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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Dec 27. 2015

조선왕과의 만남(63)

순종릉_02


27대 순종 1874~1926 (53세) / 재위 1907.07 (34세)~1910.08 (37세) 3년 1개월


Source: Chang sun hwan/ illustrator


▐  유릉(裕陵)사적 제207호 /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141-1 (홍유릉 내)


순종이토 히로부미에게 문충공이란 시호를 내렸는데 조선의 유림(林)과 의병장 등의 독립 운동가들에게는 별다른 관심을 표명하지 않았다. 또한 도쿄에서 열린 이토 히로부미의 국장식에 민병석 등의 조문사절을 참석 시켰으며 [대한제국] 황실을 대표해 이토 가족에게 은사금(恩賜金)으로 10만원을 전달한 반면, 이토 저격사건으로 사형된 안중근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일제는 무력을 앞세워 노골적인 침략을 강행했고 친일 매국세력의 암약으로 민족의 저항역량이 저해됨으로써 망국에 이르게 되었다. 당시 일제는 순종에게 합병협약(乙巳脅約)에 공식서명할 것을 강요했으나 순종이 조약에 끝까지 동의하지 않자, 내각 총리대신인 이완용이 대신 서명하였다.


을사협약도(乙巳脅約圖)

이로써 [대한제국]은 일본에 합병되었으며 결국 일제의 강점 하에 나라의 종언(終焉)을 고한 뒤 조선왕조의 치세를 마감하게 되었다. 순종은 황제에서 왕으로 강등돼 일제가 내린 이왕(李王)의 직위를 받고 일본 천황가에 편입되어 [이왕가]를 구성하였다.


그는 풍전등화의 격랑속에서 유약함과 무능으로 일관하다가 3년이란 짧은 치세를 마감하며 폐위돼 창덕궁에 거처하며 망국의 한을 달래야만 했다. 1926년 4월 25일, 조선의 27대 마지막 황제인 순종은 백성의 어버이로서 사무친 통한에 심경을 유언으로 남겨놓고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에서 53세로 숨을 거두었다.



『구차히 산지 17년, 종사에 죄인이 되고 2천만 생민(生民)의 죄인이 되었으니 한 목숨이 꺼지지 않은 한 잠시도 이를 잊을 수 없다. 깊은 곳에 갇힌 몸이 되어  말할 자유가 없이 금일에 이르렀으나, 지금의 병이 위중하니 한 마디 말을 않고 죽으면 짐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리라.


이 조칙을 중외에 선포하여 병합이 내가 한 것이 아님을 백성들이 분명히 알게 되면 이전의 소위 병합 인준과 양국의 조칙은 스스로 파기에 돌아가고 말 것이리라. 백성들이여, 노력하여 광복하라! 짐의 혼백이 어둠속에서 여러분을 도우리라.』 그날의 신문에는 "5백년 종사의 마지막 황상(皇上) 승하"라는 제목의 기사가 전면을 장식하였다.


illustrator / 정윤정

그해 6월 10일 발인 일에 순종의 국장행렬이 유릉을 향해 창덕궁 돈화문을 나서 종로 단성사 앞을 지날 때 황제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보러나온 수많은 군중 속에서 수천 장의 격문이 날아오르며 "대한독립만세!"라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마지막 황제의 장례식인 인산례(因山禮) 기해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백성들이 순종의 마지막 유언을 알 수는 없었지만, 마지막 국왕의 죽음은 백성들의 독립에 대한 욕망을 더욱 고조시켜 전국적으로 6.10 독립 만세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이는 3.1 운동만큼 확산되지는 못했지만 그의 유언대로 온 백성이 한마음으로 노력하여 비로소 1945년 8.15 광복을 맞게 되었으니, 이제 그의 혼령이 평안히 잠들어 있기를 기원해 본다.    



27대 순종 원비 순명황후 1872~1904(33세)


순명황후 민씨는 여은부원군 민태호의 여식으로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1882년(고종19) 11살의 나이에 세자빈으로 간택되었고 1897년 [대한제국]의 수립에 따라 황태자비로 책봉되었다. 남편인 순종이 황제로 즉위하기 전인 1904년(광무8) 경운궁 강태실(康泰室)에서 태자비 신분으로 33세의 일기를 마감하였다.


순명황후에 대한 기록은 그다지 남아있는 것이 없어 알려진 것이 별반 없지만, 그녀의 이른 죽음에 대해서는 을미사변 때 받은 충격으로 위장병을 앓다가 죽음에 이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황현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 의하면 "1904년(고종41) 음력 9월 28일 황태자비 민씨가 승하하니 이때 33세였다.



황태자(순종)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불구자인지라 우울하게 세월을 보내던 황태자비는 화병에 걸려 매일 경대와 책상을 때려 부셔 학부대신 민영소가 하루에 하나씩을 새로 들여보냈다. 이렇게 몇 년을 지내자 핏덩이가 응어리졌는데 의관이 잘못 진단하여 태기가 있는 것으로 알았다. 그래서 보약을 계속 복용하다 승하한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그녀가 명성황후의 시해(弑害)로 정신적 충격을 받은 일 외에도 자신의 혈육을 갖지 못했던 이유로 심한 우울증을 앓았던 것으로 보인다. 황태자비로 사망했기에 당초 경기도 양주 용마산 내동(現 어린이대공원 경내)에 안장돼 묘호를 유강원(裕康園)이라 하고 시호를 순명비(純明妃)라 하였다.


어린이대공원 유강원 터의 석조물

서울 광진구 능동 [어린이대공원] 내에 있는 유강원 터에는 당시 능 주위에 세웠던 석등을 비롯한 문인석과 석마, 석양, 석호 등의 20여기에 석조물이 남아있다. 1907년 순종이 황제에 즉위함에 따라 순명황후로 추존되었고 이때 능호도 유릉(裕陵)으로 바꾸었다. 1926년 순종이 승하하자 남양주 금곡동으로 옮겨져 순종과 합장되면서, 순명황후유릉을 그대로 사용하게 되었다.


27대 순종 계비 순정황후 1894~1966(73세)


순정황후 윤씨는 해풍부원군 윤택영의 여식으로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1904년 황태자비인 민씨가 사망하여 1906년(광무10) 13살의 나이에 황태자 계비로 책봉돼 이듬해인 1907년 순종이 즉위하자 황후에 올랐다. 당시의 자자한 소문에는 그녀의 아비가 고종의 후궁인 귀비 엄씨에게 거액의 뇌물을 바쳐 간택되었다는 풍문이 나돌기도 했다.


윤택영박영효 및 이재각(사도세자 현손)과 함께 일본정부로 부터 후작(侯爵) 작위를 받은 친일 인사였다. 하지만 순종이 즉위하자 고종 후궁인 황귀비(皇貴妃) 엄씨이토 히로부미의 계략으로, 엄씨의 소생이자 고종의 일곱째 아들인 영친왕이 황태자로 책립되었다.


당시 세론(世論)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이자 귀인 장씨의 소생인 의친왕의 아들을 놔두고, 형제로 황실의 계통을 잇는 것이 불가한 일이라 하며 영친왕을 황태제(皇太弟)로 부르기도 하였다. 황후궁에 여시강(女侍講)을 두기도 했던 순정황후는 1910년 국권이 강탈될 때 덕수궁에 갇혀있던 고종에게 전화를 걸어 다급한 상황을 전하려 했지만 이미 일본군에 의해 전화선로가 차단돼 연락을 할 수 없었다.



이때에 옥새 함을 들고 회의장으로 향하는 내시를 보고 따라가 병풍 뒤에 숨어 어전회의가 진행되는 것을 엿듣다 친일대신들이 한일병합조약에 날인하려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옥새를 치마 속에 감추고 내주지 않았는데, 결국 백부였던 윤덕영에게 강제로 빼앗겼다.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제에 의해 피탈된 후 순종의 지위가 이왕(李王)으로 격하되면서 그녀도 이왕비가 되었다. 1926년 순종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홀로 남겨진 순정황후는 창덕궁 대조전에서 낙선재로 거처를 옮기고 이후 일제강점기과 1945년 광복에 이은 1950년 6.25전쟁 등  모진역사에  질곡의 세월을 지켜봐야 했다.


illustrator /  이철원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그녀는 창덕궁에 남아 황실을 지키고자했다. 당시 57세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궁궐에 들이닥쳐 행패를 부리던 인민군을 크게 호통 치며 내보냈다는 일화가 남아있다. 하지만 이듬해인 1951년 국군의 전세(戰勢)가 위급해지자 미군에 의해 피난길에 올랐고, 이후로 궁핍한 생활을 영위하다가 1953년 휴전을 맞으며 환궁하려 하였다.


하지만 [대한민국] 초대대통령 이승만은 황실의 부활과 순정황후에 대한 국민의 관심 등으로 자신의 정치적입지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것을 우려해 그녀의 환궁을 거부함에 따라, 결국 그녀는 정릉의 수인제(修仁齊)로 거처를 옮겨야했다. 구황실의 사무총국장인 오재경(吳在璟)의 노력으로 1960년 환궁하게 되었고, 1962년 일본에서 정신 장애인이 되어 귀국한 덕혜옹주 및 영친왕 일가와 함께 창덕궁 낙선재(樂善齋)에서 지내게 되었다.


1960년 환궁하는 순정황후(윤비)

죽는 날까지 곧은 성정과 기품을 잃지 않았던 순정황후는 조선의 마지막 황후로써 여걸다운 당당함으로 황실을 이끌어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순정황후는 타임지를 읽을 정도로 면학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국문학과 불경연구에 열정을 쏟기도 했다.


만년에는 평생의 고독과 비운을 달래기 위해 불교에 귀의하여 대지월(大地月)이라는 법명을 받았으며, 1966년 2월 창덕궁 석복헌(錫福軒)에서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녀는 경기도 남양주 소재 유릉순종과 합장되면서 비로소 73세의 고단했던 삶을 내려놓게 되었다.


유릉(裕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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