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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Dec 19. 2015

조선왕과의 만남(58)

철종릉_02


25대 철종 1831~1863 (33세) / 재위 1849.06 (19세)~1863.12 (33세) 14년 6개월

      

 

▐  예릉(睿陵)사적 제200호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37-1 (서삼릉 내)


원범이 왕위계승자로 내정되면서 생부인 이광전계대원군으로 추증되었다. 철종은 어린나이에 농사를 짓다 갑자기 왕이 됨으로서 즉위직후에는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했으며, 철종2년 대왕대비의 근친인 김문근의 여식을 왕비로 맞아들였다. 


이로 인해 김문근이 정권을 장악하며 순조 때부터 시작된 안동김씨의 권세가 계속되어 세도정치가 절정을 이루게 되었다. 철종은 즉위 후 소학(小學) 등을 읽으며 왕자교육을 받았다. 1852년(철종3)부터 친정을 시작했으나 정치에 대한 무지로 사실상의 실권은 [안동김씨]에게 있었다. 



철종은 1856년 화재와 수재를 당한 백성들을 위해 구호책을 내놓으며 나름대로 애민정치를 펼치고자 노력하였다. 1859년(철종10)에는 관리들의 부정비리를 지적하는 등 비교적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며, 1861년에는 중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훈련도감 소속의 마보군과 별기군의 군사를 이용해 궁궐 숙위(宿衛) 강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력이 없던 그는 [대왕대비]의 안동김씨와 [왕대비] 풍양조씨의 세력다툼 속에서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칠 수 없었다. 이들 두 가문에 따른 세도정치 전횡으로 군왕의 통치기강이 무너지고 삼정(三政)의 문란이 극도에 달해 백성의 삶은 피폐해져 갔다. 결국 1862년(철종13)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시작돼 경상도 진주, 전라도 전주, 함경도 함흥 등 곳곳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났는데 역사에는 이를 임술민란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밖에 1861년(철종12) 지리학자 김정호(金正浩)가 목판본 “대동여지도” 22첩을 제작하였디. 당시 22첩이 너무 커 한눈에 조선전체를 보기 어려운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대동여지전도(大東輿地全圖)를 재제작하기도 했다. 철종은 봉기발생지역에 수령과 관아의 아전을 처벌하고 농민의 요구조건을 일부 수용함으로써 민심을 수습코자 노력했다. 


이후 조세개혁을 위한 임시특별기구인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을 설치해 삼정개혁을 공포하며 민란수습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구체적인 후속조치가 이어지지 않고 지배층의 이해관계가 얽히어 [삼정이정] 정책은 시행되지 못했다. 


대동여지도 / illustrator 장선환

이러한 정세 속에서 경주지방의 몰락한 양반가 최제우가 1860년 동학(東學)을 창시해 사상운동을 전개하였다. [동학농민운동]은 학정(虐政)에 허덕이던 민중 속으로 놀라운 속도로 파급, 새로운 세력으로 확대됐으며 이에 조정은 동학을 탄압하고 교주인 최제우를 혹세무민(惑世誣民) 죄목으로 처형하였다. 


당시 만민평등을 주장하던 천주교 사상 또한 조정탄압에도 불구하고 몰락한 양반층과 민중 속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철종은 자신을 지지해줄 남인들이 천주교 탄압으로 숙청당하게 되면서, 뿌리 깊은 세도정치의 굴레를 벗어나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없다는 한계를 직시하게 되었다. 



정국의 혼란 속에서 실의에 빠진 철종은 국사를 등한시 한 채 주색을 가까이하면서 건강이 악화되었다. 이후 요통이 깊어져 약방의 치료를 받던 중 후계자를 지명하지 못하고 1863년(철종14)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에서 33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였다. 


탄탄대로의 권력에 안주하던 안동김씨가 망연자실하는 동안 이번에는 풍양조씨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지난날 철종을 옹립하는데 실패했던 경험을 반면교사로 풍양조씨 세력은 조대비(신정왕후)를 통해 흥선군과 미리 치밀한 밀계(密契)를 맺고 있던 상황이었다. 


illustrator / 이철원

당시에는 사망한 순원왕후를 대신해 조대비가 대왕대비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왕의 임종을 지켜보던 조대비는 안동김씨에게 틈을 주지 않고 서둘러 어보(御寶)를 챙겨 후계자를 선포했다. 조대비흥선군의 차남인 이명복을 익종(추존왕)에 입승대통(入承大統)한다고 선언하며 고종에게 왕위를 계승하게 했다. 


철종은 철인왕후와 7명의 후궁에게서 5명의 왕자를 두었는데 모두 요절하였다. 외동딸이던 영혜옹주마저 19세기말 갑신정변의 주역이자 개화 운동가였던 박영호에게 출가해 3개월 만에 죽고 말았다. 강화대교를 건너 강화읍에서 고려궁지로 오르는 야트막한 언덕길 오른쪽에 원범이 살았던 잠저(潛邸)가 있다. 


용흥궁

1853년(철종4) 강화유수 정기세가 농사꾼시절 철종이 머물던 초가를 헐어내고 지금의 용흥궁(龍興宮)을 세웠다. 마지막으로 강화도를 떠나던 날 고갯마루에 이르러 가마에서 내린 원범은 "다시 보마, 강화도야!"라며 외쳤다. 


이후 구중궁궐 깊은 곳에 머물며 그토록 그리던 강화를 다시보지 못한 채, 뒤늦게 양순의 죽음을 알게 된 철종은 비통한 마음을 삭히지 못하고 방탕한 생활에 빠져 젊은 나이에 안타깝게 죽고 말았고 후세를 사는 많은 이들은 그를 애처로운 강화도령으로 기억하고 있다.


철종 예릉


25대 철종 비 철인왕후 1837 ~ 1878 (42세) 


철인왕후 김씨는 영은부원군 김문근의 여식으로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1851년(철종2) 15세에 왕비에 책봉돼 1858년 원자를 낳았으나 6개월 만에 죽고 말았다. 강화도령이던 철종순원왕후에 의해 왕이 되었기에 당시 안동김씨의 위세에 눌려 대항할 힘이 없었다. 


철인왕후 또한 순원왕후의 천거로 왕비가 된 이후에 안동김씨 친정을 위한 주청을 하다가, 철종으로부터 신뢰를 잃게 되었고 이후로 철종철인왕후를 찾지 않았다. 순조 조부터 이어온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는 그녀가 왕비가 된 이후 절정에 달했다. 하지만 철인왕후는 탐욕스럽던 그의 아비와는 달리 현명하고 정숙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어느 날 궁내전(宮內殿)에서 은식기(銀食器) 두어 개를 잃어버린 일이 있었다. 궁내 시녀들이 그것을 찾으려고 하였지만 그녀는 많은 사람에게 오해가 미칠까 염려하여 그만두라고 명하였다 한다. 그녀는 말수가 적고 감정을 내색함이 없이 후덕함을 보여 궁내에서 칭송이 자자했으나, 세도가의 딸로서 친정세력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던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철종이 승하한 이후로 웃는 얼굴을 남에게 보이지 않았으며, 글도 잘 알고 글씨도 단아하게 잘 썼지만 남에게 한 번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김씨는 자손을 남기지 못하고 철종이 승하한 15년 뒤에 창경궁 양화당(養和堂)에서 42세를 일기로 이승을 떠나, [서삼릉] 경내 예릉에 남편 철종과 함께 쌍릉을 이루어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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