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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Dec 26. 2015

조선왕과의 만남(62)

순종릉_01


27대 순종 1874~1926 (53세) / 재위 1907.07 (34세)~1910.08 (37세) 3년 1개월


The source : ILLUST / Chang sun hwan / illustrator

 

▐  유릉(裕陵)사적 제207호 /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141-1 (홍유릉 내)  


조선시대의 마지막 왕릉인 유릉은 하나의 봉분에 세 명을 합장한 조선왕릉 중 유일한 동봉삼실릉(同封三室陵)이다. 겉보기엔 하나의 봉분으로 이뤄진 [단릉]처럼 보이지만, 그 아래에 순종과 그의 두 왕비가 함께 묻혀있다. 유릉고종명성황후의 무덤인 홍릉과 같은 경내에 있으며 홍릉처럼 황제릉 양식으로 조성돼 있지만 홍릉에 비해 능역규모가 다소 협소해 보인다.


순명황후순종이 즉위하기 전 1904년(광무8) 황태자비 신분으로 33세의 일기를 마감해 이듬해 당시 양주 땅인 용마산 기슭(능동)에 예장되었다. 이후 21년이 지난 1926년 4월 순종이 53세로 승하하자, 그해 6월 홍릉 좌측산 줄기에 안장되면서 순명황후유릉을 천장해 합장하였다.



한일병합 이후 조선이 멸망한 탓으로 왕실 마지막 황제였던 순종의 장례업무는 이왕직(李王職)이란 관청에서 주관했다. 당시 일본의 방해로 순종고종 때와 마찬가지로 황제의 능호를 올릴 수 없었음으로 그 역시 고종과 같은 편법을 사용하였다.


순종이 즉위하기 전에 용마산에 안장되었던 순명황후 묘소 유강원(裕康園)을 황제즉위와 함께 유릉으로 추봉했는데, 순종의 장례 때 황후를 지금의 남양주로 천장해와 순종과 함께 합장하며 황후의 능호를 갖다 쓰게 되었다. 1966년에는 계비 순정황후유릉에 함께 합장됐다. 5백년을 거친 조선왕릉 석물배치와 구조는 오랜 동안 왕실상설제도를 따랐지만, 시대적 상황이나 당대 왕의 의지에 따라 조금씩 변화가 있었다.



[제1기]는 1408년 태조 건원릉에서 1452년 문종 현릉으로 조선 왕릉의 기본형식을 갖춘 시기였다. [제2기]는 1468 세조 광릉에서 1608년 선조의 목릉까지로 석물의 전반적인 배치나 표현상에서 조선왕릉 특유에 조각양식이 확립됐던 시기였고, [제3기]는 1649년 인조 장릉에서 1863년 철종 예릉까지이며 병풍석의 문양이나 장명등의 형태에서 다소의 변화가 있었고 조각의 비례도 바뀌었다.


[제4기]는 황제릉이 조성된 시기로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라 칭하면서, 고종홍릉순종유릉이 황제릉의 형식을 취했다. 황제릉의 가장 큰 변화는 왕릉의 제례(祭禮)를 올리던 정자각이 사라지고 이를 대신하는 침전이 설치된 것이다.



조선왕릉 정자각이 정(丁)자의 형태에서 일(一)자형으로 바뀌고 명칭이 임금의 숙소라는 뜻에 침전으로 변경되었다. 지붕의 형식 또한 [맞배지붕]에서 [팔작지붕]으로 변경됐으며,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건축되고 침전을 오르는 계단이 측면이 아닌 전면에 배치되었다.


능침주변에는 꽃무늬를 새긴 병풍석과 난간석이 둘러져 있으며 능침의 기본석물인 문무인석과 동물상이 능 언덕아래인 침전 앞으로 내려오면서 명나라 황제릉의 영향을 받아 석호석양이 사라지고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등의 다양한 동물상이 침전 앞에 배치됐다. 유릉홍릉의 상설을 따랐지만 홍릉 석물보다 서양식 조각수법이 많이 반영돼 좀 더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인 순종은 고종 11년 창덕궁 관물헌(觀物軒)에서 고종명성황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듬해 2월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882년(고종19) 순명황후 민씨를 세자빈으로 맞았다. 1895년 홍범(洪範)14조 반포와 동시에 왕태자에 올랐고 1897년 [대한제국] 수립과 함께 황태자로 책봉됐다.


1898년 역관이던 김홍륙고종을 위해(危害)할 목적으로 고종과 태자가 즐기던 커피에 독약을 넣었는데 고종은 냄새가 이상하여 마시지 않았으나 태자는 커피를 마시고 피를 토한 채 쓰러졌다. 이후 순종은 치아가 망실되고 혈변을 쏟는 등 심한 몸살을 앓기도 했다.



1904년 세자빈으로 맞이했던 민씨가 사망하자, 1906년 새로이 윤씨를 황태자비로 맞이하였다.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의 실패이후 일본의 협박과 친일대신들의 강요로 황위에서 물러나게 된 고종의 양위를 받아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한 순종은 연호를 융희(隆熙)로 고쳤다.


순종은 자식이 없던 관계로 이복동생 영친왕을 황태자로 책봉하고 황실궁을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겼다. 당시 다른 이복동생인 의친왕의 자식이 있었기에 조카를 양자로 입적해 황태자로 삼을 수 있었지만 고종후궁인 엄귀비의 계략으로 그녀의 아들인 영친왕을 태자로 봉했다.      


고종과 순종

이무렵 일본은 [러일전쟁]을 통해 한반도에서 다른 열강세력을 몰아내고 대한제국의 후견국임을 자처하며 한일병합의 발판을 다지고 있었는데, 이때 이토 히로부미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3년여 간에 걸친 순종의 재위기간은 일본에 의한 한반도 무력강점 공작으로 국권이 점진적으로 제약되는 시기였다.


또한 일제를 비롯한 이완용송병준 등의 매국세력에 야합으로 518년의 조선왕조가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되면서 마지막 민족의 주권을 수호하려는 거센 저항이 일어났던 통한(痛恨)의 시기였다. 순종이 즉위한 1907년 7월 일본은 이른바 한일신협약(丁未七條約)을 강제로 체결시켜 종래의 고문정치제도를 폐지하고 국정전반을 일본통감이 간섭할 수 있도록 정부각처의 차관(次官)을 일본인으로 임명해 내정간섭을 강화했다.



동시에 대한제국 군대를 재정부족이라는 구실로 강제 해산시켜 한민족의 자위조직마저 와해시켜 버렸다. 같은 해 12월에는 황태자가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의 인질로 잡혀갔고, 1908년에는 동양척식회사의 설립을 허가해 경제침탈의 길을 열어주었다.


1909년 7월에 군부를, 10월에는 법부(法部)를 각각 폐지해 정부조직의 일부를 통감부 기능 속에 흡수했으며 기유각서(己酉覺書)에 의해 사법권마저 강탈했다. 이처럼 순종을 허수아비 황제로 만들어버린 이토 히로부미가 본국으로 돌아간 후 군부출신인 데라우치가 조선통감으로 부임해 온 뒤로 일본은 [대한제국]의 숨통을 끊고자 더욱 거센 공작을 폈다.


일제는 1909년 7월 각의에서 "한일합병 실행방침"을 통과시킨 뒤 대한제국과 만주문제를 러시아와 사전 협상하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만주에 파견하였다. 그가 하얼빈에서 안중근에 의해 포살(砲殺)되자, 이를 기화로 일본은 한반도 무력강점을 실행에 옮겼다.



일제는 친일세력 등을 중심으로 한 매국단체 일진회를 앞세워 조선인이 일본과 병합을 원한다는 미명(美名)하에 협박과 매수로 1910년(융희4) 8월 22일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해 대한제국을 멸망시키고, 한반도를 무력 강점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야만적인 침략행위에 대해 순종즉위 전부터 이에 대항하는 의병투쟁이 있었으며 당시 주권회복을 위한 애국 계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순종은 매국 대신들과 친일 내통자들에 둘러싸여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도 못한 채 특별한 저항의사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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