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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Dec 20. 2015

조선왕과의 만남(60)

고종릉_02


26대 고종 1852~1919 (68세) / 재위 1863.12 (12세)~1907.07 (56세) 43년 7개월


Source: Chang sun hwan/ illustrator

 

▐  홍릉(洪陵)사적 제207호 /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141-1 (홍유릉 내) 


임오군란 이후 친청화(親淸化)한 [민비세력]은 계속 국정을 장악했지만, 급변하는 동북아 정세에는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안으로는 1894년(고종31) 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 전라도 일대를 장악한 사건이 발생했다. 


고부군수 조병갑이 농민들로부터 과중한 세금을 징수하고 양민 재산을 불법으로 갈취하자, 녹두장군 전봉준은 농민과 동학교도를 이끌고 관아를 습격해 부패 관원들을 감금하였다. 조정은 민란의 책임을 동학교도에게 돌려 옥사를 자행하자 8천여 명이 고부 백산(白山)에 모여 정읍, 고창 및 전주를 점령했다.



조정은 이를 수습하기위해 청국에 파병을 요청했는데 일본도 톈진조약에 따라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면서, 농민군과 조정 간에 강화가 성립되자 [농민군]은 양국의 철병을 요구했다. 이 때문에 청국과 일본은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친일파를 내세워 내정 개혁안을 제시하면서 군병을 궁중에 난입시켜 친청(親淸)인 [민비정권]을 타도하고, 흥선대원군을 영입해 신정권을 수립하게 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노골적인 침략행태에 격분한 전봉준은 손병희와 연합해 재차 봉기를 일으키며, 일본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으나 공주에서 대패하여 교수형에 처해졌다.



1894년 7월 개혁추진을 위한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가 설치되고 영의정 김홍집이 회의총재에 임명돼 조선개국 이래 국가제도를 개혁하는 갑오경장(甲午更張)이 단행됐다. [갑오개혁] 초기에는 하야했던 흥선대원군이 일부 개혁파 추대를 받아 고종으로부터 정치적 실권을 위임받았다. 


하지만 그해 12월 개혁주도 세력과 일본공사는 흥선대원군을 제거하고 갑신정변을 주도했던 박영효를 영입해 김홍집과 박영효의 [연립내각]을 세워 2차 갑오개혁을 추진했다. 이때 ①청국과의 관계단절, ②국왕의 친정준수, ③왕비와 종친의 정치관여 배제 등을 골자로 한 "홍범(洪範) 14조"가 제정됐다.



그러나 [연립내각]의 내부갈등이 심화되고 박영효가 역모사건으로 일본에 망명하면서 개혁이 중단되었다. 청일전쟁이 진행되던 당시 일본은 조선의 노골적인 침략적 간섭과 이권탈취에 혈안이 되어있었다. 이에 대해 고종은 점차 일본을 혐오하게 되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3국(러시아, 프랑스, 독일) 간섭으로 기세가 꺾이자, [민비정권]은 친로(親露)정책을 펴게 되었다. 이에 일본공사 미우라는 1895년(고종32) 일본 자객들을 앞세워 경복궁에 들어가 민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자행했다. 



왕비를 잃은 고종은 일본의 강압으로 폐서인 조처까지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충격적인 왕비 살해사건으로 국제사회가 일본을 비난함에 따라 얼마 뒤 민비의 복위조서(詔書)가 내려지고, 1897년(광무 원년) 명성황후로 추존해 비로소 홍릉에 국장하였다. 


을미사변 이후로 일본은 고종의 명을 받아 김홍집을 중심으로 한 [친일내각]을 구성해 ①태양력 사용, ②종두법시행, ③우체국과 소학교 설치, ④군제개혁, ⑤단발령 등의  제3차 개혁을 추진했다. 하지만 갑신정변으로 청일군병이 한성에 함께 주둔하면서 자주 충돌하게 되자, 이에 충격을 받은 고종은 난국을 타개코자 러시아와 밀약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러한 밀약공작은 청일의 간섭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청일전쟁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에 대해 노골적인 정치간섭을 강화하자, 을미사변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있던 고종은 친로세력과 내통하며 1896년(고종33) 2월 11일 새벽 돌연 궁궐을 몰래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遷)을 단행했다. 


이때 김홍집은 분노한 백성에게 피살되고, 이어 친로(親露) 내각이 구성되었다. 이로써 한동안 고종은 러시아의 보호를 받았지만, 친로내각이 집정하면서 많은 이권이 열강에게 넘어가는 등 국가의 위신이 추락하고 주권침해가 심해졌다.


아관파천 길 (illustrator / 김회룡)

이에 [독립협회]를 비롯한 백성들은 국왕의 환궁과 자주선양(自主宣揚)을 요구하고 나섰다. 1897년(고종34) 2월 러시아와 일본의 협상에 따라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했으며 그해 10월 [대한제국] 수립을 선포하고 황제위에 올라 연호를 광무(光武)라 했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면서 왕실은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겨 생활하고 있었다. 


[경운궁]고종이 거처를 옮기며 전각이 새롭게 건립됐고 황제즉위식 이후에는 정궁(正宮)이 되었며, 1907년 고종순종에게 양위한 뒤 이곳에 살면서 덕수궁(德壽宮)으로 바뀌었다. 아관파천을 통해 고종은 5백년간 이어져온 조선의 허물어진 국권을 회복하고, 근대개혁을 통한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한 본격적인 홀로서기를 준비했다. 



이를 위해 [대한제국]의 새로운 본궁인 경운궁(慶運宮)을 정점으로 황제국을 세워 자주독립국으로 거듭나고자 하였다. 나라안팎으로 혼란스러웠던 격동의 조선말 한없이 불안하기만 했던 백성들은 [대한제국]을 세운 고종의 변화 속에서 잠시나마 희망의 빛을 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고종의 의지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었다. 1898년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정부의 친로정책과 비자주적인 외교에 반대하는 [만민공동회]가 열려 자유 민권운동을 전개하자, 정부는 군과 보부상의 힘을 빌려 이를 진압하고 나섰다. 고종은 1900년 둘째아들을 의친왕, 셋째아들을 영친왕에 봉하고 1901년 순빈 엄씨를 계비로 맞아들였다.


illustrator / 정윤정

1904년(광무8) 러일전쟁이 벌어지며 황제폐립 음모가 발생했고, 일본의 군사적 압력으로 [한일의정서]와 [제1차 한일협약]이 체결되며 한성의 치안권을 일본 헌병대가 장악했다.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마침내 1905년 2차 한일협약인 을사조약 체결을 강요해 이후 외교권을 일본에 수탈당함으로서, 병자호란 이래 최대의 국가존망에 위기를 맞게 되었다. 


고종은 [을사보호조약]을 반대하고 나섰으나 을사오적(五賊)인 친일대신들에 의해 조약이 체결되었다. 당시 청국은 아편전쟁서 영국에게 패하고 급기야 [청일전쟁]에서도 패전한 상태였으며, 러시아 역시 [러일전쟁]에서 패해 물러나 있었기에 고종이 마지막으로 의지한 것은 미국이었다. 



이에 대해 고종을사조약의 무효를 호소코자 1905년 11월 일제의 감시를 피해 청국을 경유해 전 미국공사이자 대한제국의 정부고문이던 헐버트에게 밀서를 보내 미국정부에 전달했다. 그러나 이미 미국이 필리핀을 지배하는 것을 용인하는 대신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화 하는 것을 묵인하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1906년 일본은 통감부를 설치해 본격적인 대행(代行) 정치체제를 갖추고 전반적으로 조선국정을 간여하며 외교권을 박탈했다. 마침내 고종은 1907년(광무11)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리자 대한제국 문제를 국제정치 중심에 호소하고자 밀사 이준 등을 파견하였다. 또한 러시아황제 니콜라스 2세에게 친서를 보내 이들의 특사활동을 지원해주길 요청했다. 


이준 열사

하지만 일본과 영국의 방해로 고종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오히려 군사력을 동원한 일제의 강요와 이완용 및 송병준 등의 매국대신들에 개입으로 한일협약 위배라는 책임을 지고 그해 7월 황태자에게 양위한 뒤 퇴위하게 되었다. 순종이 즉위하면서 고종은 태황제의 칭호를 받았으나 실권이 없었다.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병합하자 고종은 이태왕(李太王)으로 불리며 덕수궁에서 만년을 보내다, 1919년 정월 68세를 일기로 통한(痛恨)의 죽음을 맞이했다. 당시 고종이 일본인에게 독살 당했다는 풍문이 유포돼 민족의 의분을 자아냈으며 국장(國葬)이 거행된 3월 1일 전국각지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날 온 나라에 울려 퍼진 백성들의 함성은 자주독립을 염원하는 민족의 목소리인 동시에 비명에 떠나간 황제를 애도하는 마음이었다. 대한제국 황제 고종의 재위 44년은 역사가 근대사회로 나가는 민족의 격동기였다. 그는 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대한제국]을 세워 광무개혁을 이루고자 했으나 조선왕조의 비극적인 국운을 비켜나지 못하고. 만년에는 나라를 빼앗기는 망국의 군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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