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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Dec 16. 2015

조선왕과의 만남(55)

헌종릉_01


제24대 헌종 1827~1849 (23세) / 재위 1834.11 (8세)~1849.06 (23세) 14년 7개월      


Source: Chang sun hwan/ illustrator


▐  경릉(景陵) 사적 제193호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9-2 (동구릉 내) 


경릉은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3개의 봉분을 가진 삼연릉(三連陵)으로 이루어져 [동구릉]의 중심인 건원릉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경릉은 당초 선조의 무덤인 목릉이 자리하고 있던 곳으로, 당시 심명세가 이곳의 터가 좋지 않고 물이 찬다며 상소를 올려 1630년(인조8) 선조의 능을 [동구릉] 경내 다른 지역으로 천릉(遷陵)해감에 따라 빈터로 남아있던 곳이었다. 


하지만 목릉 천장 시 막상 봉분을 열어보니 별다른 문제가 없었던 터였다. 2백여 년이 지난 1843년(헌종9) 헌종 비인 효현왕후가 16살로 요절하자, 현재의 자리에 왕비 능을 조성하고 능호를 경릉(景陵)이라 했다. 그로부터 6년 뒤인 1849년 헌종이 승하하자 효현왕후 좌측에 왕릉을 조성하였다.     



이후 1903년 헌종의 계비 효정왕후 홍씨가 73세의 일기를 마감하며 효현왕후 우측에 안장했는데, 이러한 형식의 왕릉은 경릉이 유일하다. 능의 배열을 보면 가운데 왕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옳지만, 능을 바라보는 위치에서 [좌측]이 헌종의 능침이고 [중앙]은 효현왕후 능이며, [우측]이 계비 효정왕후의 능으로  배치돼 있다. 


이러한 삼연릉의 배열은 능 상설제도에 따른 국장법과 왕실의 위엄이 결여된 왕릉으로 남아있다. 조선왕실에서는 앞서 조성된 왕비 능에 후일 왕을 합장할 경우에는 새로운 능호를 올렸다. 중종의 경우 장경왕후와 함께 묻힐 것을 미리 전교하여, 정릉이 천장되기 전에 장경왕후의 희릉 옆에 동원이강릉을 조성해 함께 안장되었다. 



이때 희릉의 능호를 같이 쓸 수 없다하여 능호를 정릉(靖陵)으로 새로 올렸던 전례가 있고 숙종은 인현왕후와 합장할 것을 생전에 명했기 때문에 쌍릉을 조성하면서 인현왕후의 능호인 명릉을 그대로 사용했다. 당시 헌종의 능호를 숙릉으로 정했으나, 국장기간 중 외조부 조만영의 아우인 조인영의 상소에 의해 효현왕후의 능호인 경릉을 그대로 쓰기로 정하고 왕의 능호를 별도로 정해주지 않았다. 


이처럼 왕이 자신의 능호(陵號)를 쓰지 못하고 왕비의 능호를 따라간 예는 경릉이 유일하다. 또한 풍수상 경릉의 정혈(精血)은 삼연릉 중앙인 효현왕후 능에 있다 하는데 헌종의 능침은 왕비릉에 덧붙여져 정혈을 벗어난 자리에 조성돼 있다. 



음양오행의 남좌여우(男左女右)를 따르자면 왕릉을 조성할 때 좌측이 상석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정혈이 있는 효현왕후의 봉분을 열어 합장하든지 아니면 중앙정혈에 왕릉을 다시 세우고, 효현왕후 봉분을 우측으로 옮기는 것이 당연지사였다. 


이는 다른 능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예외적으로 덕종(의경세자)과 소혜왕후(인수대비) 능에서는 소혜왕후가 상좌인 좌측에 안장되어있다. 이는 남편인 덕종이 죽을 때 [세자] 신분이었고, 부인 소혜왕후는 [대왕대비]의 신분이었기에 남존여비보다 왕실서열이 우선시됐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시 정국을 주도했던 [안동김씨] 일가는 헌종을 업신여기고, 혈이 빗겨선 왕비 능 좌측에 부속품처럼 묻어버린 것은 아니었는지 모를 일이다. 더욱이 후일 계비 효정왕후 홍씨마저 옆에 묻음으로서, 경릉은 실로 처연한 모양새를 이루고 있다. 



예로부터 첩을 두더라도 한 방을 쓰지 않는 것이 상식이거늘 효정왕후 또한 별도의 언덕을 마련해 능을 조성하는 것이 선왕에 대한 최소한에 예의였을 것이다. 허나 그녀가 세상을 떠난 1903년에는 조선의 국권이 무너질 만큼 나라의 재정이 기울어져버린 때였다. 


때문에 효정왕후의 능을 별도로 조영할 인력과 비용을 마련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기에 그녀의 장례를 간단히 치루며 대충 삼연릉(三連陵)으로 조성했을 것으로 짐작해본다. 능침에는 병풍석 없이 12칸의 난간석(欄間石)만이 3개의 봉분을 둘러싸고 있으며 각 봉분 앞에는 혼유석이 제각기 놓여있다. 


삼연릉인 경릉 

조선시대의 왕릉상설은 공간을 3단계(段階)로 나눴다. [상계]는 죽은 왕의 공간으로 봉분과 혼유석이 있고 [중계]에는 죽은 왕을 지키는 문인석이 서있으며 [하계]는 후손의 공간으로 제사를 지내고 절을 올리는 공간이며 무인석이 참배객을 감시하고 있다. 헌데 경릉은 2단계의 공간으로 나누어져, [중계]에 있을 문인석이 [하계]의 무인석과 같은 단(段)에 서있다. 


이는 조선후기에 접어들며 신분질서가 흐트러지면서 문인과 무인의 차별 역시 퇴색돼가던 사회현상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또한 경릉의 석물은 유난히 총탄 자욱이 많은데, 6.25 전쟁당시 파주 삼릉뿐만 아니라 이곳 [동구릉]에서도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것으로 미뤄 짐작되어 진다.



헌종효명세자(익종)와 신정왕후 조씨의 아들로 태어나 1830년(순조30) 효명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왕세손에 책봉돼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1834년 순조가 승하하자 8세의 나이로 즉위해 조선의 왕 중 가장 어린나이에 왕에 올랐다. 때문에 할머니이자 대왕대비인 순원왕후 김씨가 7년간의 수렴청정을 함으로써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지속되었다. 


헌종이 11살이 되던 해 안동김씨 집안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면서 이들 김씨의 세력은 더욱 견고해지게 되었다. 1841년(헌종7) 수렴첨정이 끝나고 15세의 헌종이 비로소 친정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헌종생모인 신정왕후가 중심이 되어 [풍양조씨]인 외조부 조만영이 권력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안동김씨]를 견제하면서 조정은 두 집안의 세력다툼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1846년(헌종12) 조만영의 죽음과 이후 풍양조씨 내부의 알력으로 또 다시 안동김씨가 권력을 독점하게 되었다. 헌종이 나라를 이끌던 시기에는 이러한 두 가문이 세력다툼으로 여러 폐해가 발생하며 조선사회를 지탱해오던 봉건제도의 신분질서 붕괴가 나타나기 시작한 때였다. 


특히 조선후기 나라 재정의 근간을 이루던 삼정(田政, 軍政, 還政)의 문란으로 백성들이 나라에 바쳐야할 세금을 탐관오리들이 거둬들여 불법적으로 착복하고 있었다. 더욱이 헌종 재위 15년 동안 9년간에 걸쳐 발생한 수재(水災)와 전염병으로 백성들의 삶이 갈수록 피폐해지면서 집을 버리고 떠돌아다니는 유민들이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었다.   



이처럼 사회가 불안하다 보니 모반사건이 2차례 걸쳐 일어나기도 했다. 1836년(헌종2) 충청도의 남응중과 1844년(헌종10) 민진용이 강화도에 유배된 바 있던 정조에 이복동생이던 은언군의 손자인 이원경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다. 이때의 모반사건은  별다른 정치세력도 없는 중인과 몰락한 양반들이 일으켰던 대책 없는 역모로 끝났지만, 이로써 조선의 왕권은 끝없이 추락해가고 있었다. 


사사된 이원경은 강화도령인 원범(철종)의 형이었기에 이 사건으로 원범은 강화도의 더욱 외진 곳으로 몸을 숨기고자 했을 것이다. 순조 조부터 시작된 천주교 탄압정책은 이후에도 계속돼 1839년(헌종5) 대규모 천주교 탄압인 기해박해 사건이 발생하였다.



왕대비인 순원왕후 김씨의 수렴청정 기간 초기에는 그녀의 오라버니 김유근이 적극적으로 보필하고 있었다. 하지만 1836년 중풍에 걸려 말조차 못하는 고통에 시달리던 김유근은 이를 치유코자 1839년 천주교 세례를 받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동김씨의 천주교에 대한 태도는 관용적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 천주교는 1831년 천주교 조선 대교구가 승인될 정도로 크게 성장했으나 조정에서 천주교에 우호적이던 [안동김씨]에 대항해 보수적인 [풍양조씨]가 집권하며 대규모의 천주교 박해를 일으킨 것이다. 이로 인해 1839년 주교 앵베르와 신부 모방(Maubant)을 비롯한 많은 선교사와 평신도들이 새남터(이촌동 한강변)에서 대거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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