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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Dec 30. 2015

조선왕과의 만남

에필로그


▐  현대사를 함께한 조선의 마지막 황실일가 


고종의 일곱째 아들이자 순종의 이복동생인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王: 李垠)은 1897년 태어났으며 순헌황귀비 엄씨의 소생이다. 1900년 英王에 책봉되었다가 1907년(융희1) 황태자에 책봉됐으며 일제강점기에 통감으로 부임해 온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11세에 강제로 일본에 끌려가 교육을 받고 일본국왕 메이지(明治)의 조카인 마사코(李方子)와 정략결혼을 하였다. 


1910년 국권피탈로 순종황제가 폐위되자 왕세제로 불렸고 1926년 순종이 승하하자 허위(虛位) 계승자가 되어 이왕(李王)이라 했으며 일본의 육군 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육군중장에 이르렀다. 1945년 8·15광복 후 귀국하려 했으나 국내 정치실세들의 반대로 귀국하지 못했다.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

몰락한 일본왕족에서 제외돼 거처와 재산을 몰수당하고 고난의 세월을 보내다, 1963년 박정희 국가재건회의 의장에 주선으로 국적을 회복해 56년 만에 부인과 함께 귀국했다. 이후 국가보조금으로 생활하며 뇌혈전증과 실어증으로 병상에 시달리다 1970년 74세의 생을 마감하여 남양주시 [홍유릉] 내에 있는 영원(英園)에 안장되었다. 영원은 조선왕릉의 형태로 조성해 원침에는 난간석을 두르고 문무인석과 석마를 배치하였다. 


미망인 이방자 여사는 창덕궁 낙선재에서 생활하며 1967년 사회복지법인 명휘원(明暉園)을 경영했다. 영친왕의 유지를 받들어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정박아 교육과 지체장애자들의 생계유지를 위한 기술교육 등 육영사업에 정성을 쏟았다. 그녀는 자신의 조국과 묻힐 곳이 한국이란 신념으로 봉사에 전념해 오다가 1989년 89세를 일기로 사망하여 [홍유릉] 경내 영친왕 묘소에 합장됐다. 


영친왕 영원(英園)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 사이에는 두 아들이 있는데 첫째 아들은 생후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고 둘째 아들 이구(李玖)는 멸망한 황실의 마지막 황세손이다. 1931년생인 이구는 어린 시절을 일본에서 머물다 1953년 미국유학을 떠나 매사추세츠 공과대학 건축과를 졸업한 뒤 뉴욕의 건축사무소에 입사하여 1959년 8살 연상인 미국인 여성과 결혼하였다. 


1952년 발효된 대일강화조약에 따라 그의 국적은 일본에서 한국으로 바뀌었지만 대통령 이승만의 반대로 한국에는 입국할 수 없었다. 1963년 11월 부모와 함께 귀국해 창덕궁 낙선재에 머물렀으며, 1965년부터 서울대학교와 연대학교 등에서 건축설계를 강의했고 건축설계회사 트랜스아시아의 부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1973년 사단법인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총재에 추대되고 같은 해 신한항업주식회사를 설립했지만 사업에 실패하고 1979년 일본으로 떠났다. 그는 슬하에 친자(親子)없이 1982년 부인 멀록과 이혼하고 1996년 영구 귀국해 종묘대제를 주관하는 등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의 명예총재로 활동했다.


조선의 마지막 황세손 이구는 2005년 7월 도쿄 아카사카 프린스호텔에서 75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창덕궁 희정당에서 영결식이 열렸으며 남양주 [홍릉] 뒤편 영친왕 잠들어있는 영원(英園) 옆의 회인원(懷仁園)에 예장되었다. 


황세손 이구 묘소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李堈)은 1891년(고종28) 의화군에 봉해지고 1894년 대사자격으로 일본에 건너가 청일전쟁의 승리를 축하하고 이듬해 특파대사로 영국을 비롯한 유럽 6개국을 차례로 순방했다. 1899년(광무3) 미국에 유학, 의친왕에 봉해졌으며 1905년 귀국해 육군 부장과 적십자사 총재 등을 지냈다. 


한일병합 후 일제에 타협하지 않고 독립 운동가들과 가까이하며 1919년 대동단 최익환과 협의, 상하이 임시정부로 탈출하기 위해 상복차림으로 변복하고 만주 안둥(安東)까지 갔으나 일본군에 발각되어 강제 송환되었다. 


    

1919년 11월 상하이 망명을 도모하면서 임시정부에 밀서를 보냈다는 내용이 "독립신문"에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 후 여러 차례 일본으로부터 건너올 것을 강요당했으나 거부하며 끝까지 일본을 배척하는 정신을 지켰다. 이후 일제로부터 부여됐던 공작지위를 박탈당하며 감시에 시달려야 했다. 


의친왕은 이후 주색에 빠진 광인으로 가장해 일제감시의 눈을 피해 살았다. 1940년 창씨개명 때도 그는 이를 거부하였다. 광복이후 임정(臨政)요인들이 환국하자 김구김규식 등과 면담하였으나 해방정국에서 그는 별다른 정치적 의사표현은 삼가하였다. 


의친왕 이강(李堈)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자 황실부활을 배척하던 이승만 정책에 의해 고난의 세월을 보내다 6·25전쟁을 겪었다. 그 후 사동궁 별궁에서 거주하다가 1955년 8월 16일 서울 종로구 안국동의 별궁에서 79살의 나이로 타계하여 남양주 [홍유릉] 경내에 안장돼 의친왕 묘로 남아있다. 


의친왕의 비(妃)인 김수덕 여사는 14세에 의친왕과 결혼했으며 1910년 국권피탈 이후 망국의 원한으로 주색에 빠졌던 광포한 의친왕을 정숙과 인내로 시중하였다. 광복이후 서울 성동구 화양동에서 살다가 1960년 민주당 정권 때 처소를 궁정동 칠궁(七宮)으로 옮겼으며 1964년 8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여 남편과 함께 잠들어 있다. 



의친왕은 6명의 후궁과 그 밖의 여인들 사이에서 12남 9녀를 두었다. 12남 중 4명이 생존해 있으며 이석(10남)을 제외하고 모두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격동의 세월이던 1912년 고종과 귀인 양씨의 사이에 막내딸로 태어난 덕혜옹주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비운의 삶을 살았던 조선의 마지막 황녀다. 


고종의 승하 후 1925년 유학이란 미하에 일본으로 끌려가 쯔시마 섬 도주 후예인 다케유키와 강제 결혼을 하면서 타국에서 의지할 곳 없이 홀로 외롭고 힘든 세월을 보냈다. 자신이 낳은 외동딸이 자살한 뒤로 삶에 의욕을 잃어버린 채 정신병원에 갇혀 지내다 1955년 이혼하게 되었다. 


일본의 패전과 함게 찾아온 광복이후에도 조국의 외면 속에 힘든 삶을 살아오다 1962년 귀국했으나 세인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 진 채 실어증과 지병으로 온갖 고초를 겪었다. 1989년 낙선재에서 7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해 [홍유릉] 경내에 묻혔다.



이석(李錫)은 1941년 서울 출신으로 아버지는 고종의 서자인 의친왕(이강)이고 어머니는 홍정순이다. 그는 어린 시절을 서울의 사동궁에서 보내는 등 왕실생활을 경험했다. 창경 초등학교를 거쳐 경동중고를 나와 한국 외국어대 서반아학과에 입학하였다. 


1962년 미8군 무대 가수채용에 합격해 노래를 부르다 이듬해 워커힐에서 영어로 사회를 보며 팝송을 불렀고 그 뒤 가수로 데뷔했다. 대학졸업 후 주변의 반대에도 가정생계를 꾸리기 위해 가수로 데뷔해 두 차례 음반을 냈으며 "비둘기 집" 등의 히트곡을 내기도했다. 1966년에는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였으나 군복무 중 차량전복사고로 크게 부상해 귀국하였다.  



1979년 샌디애고 한인회장의 초청으로 관광비자로 미국을 방문해 로스앤젤레스에서 수영장 청소, 경비 등의 일을 하다가 라스베이거스에서 한국계 미국여성과 결혼했다. 1989년 이방자 여사의 장례식 이후 귀국해 2000년에는 총선에 출마하기도 했으며 이후 한때 찜질방에 거처하다가 2004년 10월 전라북도 전주 한옥마을 승광재(承光齋)에 입주하였다. 


2005년부터 전주대학교 사학과 객원교수로 있다. 1970년 결혼했으나 이듬해 이혼했으며 1979년 셋째부인에게서 아들을 낳았으나 현재 별거 중이다. 2011년 6월 19일자 워싱턴포스트(WP)에 "왕자의 이야기(The Prince's Tale)"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려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전하면서 한국의 궁궐과 궁중음식 등을 함께 소개했다. 


마지막 황손 이석(李錫)

이 신문은 이씨가 대한제국의 황손으로 그의 형제가 무려 20명이 넘는다고 설명했다. 89년 귀국 후 갈 곳이 없어 9차례나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고 이씨는 WP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전북 전주시의 도움으로 거처를 구한 뒤 지금은 강의를 다니면서 생활하고 있지만 그는 인터뷰에서 "전주생활도 좋지만 앞으로 상징적인 군주제가 복원되어 궁궐에서 관광객들을 만나면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 


모진역사 속에서 그의 70년 인생이야기는 곧 우리자신의 거울임을 되새겨봐야 할 듯싶다. 조선 왕릉에 관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해 1년이란 시간이 지나며 초고(草稿)를 마감했던 날이 때마침 광복 66년을 맞는 날이었다. 중학시절 광복20년 라디오 드라마가 기억에 생생한데 실로 많은 세월이 흘렀다. 


Source: Pack si  baek/ illustrator

2012년 임진(壬辰) 해는 임진왜란이 발발(勃發)한지 420년이 되는 해이자, 새로운 국가지도자를 선택하는 해이기도하다.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 화합을 통해 흩어진 민심을 추스르고 통합을 이루는 계기가 돼야할 것이다. 그동안 원고를 써나가는 도중 간혹 지리했던 시간들이 없지 않았지만, 한편으론 그리 길지도 않았던 시간들이었던 것 같다. 


30여 년간 앞만 바라보며 쉼 없이 달려왔던 어제의 삶을 접고 은퇴가 주는 여유로움 속에서 왕릉을 돌아보며 자신만의 물감을 풀어 조선왕조의 이야기를 덧칠해 보았다. 원고를 쓰기위한 여러 자료를 찾아 역사 속에 살아있는 선조들을 둘러보며 그들의 인생을 통해 행복한 삶의 의미와 조건을 다시 한 번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었다. 


또한 시작할 때 반신반의했던 집필완성을 통해 나름 새로 시작하는 후반 인생설계에 대한 방향과 자신감도 되찾게 되었다. 이제는 욕심을 내려놓은 평심을 유지해가며 가슴 한 귀퉁이에 남아있는 불씨를 되 지피고자 다짐해본다. "이순(耳順)을 향한 열정적 삶을 위하여!"  - 壬辰年 이월 열 닷샛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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