바꿔보려 했다. 세자는 김조순 일파를 견제하면서 풍양조씨의 세력을 끌어들여 새로운 정치세력을 결집하고 안동김씨를 멀리하고자 김조순을 평안도 관찰사로 내보내는 등 의욕적으로 정치개편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3년이 지나 1830년 세자가 젊은 나이에 급서함으로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는 결국 외척세력인 [풍양조씨] 일문의 또 다른 세도정권을 만들어 내며 균형과 견제가 이뤄지는 정계개편으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1805년(순조5) 영조 계비 정순왕후의 죽음 이후에는 새로 탄생한 [안동김씨]의 세도정권이 [풍양조씨] 조득영의 협력을 얻어 노론 벽파를 몰아내면서 오랜 세월의 당쟁이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세도정권은 반대파가 없는 정치적 기반을 더욱 굳건히 다져나감으로써, 그들은 사회문제를 도외시하고 일문의 영달과 권력에만 관심을 쏟게 만들었다. 결국 순조는 재위34년 간 세도정치에 밀려 정치적 영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위축된 상태에 머물다가 1834년(순조34) 경희궁 회상전(會祥殿)에서 45세의 나이로 안타깝게 이승을 하직하였다. 


당시 순조는 정궁이던 창덕궁에 불이 나 경희궁으로 이어(移御)해 있었다. 순조는 늘 자신의 눈과 귀를 열어  백성을 보살피는 군주가 되고자 했으나 그의 무능함으로 고단한 백성들을 지켜주지 못한 채 조선을 쇠락의 길로 이끈 군왕으로 역사에 남고 말았다.   


  


제23대 순조비 순원왕후 1789~1857 (69세)      


순원왕후 김씨는 영안부원군 김조순의 여식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김씨이다. 그녀는 시파 계열이자 정조의 최측근으로 활약한 아비 김조순의 영향으로 당시 왕세자였던 순조의 유력한 세자빈으로 떠올랐다. 1800년(정조24) 초간택과 재간택을 거쳐 정조의 뜻대로 사실상 세자빈으로 확정되었다.


하지만 정조가 갑작스럽게 승하하자 삼간택의 문제를 놓고 [시파]와 [벽파]의 갈등이 벌어져 최종적인 삼간택이 미루어졌다. 당시 수렴청정을 했던 왕대비 정순왕후는 오라비 김관주와 권유 등을 시켜 간택을 무효화하고 자기의 사람을 세우고자 김씨의 간택을 방해했으나, 결국 순조 즉위 2년 뒤인 1802년에 왕비로 책봉되어 가례를 올렸다.  


illustrator / 이철원

1805년 왕대비인 정순왕후(영조계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순조의 친정이 선포되자 김조순은 [경주김씨]의 벽파를 대규모로 숙청하고, 김이익과 김이도 등의 [안동김씨] 시파를 등용했는데, 이들 중에는 천주교 신자가 많아 정순왕후 집권 때 계속된 천주교 박해는 다소 완화되었다. 


순원왕후는 순조의 정비이자 추존왕 익종(효명세자)의 생모이고 헌종의 조모이며, 아비 김조순과 오라비 김좌근으로 이어지는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의 중심축에 서 있었다. 그녀는 1809년에 맏아들인 효명세자를 낳았는데 세자는 어릴 때부터 총명해 순조의 많은 귀여움을 받았다.



당시 순조는 안동 김씨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1819년 풍양 조씨인 조만영의 딸을 효명세자의 세자빈(신정왕후)으로 맞아들였다. 1827년 순조는 효명세자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하게했는데 세자는 이 기간 동안 인재를 등용하는 과정에서 세자빈의 친정인 풍양 조씨 일가를 중용해 한때 순원왕후의 친정일가는 정국주도권을 빼앗기기도 했다. 


하지만 1830년 대리청정 3년 만에 효명세자가 갑작스레 요절하고 1834년에는 순조마저 승하하자 당시 8살이었던 왕세손인 헌종이 즉위하면서 효명세자를 익종으로 추존하고, 자신은 대왕대비가 되어 6년간 수렴청정을 하며 친정권력을 되돌려 놓았다. 왕대비 순원왕후는 헌종의 정비인 효현왕후를 자신의 친척인 김조근의 딸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1849년 15년 만에 헌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그녀는 [풍양조씨]의 일가를 의식한 탓에 서둘러 친가인 안동김씨 세력과 결탁해 사도세자의 서자이자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의 손자 강화도령 원범을 궁으로 데려와 덕완군으로 책봉하고 자신과 순조의 양자로 입적해 왕위를 잇게 하였다. 


철종을 즉위시킨 뒤에도 그녀는 2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1851년(철종2) 자신의 외가인 김문근의 딸을 철종비로 맞아들여 안동김씨의 60년 세도정치를 이어나가게 하였다. 당시에는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에 맞설 견제세력이 없었기에 조선사회는 참혹할 정도로 부패해 있었고 이에 고통스러워하던 백성들을 외면한 조선왕조는 급격한 쇠락의 길로 치닫게 되었다. 


두 차례의 수렴청정을 거치며 친정을 도와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절정에 달하던 1857년(철종8) 순원왕후 김씨는 창덕궁 양심각(養心閣)에서 69세의 일기를 마감하면서, 친정인 안동김씨 일가 등이 [인릉 경내]로 자리할 것을 주장하여 그해 12월 남편이 잠든 인릉(仁陵)에 합장되었다.


헌인릉 경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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