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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Dec 19. 2015

조선왕과의 만남(57)

철종릉_01


25대 철종 1831~1863 (33세) / 재위 1849.06 (19세)~1863.12 (33세) 14년 6개월

      


▐  예릉(睿陵사적 제200호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37-1 (서삼릉 내)


철종과 그의 비(妃)가 잠들어있는 예릉은 서삼릉(西三陵)의 경내에 있다. 예릉은 왕릉과 왕비릉이 나란히 놓인 쌍릉으로 조선왕실의 상설(喪設)제도를 적용한 마지막 왕릉이다. 이후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개명하고 황제국을 선포함에 따라 황제릉으로 조영됐기 때문이다. 


철종의 능은 그가 남긴 치적에 비해 웅장하게 조성돼 있다. 숙종영조 조를 거치면서 능의 간소화 정책으로 축소됐던 석물이 철종의 능에서 다시 크게 나타나 보인다. 예릉의 문무인석은 3미터가 넘는 것으로 보여, 중종의 제2계비였던 문정왕후가 잠들어있는 태릉의 석물만큼이나 장엄하다. 


예릉(睿陵)

이러한 예릉의 웅장한 석상은 당초 [서삼릉] 경내 희릉 곁에 있던 중종의 정릉(靖陵)과 파주 교하에 있던 순조의 인릉(仁陵)을 다른 곳으로 천장하며, 초장지(初葬地)에 묻어버렸던 석물을 재활용한 것이다. 이때  문무인석과 호마석(虎馬石)은 정릉의 석물을 쓰고 일부는 인릉 석물을 사용하였다. 


예릉의 광중(壙中)작업 때 이곳에서 중종이 장경왕후의 죽음을 애도했던 애책문(哀冊文)과 옥돌 및 비단이 나왔다 한다. 능 언덕아래에 정자각 역시 다른 왕릉의 정자각에 비해 웅장하고,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참도(參道)도 기존의 2단이 아닌 3단으로 넓혀 놓았다.  


예릉 호석(虎石)

이는 고종이 철종을 황제로 추존하면서 황제릉의 형식에 맞춰 중앙에 있는 신도(神道) 양쪽을 어도(御道)로 확장했기 때문이다. 흥선대원군의 섭정 하에 있던 고종은 조선의 오랜 세도정치를 타파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로 왕실권위를 세우고자, 예릉의 석물과 부속건축물을 웅장하게 조영하였다. 


능침에는 두 개의 봉분을 에워싸고 있는 난간석이 설치되어 있으며 난간석 기둥에는 원 무늬를 조각해 12간지 방위문자를 새겨 넣었다. 각 봉분 앞에는 혼유석이 1좌씩 설치되었으며 [중계]와 [하계]의 구분 없이 문무인석이 같은 단에 배치돼 있다. 또한 일반적으로 중계(中階) 중앙에 세워져 있는 장명등(長明燈)이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하계]에 배치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예릉 장명등

장명등 지붕 위에는 둥근 물결무늬가 여러 겹으로 겹쳐져 있고 가운데 원형 틀 안에는 꽃문양을 새겨 넣어 이전에 왕릉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식을 띄고 있다. [서삼릉]에는 예릉을 비롯한 희릉(중종 제1계비 장경왕후)과 효릉(인종과 妃) 등 3기의 왕릉이 있고, 또한 3곳의 묘원(園)이 있다. 


인조의 맏아들로 병조호란 때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던 ①소현세자소경원(昭慶園)과 사도세자 아들로 정조 친형이었던 ②의소세손 의령원(懿寧園)이 있으며, 숙명여대 옆 효창공원에서 이장해온 정조 아들 ③문효세자효창원(孝昌園)이 있다. 따라서 철종은 이곳에 큰할아버지 및 당숙부와 함께 잠들어 있는 셈이다.


서삼릉 경내

이곳에는 성종의 폐비인 윤씨 회묘를 비롯해 조선말기 이장한 후궁무덤과 왕자 및 공주 등의 왕실무덤이 있다. 이렇듯 예릉과 그 주변은 [서삼릉]으로 불리며 조선왕실의 다양한 봉분을 이룬 공간이었으나, 일제강점기와 1960년대 이후 근대화 과정에서 새마을운동과 축산진흥이라는 국가시책으로 주변부지가 상당히 훼손된 곳이다. 


광활했던 [서삼릉] 터에 골프장과 축협의 종축장 및 한국마사회의 목장 등이 들어서 있고, 효릉을 비롯한 폐비윤씨 묘와 왕실 공동묘지가 축협의 사유지로 전환됨에 따라 이들 능은 평상시 출입이 제한돼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릉]의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골프장과 목장으로 팔려나가 훼손된 [서삼릉]이 하루빨리 복원되길 바래본다.



철종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의 서손으로 [전계군]의 셋째 아들이다. 헌종이 젊은 나이에 갑자기 승하하자 왕위를 계승할 후사가 없어 왕실이 혼란스러웠다. 당시 조정은 대왕대비인 순원왕후(순조비)를 축으로 하는 안동김씨와 순조의 며느리이자 대비인 신정왕후(익종 비)의 풍양조씨 일가가 세력다툼을 벌이며 조정의 권력을 양분하고 있었다. 


때문에 누가 먼저 왕을 세우느냐하는 문제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안동김씨의 좌장격인 김문근과 대왕대비는 촌각을 다투어 지체 없이 정조의 아우인 은언군의 손자 [원범]을 택했다. 그는 대왕대비의 명으로 궁중에 들어가 덕완군에 봉해진 뒤 순조의 양자자격으로 왕위에 올랐다. 



당시 순원왕후는 철종으로 하여금 손자인 헌종의 대를 잇게 하지 않고, 자신의 양자로 입적시켜 순조를 잇게 하였다. 이는 조선의 왕위계승 관례를 무시한 처사로서 순원왕후의 친정인 안동김씨의 농간이었다. 원범은 서출인데다가 강화도에서 촌거(村居)하며 농사꾼으로 있었기에 그들이 국정을 농단하기엔 시골청년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적임자였다. 


당시 양반가에서는 그를 강화도령이라 조롱했고 이는 곧 임금의 별명으로 굳어지기까지 했다. 철종은 대왕대비의 명에 따라 택해진 모양새였지만 사실은 안동김씨 일가가 군왕을 선택했던 것이다. 이렇듯 신하들에게 능멸당한 조선의 왕권은 이후 급격한 몰락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illustrator / 정윤정

철종은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 아들인 전계군 이광(李曠)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광은 본처 최씨에게서 원경경응을 두고 후처인 염씨에게서 원범(元範)을 얻었다. 철종의 집안사람들은 참으로 불행한 삶을 살았었다. 


철종의 조부 은언군은 상인들에게 빚을 진 죄목으로 영조의 미움을 사게 되어 제주도로 귀양을 갔다가 신유박해(순조1) 때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사사되었다. 정조 때는 백부인 상계군홍국영모반사건에 연루돼 제주도로 유배되어 자결했으며 백모 역시 천주교 신자로 사사됐다. 



때문에 철종의 가족들은 할아버지와 큰아버지 부부의 죄로 연좌돼 강화부 교동으로 쫓겨나면서 왕족의 지위를 누리지 못했다. 아비 이광은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자식들에게 글을 배우지 못하도록 하고 농사일에만 전념토록 했으며 불우한 빈농으로 살다가다 죽었다. 


또한 이복형 이원경이 1844년(헌종10) 민진용모반사건에 연루돼 사사되고 이후 작은형마저 죽자 원범은 천애(天涯)의 고아가 되고 말았다. 야사(野史)에 의하면 당시 무지렁이 농사 꾼으로 외톨이가 된 원범 양순(福女)이란 천민이던 섬처녀와 따뜻한 정을 나누며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고 전한다. 



헌종이 승하하기 하루전날인 1849년 6월 5일 대왕대비의 교지를 받든 350여명의 문무백관 일행이 그의 초가에 들이닥치는 것을 눈치 챈 원범은 겁에 질려 깊은 산중으로 숨어버렸다. 그의 집안이 계속해 역모사건과 천주교 탄압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었고 형이 사사되는 것을 목격했던 원범은 늘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던 터였다. 


하지만 촌각을 다투는 왕실대사를 앞두고 원범을 찾지 못해 애태우며 이틀 밤을 관아에서 머물던 일행은 대책마련에 부심하고 있었다. 이때 강화유수 정기세가 고육지책으로 양순이를 불러와 원범을 찾아오도록 설득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양순의 손에 이끌려 산중에서 내려온 원범이 강화관아에 도착하자 영의정 정원용은 부랴부랴 봉영(奉迎) 의식을 끝내고 걸음을 재촉해 한성으로 떠났다. 



강화에서 사흘을 허비하는 동안 순원왕후가 보낸 파발마가 매일같이 들이닥치며 호송(護送) 일행을 채근하고 있었다. 궁궐에 도착한 6월 8일에 원범은 즉시 덕완군에 봉해지고 이튿날인 6월 9일, 헌종이 승하한지 3일 만에 19세 나이로 창덕궁 인정전(仁政殿)에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강화도에서 자유롭게 살던 철종은 재위초기 엄한 궁궐의 법도가 너무 힘들었다. 


때문에 강화도에 두고 온 여인, 양순이가 그리워 병이 날 지경이었다. 이를 간파한 안동김씨 세력들은 강화에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 양순을 독살하였다. 천민은 원칙적으로 궁녀가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양순을 궁에 들일 수 없고, 왕이 농사꾼으로 살던 시절에 천민 여인에게 정을 주었던 기억들을 모두 없애버려야 한다는 그들의 생각 때문이었다. 


강화도령을 호송하기 위한 江華島行列圖(평양 조선미술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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