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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Jun 02. 2016

유월의 고궁 산책

■ 유월의 古宮 산책


2014년 6월 고교동창 주관으로 창덕궁과 창경궁을 돌아볼 수 있었다. 당시 창덕궁후원 관람은 1일 예약인원이 10명으로 제한돼 있고 1회 100명 이내의 관람이 허용되는 등 입장조건이 까다로웠기에 단체관람을 주관했던 동창회 노고에 깊은 사의(謝意)를 표했다. 당일 촉박했던 관람일정과 초여름 더위로 함께 나눌 수 없었던 역사의 숨결을 간략히 기술해 본다. 


518년의 긴 역사를 간직한 조선의 궁궐은 경복궁 및 창덕궁, 창경궁, 경운궁(덕수궁), 경희궁 5개가 있다. 조선의 正宮은 경복궁이었지만, 제11대 중종은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에서 거주하기도 했고, 1592년 임진왜란 이후에는 창덕궁을 정궁으로 사용했으니 조선의 정궁은 마땅히 경복궁창덕궁 두 곳이라 할 것이다.



불행한 역사 속에서 탄생한 창덕궁


1392년 조선을 창건한 태조 이성계는 1395년 경복궁을 완공한 후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였다. 하지만 3년 뒤, 후계자 지명으로 불거진 1차 왕자의 난(1398년)으로 왕위에 오른 정종은 형제들 사이에 벌어진 살인의 현장인 한양이 싫었기에 다시 개경으로 천도를 하였고, 1400년 왕위를 계승한 태종은 한양으로의 천도를 강력히 희망했지만, 그 역시 형제간에 피로 얼룩졌던 경복궁으로 돌아가는 것을 께름칙하게 생각했다. 


태종은 정궁인 경복궁의 화재나 전염병으로 사용하지 못할 때를 대비한다는 명분을 들어 이궁(離宮)인 창덕궁을 세우도록 지시한 후, 1405년 비로소 한양으로 재천도 하였다. 이렇듯 창덕궁은 왕위를 둘러싸고 왕자들 사이에 벌어진 비극에서 탄생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과정에서 경복궁은 궁궐로써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다가 세종 조에 이르러 정치가 안정되면서 조선왕조의 법궁으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정궁인 경복궁이 유교예법에 따라 일직선상에 질서정연하고 웅장하게 배치돼 있는 반면, 창덕궁은 각 전각들이 자연지형과 공간의 크기에 따라 제각기 다른 형태로 저마다의 위치에 어울려 세워져 있으며 정원과 나무가 자연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숙종이 축조한 애련지(愛蓮池)와  애련정(愛蓮亭)

자연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는 후원 


특히 북쪽에 있는 후원은 인공연못과 건축물들의 설계가 자연과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모두가 자연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나지막한 언덕을 따라 계곡과 어우러진 숲과 정원은 전혀 눈에 거슬림이 없이 자연그대로를 보는 듯 느껴진다. 후원은 임금을 비롯한 왕족들이 휴식하던 정원으로 고종 이후 비원(秘苑)으로 불리었다.


후원에는 부용정주합루, 불로문, 애련정, 관람정, 존덕정 등을 비롯한 수많은 정자와 연못이 곳곳에 있다. 첫 번째 마주친 부용정(芙蓉亭)은 정조 때 지어진 정자로 열십(十)자 모양의 독특한 평면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우측 연못 부용지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부용정(芙蓉亭)과  불로문(不老門)

연못 북쪽에는 정조가 언덕 위에 세운 2층 누각이 우뚝 서있는데, 누각 1층은 규장각이고 2층이 주합루(宙合樓)이다. 이어지는 곳은 통자의 돌을 깎아 세운 불로문이 나오는데 이는 임금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고 있는 곳이다. 


불로문 안쪽에는 애련지(愛蓮池)로 불리는 연못과 애련정이 세워져 있는데, 숙종은 애련정기(愛蓮亭記)를 통해 “연꽃은 더러운 곳에 있으면서도 굳고 깨끗이 지조를 지키는 군자의 덕을 지녔다”하여 정자이름을 지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어 연못모양이 한반도를 닮았다는 반도지(半島池)를 찾아 아름다운 곡선에 부채모양의 관람정(觀纜亭)을 들러본 후, 육각정자로 지어진 존덕정(尊德亭)에 머무르는데, 이중으로 올린 육각지붕이 매우 독특하다.


반도지 연못과 아름다운 곡선 부채모양의 관람정(觀纜亭)

존덕정은 천정이 우물정자로 구성되어 있고 가운데 황룡과 청룡이 장식돼 있으며, 정조의 글이 빽빽이 새겨진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 현판이 눈에 띠는 곳이다. 


정조의 한이 서려있다는 현판 글은 탕평정책과 더불어 외척의 발호를 잠재우고 국정안정과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려했던 심정을 나타낸 글로써, “백성이 만천이라 하면 하늘에 비친 달은 왕이니 달빛이 만천을 비추듯 왕의 은덕이 모든 백성에게 고루 비치도록 지고(至高)한 왕정을 추구하겠다.”는 의미를 엿볼 수 있다.  


정조의 현판이 걸려있는  존덕정(尊德亭)

창덕궁의 상징인 인정전과 슬픔을 간직한 낙선재


창덕궁의 출입문인 돈화문을 지나 금천교를 건너면 인정전이 우뚝 세워져 있는데, 인정전(仁政殿)은 창덕궁을 상징하는 정전(正殿)으로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보다 규모는 작지만 이곳에서 왕의 즉위식이 열리고 외국의 사신을 맞이하는 등 조선의 공식행사가 열렸던 장소였다. 


대조전은 왕과 왕비의 침실이자 왕자와 공주를 교육시켰던 전각이었지만, 창덕궁의 어떤 건물보다도 수난이 많았던 건물로 1910년 마지막 어전 회의가 열렸던 곳이다. 이때 어전 회의에서 조선의 주권을 일본에 빼앗긴 한일병합이 결정돼 518년 역사에 조선왕조가 막을 내리게 된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이기도한 곳이다. 


창덕궁 동쪽 끝에 위치한 낙선재(樂善齋)는 헌종이 사랑하는 후궁을 위해 마련한 공간이었는데, 낙선재도 역시 순종의 둘째 아들이자 비운의 마지막 황태자로 왕위에 오르지 못했던 영친왕이 1963년 일본에서 귀국해 이방자 여사와 함께 살다 생을 마감한 슬픔을 간직한 곳으로 남아있다.


창덕궁의 정전(正殿)인  인정전과  낙선재

숱한 비운을 겪었던 창경궁     


창경궁은 조선왕조 중 가장 화려한 여성편력을 갖고 있는 성종의 재임 15년에 완공된 궁이다. 성종은 그 유명한 연산군의 어미였던 폐비윤씨의 일화가 유명한 임금으로 야사에는 성종이 어우동과 함께 유흥을 즐겼다는 설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성종은 세종과 더불어 대왕이란 칭호를 받을 만큼 많은 치적을 남긴 임금이기도 하다. 


성종은 세조 조에 시작된 경국대전을 완성함으로써 조선은 성종 조에 비로소 법치를 세운 완성된 국가를 이루었다. 당시 성종은 12명의 부인을 거느렸던 정력가였기에 폐비윤씨는 규방출입이 잦은 성종을 투기하다 쫓겨나 끝내 사약을 받기도 했다.     


창경궁은 원래 1418년 세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생존해 있던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지은  수강궁(壽康宮) 터였다. 그 후 조선 9대 임금인 성종이 대비전의 3사람에 어른이던 세조 비(정희왕후), 덕종 비(인수대비), 예종 계비(안순왕후)를 모시기 위해, 수강궁을 대규모로 확장하면서 1484년 창경궁을 창건했다. 


당시 세조 비는 성종의 할머니요, 덕종 비는 성종의 어머니였고, 예종 계비는 성종의 작은 어머니였다. 이후 창경궁은 창덕궁의 보조 궁궐로 자리 잡게 됐지만 조선의 왕들은 이곳을 정궁으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연못중앙 기울어진 소나무가 아름다운 부용지와  규장각

조선왕실의 상징성을 격하시킨 창경궁


조선의 대표적 궁궐인 경복궁과 창덕궁창경궁은 파란만장했던 조선왕조의 역사 속에서 많은 수난을 겪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궁궐이 불에 타 소실되었고, 전란이 끝난 후 궁궐복구를 시작했다.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는 곧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후손 자택을 확장한 뒤 경운궁(덕수궁)으로 명하여 임시정궁으로 사용했다. 


선조는 전란으로 인한 국가재정의 궁핍뿐만 아니라, 경복궁 터가 좋지 않아 2차례의 왜란을 겪었다고 생각했던지 경복궁을 복원하지 않은 채 창덕궁만을 복원하도록 하였다. 이후 광해군 때 창덕궁과 창경궁이 복원되고 이어 광해군은 이궁인 경희궁과 별궁인 인경궁을 세웠으나, 1624년 인조반정의 공신책봉에 불만을 품었던 이괄이 난을 일으켜 창덕궁과 창경궁은 또다시 소실되었다. 


이때 인조는 9년간 경희궁에 머물며 광해군이 인왕산 밑에 지어놓은 인경궁을 헐어 창덕궁과 창경궁을 재건하는데 사용하였다. 그 후 순조 조인 1830년에 큰 화재가 발생해 3번째 중건이 이뤄졌으며, 현재 남아 있는 전각들은 대부분 이때 세워진 것이다.   


짧은 시간이 못내 아쉬웠던 고궁해설

하지만 1907년 조선의 마지막 황제였던 순종이 즉위하자, 일제총독부는 순종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창경궁의 전각을 헐고 1909년에 그 자리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었다. 그 뒤 1911년에는 궁궐의 이름을 창경원으로 바꾸어 조선의 왕권과 왕실의 상징성을 격하시켰다. 


1945년 해방 후에도 창경원은 1970년대 까지 줄곧 서울의 대표적 유원지로 이용되었다. 이후 1984년부터 과천 서울대공원을 새롭게 만들어 창경원에 있던 동물들이 대공원으로 옮겨가면서 비로소 1986년 창경궁은 제 모습을 찾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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