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주 Dec 23. 2015

조선왕과의 만남(61)

고종 비 명성황후 능


26대 고종 비 명성황후 1851 ~ 1895 (45세)


Source: Chang sun hwan/ illustrator


▐  홍릉(洪陵)사적 제207호 /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141-1 (홍유릉 내)


세인들에게 민비(閔妃)라 불러지는 명성황후는 여성부원군 민치록의 무남독녀로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그녀는 철종 2년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나 9세에 아비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살았으나, 소녀시절부터 집안일을 돌보며 틈틈이 춘추를 읽을 정도로 총명해 인물됨이 주변에 알려졌다.


흥선대원군은 지난 60년간 외척에 의해 국정이 농단됐던 세도정치를 뿌리 뽑기 위해 외척이 적은 집안에서 왕비를 택해 왕권의 안정을 도모코자 했다. 때문에 흥선대원군 부인 민씨의 추천으로 16세에 고종 비로 간택되었다. 하지만 민비는 수완이 능란해 입궁 후부터 왕실정치에 관여하며 대원군의 희망과는 달리 시아버지와의 정치적 갈등을 겪었다.


illustrator / 이철원

1866년 민비와 가례를 올린 고종은 자신의 첫 사랑인 궁녀 이씨에게서 먼저 왕자 완화군을 얻었다. 이때 대원군완화군을 원자로 책봉하려 했는데 이에 분개한 민비는 시아버지에 대해 불만을 갖게 됐다. 이후 민비의 아들이 태어났으나 항문이 막혀 5일 만에 요절하자, 자신의 임신 중에 대원군이 산삼을 너무 많이 먹여 항문이 막힌 것으로 오해하며 대원군에 대한 반감이 커지게 됐다.


1880년에는 13세의 완화군이 급질로 사망하자 이번에는 대원군민비를 의심하며 갈등의 골이 깊어지게 됐다. 사실 이들의 사이가 벌어진 배경은 민씨를 중심으로 한 노론세력과 새로 들어온 남인북인을 중심으로 한 세력 간의 정치적 갈등이 주요한 원인이었다.



민비 대원군의 정적인 민승호, 대원군의 형 이최응, 조대비의 조카 조성하, 안동김씨 세력인 김병기 및 유림세력 등과 결탁하여 정치입지를 강화해 나갔다. 당시 서원을 철폐당한 유림(儒林)은 대원군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었다.


1873년 일본에서 대두된 정한론(征韓論)으로 정세가 불안해지고 경복궁 중건으로 민생고가 가중되며 대원군에 대한 원성이 높아지자 민비는 유림의 거두 최익현을 동부승지로 발탁하고, 대원군의 정책과 실정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게 해 물러나도록 했다. 이로 인해 대원군과의 대립이 심화된 가운데 1882년 [민비정국]에 불만을 품었던 [수구파] 중심에 임오군란이 발생하였다.


임오군란

봉량미(俸糧米) 배급의 부조리 문제로 폭동을 일으킨 구식(舊式)군대의 세력을 업고 [수구파]가 군란을 감행하자, 민비는 궁궐을 탈출해 장호원을 거쳐 충주에 있던 민응식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군인들은 운현궁으로 달려가 대원군을 추대했고 이에 대원군은 민비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군인들을 배후에서 조정 했다.


잠적해버린 민비가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자 대원군은 중전의 국상을 선포하고자 했다. 이는 민비가 살아있더라도 대궐로 다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하지만 민비고종에게 밀사를 보내 자신의 건재함을 알리고 청국을 통해 군사지원을 요청하게 했다. 결국 청군의 출병으로 군란이 진압되고, 대원군은 청국으로 압송되게 되었다.



이로써 민비가 대궐로 돌아오고 [민비세력]이 재집권하며 그녀는 친청(親淸)으로 기울어져 [개화파]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때문에 1884년 김옥균박영효 등 급진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켜 개화당(開化黨)에 정권이 넘어갔으나, 또다시 청국군의 개입요청으로 3일 만에 [개화당]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회복하였다.


이때부터 민비는 외교적 국면에 민첩히 대응하며 정치적 수완을 발휘했다. 1885년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견제하던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하자 묄렌도르프를 일본에 파견해 영국과 사태수습을 협상하면서 러시아와도 접촉하게 했고, 청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흥선대원군의 환국을 묵인하는 유연성을 보였다.


갑신정변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일본은 조선을 침략코자 갑오개혁에 간여하면서 청국에서 돌아온 대원군을 내세워 [민비세력]을 몰아내려 했다. 그녀는 일본의 야욕을 간파하고, 일제가 지원하는 [개화세력]에 적극 대항하였다.


하지만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에 주둔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조선정계에 압력을 가하자, 정세가 불리해진 민비는 러시아에 접근하며 [일본세력]을 추방하려 했다. 때마침 3국의 간섭으로 일본에 대륙침략 기세가 꺾이게 되자, 민비의 친로 경향은 더욱 굳어지게 되면서 [친일세력]인 훈련대를 해산시키려 했다.


illustrator / 정윤정

이에 위기감을 느낀 미우라 공사는 조선 침략정책에 맞서는 [민비세력]을 일소코자 친일 정객(政客)들과 함께 을미사변을 계획했다. 1895년 음력 8월20일 새벽5시 일본군과 낭인(浪人)들은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궁궐을 습격하고 민비를 시해한 뒤 정권을 탈취하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 순사들이 담을 넘어 광화문의 빗장을 풀면서 궁궐 경비병과 총격전이 벌어졌으나, 열세를 보이던 수비대가 무기와 군복을 벗어버리고 달아나면서 순식간에 궁궐이 일본군에 의해 장악됐다.



이들은 궁궐의 남쪽 광화문, 북동쪽 춘생문(春生門), 북서쪽 추성문(秋成門) 등으로 침입해 민비가 거처하던 북쪽 건청궁(乾淸宮)을 향해 돌진했다.  민비는 궁녀의 옷으로 갈아입고 궁녀들의 사이에 숨어있었다. 밀실을 수색하던 낭인들은 궁녀들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민비의 행방을 대라며 무지막지한 폭력을 가했다.



기어이 낭인들은 동쪽 곤녕전(坤寧殿)에서 민비를 찾아냈는데 이때 궁내부대신 이경직이 왕비를 보호하기 위해 앞을 가로막다 권총을 맞고 쓰러졌다. 그들은 마룻바닥에 넘어진 민비를 내동댕이치며 구둣발로 짓밟고 칼로 베어 무참하게 살해했다.


45세의 민비는 궁궐 밖으로 옮겨져 그 시신이 불살라지며 비통한 최후를 마치게 되었다. 민비의 시해직후 일본은 "중전 민씨의 국정농단으로 종묘사직이 위기에 봉착했으며 변란 때 달아나 종적을 감췄으니 왕비로서 자격이 없어 서인으로 쫓아낸다"는 폐비조칙을 고종으로 하여금 발표하게 했다.



민비대원군에 의해 폐위되어 서인으로 강등됐다가 그해 다시 복위되며 태원전(泰元殿)에 빈전이 설치되었다. 이후 1897년(광무1) 10월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한 후 명성황후(明成皇后)로 추봉되면서, 그녀의 장례는 2년 만에 다시 국장(國葬)으로 치러졌다. 명성황후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반대하며 격동기에 나라를 개방해 외세를 끌어들여 일본을 물리치려 하였다.


반면에 그녀로 인해 대원군에 의해 척결됐던 외척 [세도정치]가 다시 살아나고, 외세를 불러들여 일본의 침략을 촉진시켰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명성황후는 자신이 직접 정국정면에 나서 지나친 [쇄국]과 급진적 [개혁] 사이에서 중심을 잡고자 노력했고, 당시 열강들 속에서 나라의 주권을 지켜내고자 외교적인 노력을 펼쳤던 한 시대의 여걸(女傑)이었다.



당시 여성 어의(御醫)였던 [언더우드 기록]에는 "그녀는 주로 청국에서 지식을 얻었지만 세계 강대국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나에게 많은 질문을 던졌고 자신이 들은 것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일본을 반대했던 그녀는 나라를 위해 노심초사했던 섬세한 감각을 가진 유능한 외교관이었으며, 아시아의 어떤 왕후보다도 훌륭한 여인이었다."라고 전한다.

 

요절한 두 자식 다음에 낳은 그녀의 차남이 조선왕실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다. 1895년(고종32) 을미사변으로 시신이 불태워진 명성황후는 당초 동구릉(東九陵)의 숭릉(현종)옆에 터를 잡아 장례를 치렀다. 이후 1897년 명성황후로 추봉되면서 그해 11월 국장을 치루고 청량리 밖 양주 천장산(현 고황산) 줄기에 안장돼 능호를 홍릉(洪陵)라 했으나, 1919년 고종이 승하하면서 현재의 남양주 위치로 천장하게 되었다.



두 차례나 천장을 했던 명성황후의 능에는 시신이 없다. 그녀의 재궁(梓宮)에는 생전에 입었던 옷가지만 들어 있을 뿐이다. 시신조차 없는 관(棺)을 두 차례나 천장해야 했던 애통한 황후의 혼령 앞에서 지난날의 통한에 역사가 다시는 이 땅에 재현되지 않기를 기원해 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조선왕과의 만남(60)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