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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Dec 20. 2015

조선왕과의 만남(59)

고종릉_01


26대 고종 1852~1919 (68세) / 재위 1863.12 (12세)~1907.07 (56세) 43년 7개월


(The source : ILLUST / Chang sun hwan / illustrator)


▐  (洪陵)사적 제207호 /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141-1 (홍유릉 내) 


1895년(고종32) 8월 경복궁 곤녕전(坤寧殿)에서 시해된 명성황후는 2년 후인 1897년 11월 청량리 홍릉에 묻혔다. 이후 고종은 1919년 1월 덕수궁 함녕전(咸寧殿)에서 승하해 3월 3일 현 위치에 예장되고, 이때 명성황후의 능이 풍수상 불길하다는 이유로 천장해 고종의 능에 합장되었다. 


[국조오례의]에 의한 조선왕실의 장례기간은 5개월이지만 고종의 장례는 안타깝게도 5백년간 이어져온 상례(常禮)로 치러지지 못했다. 일본식 국장으로 치루라는 지시에 의해 이른바 일본의 국장의식을 따르다보니 장례기간도 한 달반을 넘기지 못했다.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당시 일본은 강제병합 이후로 왕실무덤을 일반인의 묘로 격하시키기 위해 왕공가(王公家) 궤범을 만들어 왕족의 분영(墳塋)을 묘로 부르도록 강제하였다. 이를 따르자면 고종 순종의 무덤은 [황제릉]이 될 수 없었기에 이때 황실에서 생각해낸 것이 명성황후의 홍릉이었다. 


고종의 상여가 발인되는 시각에 맞추어 청량리 홍릉을 파내 명성황후의 재궁(棺)을 현재의 남양주로 옮겨와 고종과 함께 합장하였다. 명성황후를 고종과 함께 묻히면서 결국 명성황후 능호인 [홍릉]을 그대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이후 순종의 장례 때에도 똑같은 절차를 밟아 능동(어린이 대공원)에 있던 순명황후의 유릉을 옮겨 남양주에 합장하면서 황후의 능호를 쓰게 되었다.


청량리 세종대왕기념관(전 홍릉)

새로운 능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강제병합 이전 원래 있던 능의 칭호를 가져다 쓰는 것이었기 때문에 일제로서는 이를 막을 법적근거가 없었다. 능의 천장 또한 황실내부 문제로 황실에서 옮기겠다는데 일제 총독부가 이를 저지할만한 명분을 찾지 못해 별반 문제없이 처리되었다. 


하지만 왕실장례법에는 왕비의 능에 왕을 합장할 경우에는 왕의 능호를 쓰도록 되어있다. 중종이 장경왕후의 능인 희릉 옆에 함께 안장되었을 때 능호를 희릉대신 정릉으로 새로 올렸던 전례가 있었다. 또한 숙종은 인현왕후 능에 묻을 것을 생전에 지시했기 때문에 인현왕후의 명릉을 그대로 사용했으나, 고종과 순종의 경우는 일제의 간섭으로 국왕의 새로운 능호를 올릴 수 없었다. 



하지만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홍릉은 [황제릉]의 양식을 따라 명나라 태조의 효릉을 본떠 조영하였다. 조선왕릉 중 홍릉과 유릉만이 황제릉 규모로 이루어져 일반왕릉에 비해 능이 웅장하게 조영돼 있다.


꽃무늬를 새긴 12면의 병풍석으로 봉분을 둘렀으며, 봉분밖에도 12칸의 꽃무늬 난간석이 설치돼 있다. 봉분아래에는 조선 왕릉에 설치한 혼유석과 망주석 및 장명등의 석물이 배치돼있으나, 상중하의 단계(段階)가 사라지고 석물들을 배치하지 않았다. 


능 언덕아래에 정자각을 없애고 대신에 황제의 숙소인 일자형 침전을 세웠다. 침전 앞의 참도(參道) 양옆으로 장대한 크기에 금관을 쓴 문인석과 무인석,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 등의 석물들을 대칭으로 배치하여 기존의 왕릉과는 확연히 다른 황제릉의 웅장한 면모를 갖추고 있다.



고종은 사도세자의 현손으로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즉위 후인 1866년(고종3) 15세에 한살 위인 민씨(명성황후)와 가례를 올렸다. 고종이 추존왕인 익종(헌종 친부)의 대통을 계승하고 철종 뒤를 이어 즉위하게 된 것은 아비 흥선군과 익종비(신정왕후)였던 조대비와의 묵계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순종에서 철종까지 3대에 걸쳐 [세도정치]를 한 안동김씨는 철종의 후사가 없자 뒤를 이을 국왕후보를 두고 왕손들을 지극히 경계했다. 이때 안동김씨를 방심토록하기 위해 시정잡배들과 어울려 방탕한 생활을 자행하며 애써 그들의 경계를 피했던 이하응은 조대비 조카인 조성하를 통해 왕실 최고어른인 대왕대비 조씨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이들은 정치적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면서 둘째 아들을 조대비의 양자로 보내겠다는 밀약을 맺었다. 철종이 승하하자 조대비는 서둘러 흥선군의 둘째 아들 명복으로 하여금 익종의 대통을 계승하도록 지명해 그를 자신의 양자로 삼아 익성군(益城君)에 봉하고, 관례를 거행해 왕에 즉위토록 하였다. 


차남인 그가 왕위에 오른 것은 12세의 어린나이였기에 청정(聽政)을 하기 수월했기 때문이다. 조대비는 자신의 뜻대로 수렴청정을 했으나, 곧 흥선군을 [대원군]으로 높이고 섭정을 통해 국정을 총괄하게 하였다. 흥선대원군은 10년의 집정기간 중 척신 세도정치와 붕당의 폐해를 타파하고 당쟁의 근원지인 서원을 철폐하며, 외척을 비롯한 양반세력을 약화시켰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경복궁을 중축하는 과정에서 과중한 노역과 국가재정의 파탄으로 민심이 이반되기도 했다. 또한 천주교 탄압을 지시해 6년 동안 8천여 명의 신자를 학살하였다. 때문에 1866년(고종3) 천주교 박해에 대항해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침범하는 병인양요(丙寅洋擾)가 발생했다.


당시 프랑스군이 강화도의 외규장각을 습격해 약탈해간 의궤서적 297권이 2011년 145년 만에 반환되게 되었다. 같은 해 미국상선이 통상을 요구해왔으나 대원군은 통상수교를 거부함으로써 1871년(고종8) 미국이 무력으로 침략하는 신미양요(辛未洋擾)가 발발하는 등 [쇄국정책]의 정치적 한계를 드러냈다. 



1873년(고종10) 민비는 노대신과 유림을 앞세워 대원군의 하야공세를 폈다. 이로써 대원군이 10년간의 권좌에서 물러나자 고종은 친정(親政)을 선포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 정권은 민비와 그녀의 척족들이 권력을 장악하며 대원군이 그토록 우려하던 민비일족의 [외척정치]가 재연되었다.


이때부터 고종은 민비와 대원군의 세력다툼 속에서 국난을 헤쳐 나가야만했다. 민비세력은 흥선대원군이 취했던 강력한 [쇄국정책]과는 달리 대외개방과 근대 일본의 국교요청을 받아들여 1876년 일본과 [강화도 수호조약]을 맺고 새로운 국교관계를 갖게 되었다. 또한 구미 열강과도 조약을 맺어 통상을 펼치는 개항(開港) 정책을 실행했다. 


illustrator / 정윤정

이러한 [개화정책]으로 새로운 문물을 접하게 되자, 조정은 사대당(事大黨)과 개화당(開化黨)이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민비정권은 1881년 일본에 신사유람단과 수신사를 파견하여 새로운 문물을 시찰하게 하고, 군제를 개혁해 신식훈련을 받은 별기군을 창설하는 한편 부산, 인천, 원산을 개항하는 정책을 펼쳐 [개화문명]을 수용하였다.


하지만 변화를 통해 근대국가를 건설하려는 [개화세력]과 유교적 전통사회를 고수하던 [수구세력]간의 알력으로 구체제를 고집하던 수구파가 척사(斥邪) 상소운동을 일으키며 민비정권을 규탄하였다. 


고종과 민비

이듬해는 구편제(舊編制) 군영소속 군사들이 민비세력의 부당한 처우와 일본식 신군제(新軍制)에 반발하며 임오군란을 일으켜 [개화]와 [수구] 양파간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였다. 1884년에는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 개화파가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목표로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청국의 군사가 이를 3일 만에 진압했다.


이를 계기로 청국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하게 되면서 조선의 자주권은 큰 손상을 입게 되었다. 1882년(고종19) 임오군란 때는 흥선대원군이 [구식군대]의 지지를 받아 궁궐에 들어와 조정을 장악했고, 이를 빌미로 청국은 3천명의 군병을 주둔시키며 반청세력인 [개화파]를 압박했다.



하지만 1884년 갑신정변 때는 궁궐을 습격한 [개화세력]이 [민비세력]을 무너뜨리고 청국과의 종속관계를 청산할 것을 강요하며,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6백 명의 병력을 정변에 이용했다. 이렇듯 고종은 [수구파]와 [개화파]로 인해 왕권에 큰 도전을 받았다. 


1885년(고종22)에는 조선에서 청국의 우월권을 배제하고, 일본도 동등한 세력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청일간의 [톈진조약]이 체결되어 이후 일본이 한반도에 발판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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