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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Nov 21. 2016

평범하지만 가장 위대한 아버지


□  평범하지만 가장 위대한 아버지


2014년 연말 한해를 마무리하며 들러본 영화 국제시장은 오직 가족을 위해 평생을 굳세게 살아온 우리시대 아버지들의 이야기를 다룬 이야기였다.


한편의 영화는 1945년 해방 이후 참혹했던 남북전쟁을 겪으며 폐허 속에 너무나도 가난하고 힘들었던 1950년에서 1970년으로 이어졌던 지난시절 우리 아버지, 어머니세대의 암울했던 시대적 배경을 되돌아보게 한다.


    

조선조 5백년은 왕권을 수호하기 위해 등용했던 공신과 척신(戚臣)의 귄력부패로 중종이후 개혁세력 사림이 등장했으나, 얼마안가 그 유림(儒林)마저 사색당파로 갈렸다. 선조 조 이후  당파로 인해 300세월 간 망국을 자초했던 때가 불과 100년 전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혼미한 정국이 이어지는 요즘 사색 당으로 나뉘어 자신들의 권력만을 선점하려는 정치인들을 지켜보며 근세기 국치(國恥)와 한국전쟁의 무한고통을 묵묵히 이겨냈던 시대별 위대한 아버지들을 다시금 떠올린다.


국제시장은  격변의 현대사를 관통하며 눈부신 산업화시대 도약을 일궈온 전후(戰後)시대 한 남자의 일대기를 통해 세월의 뒤안길로 서서히 사라져가는 부모세대들을 영화 속 주인공으로 그려내고 있다. 부모와 자식들이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줄거리가 전개되는 내내, 관람하는 이로 하여금 뭉클해지는 감동을 넘어 가슴을 저리게 한다.



영화가 시작되며 눈가에 이슬이 맺히더니 끝날 때까지 가슴으로 흐느끼며 진한 감동에 빠져들었다. 영화의 내용은 1950년 12월24일 흥남부두 철수로부터 시작되는데, 남북전쟁이 발발한 그해 10월 국군과 유엔군은 38선을 넘어 두만강라인 국경까지 북진한다.


하지만 11월말 중공군의 반격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흥남에 집결해 철수를 시작했다. 적군의 공격으로 한미사단이 2차례 출항을 감행하자, 철수소식을 들은 북한주민 10만명이 흥남부두로 몰려들었다. 이때 수송선 빅토리호에 타고 있던 통역관 현봉학이 선장을 설득해 병기와 군수품을 모두 내리고 9만여명의 피난민을 구출했다.  

   

이 와중에 배에 오르지 못한 아버지를 뒤로하고, 주인공 덕수는 12월 25일 거제도를 거처 부산에 정착하며 실향의 고달픈 삶을 살아간다. 고향을 북(北)에 두고 혈혈단신으로 피난 온 사람들뿐만 아니라 피난길에 가족을 잃고 목 놓아 울던 이산(離散)에 아픔은 어느덧 옛날 얘기로 잊혀져가며 그저 늙고 한 맺힌 할배와 할매의 공허한 넋두리로 사라지게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머물며 잠시 선친(先親)을 떠올려 본다.



나의 아버지(1918년)는 조부가 거주하던 회양군 신안면을 떠난 20세에 김화군 통구면 소재 금융조합을 다녔다고 한다. 광복이 되자, 28세 장사를 시작해 자금을 모아 전답을 사들여 회양군 사동면에 백부의 가족을 이주시키고 외아들을 맡겼다 한다.


당시 아버지는 젊어 사별한 부인에게서 자식이 있었기에 그 아들을 돌봐줄 수 있도록 백부에게 집과 전답을 마련해 주었다. 오랜 세월 홀아비생활을 해왔던 아버지는 어느 날 철원군에서 한약방을 하셨던 외할아버지 댁에 침을 맞으러 왔다가 맏딸인 어머니를 보고 청혼을 했다가 퇴짜를 맞았다고 한다.


光復年, 조선공산당이 창설되고 이듬해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설립되며 사유재산 몰수조짐이 보이자, 아버지는 임시정부수립을 위해 신익희 선생이 이끄는 청년정치위원회에 가담해 활동하다, 북한정치국 요원에게 발각돼 수감소에 갇혀있던 중, 기적적으로 탈출해 1949년 월남한 뒤 호시탐탐 고향에 갈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고 한다.



탈옥한 아버지는 야밤을 틈타 백부 댁에 들러 이복형에게 곧 데리러 오겠노라 약속하며, 울고있는 어린 자식을 등 뒤로 하고 고향을 떠나왔다고 한다. 하지만 이듬해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고향에 갈수 없었던 아버지는 여기저기 고향땅 피란민들을 통해 이북 가족소식을 물었다 한다.  


하지만 애타게 기다리던 백부가족 소식 대신 어머니가 뚝섬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한걸음에 한강으로 달려가 어머니 가족을 챙겨 수원으로 피난시켰다고 한다. 1950년 전쟁이 시작되자  철원 외조부는 폭격에 돌아가시고, 외조모와 이모 세 식구는 재봉틀 하나 짊어지고 피란길에 나서 아버지를 만나자 의지할 곳 없던 모친은 결혼을 승낙했다 한다.


정전(停戰)협정이 되자, 할머니는 다시 고향인 철원으로 돌아가 홀로 지내셨다. 당시 선친은 수감소에 있을 때 모진 고문을 당했던 악몽으로 개명을 하고 나이까지 바꾸며 북에서의 자신에 흔적을 모두 지워버렸다. 간혹 고문 후유증인 허리 통증으로 많은 고생을 하셨던 아버지 기억이 아스라하다.   



어느새 환갑을 넘어선 반백의 내가, 지금도 40대 모습의 아버지 사진을 바라볼 때면 항상 가슴이 뭉클해지는 까닭은 아버지라는 그 이름만으로도 사무치게 그립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 생전에 많은 대화를 나눴던 기억은 없지만 해가 거듭될수록 아버지의 무게는 내가 갖추지 못한 큰 자리로 느껴진다.


한때는 아버지의 그림자조차 쫓지 않겠다던 젊은 시절도 있었건만, 어느새 내가 그 아버지를 똑같이 닮아 있고 나의 훈육에 구시렁대던 자식들도 나를 닮아가고 있는 듯해 보인다. 지난날 강원도 회양 고향산천을 지척에 두고, 늘 외로운 실향민으로 살아오셨던 선친에게서  내가 평생 들어본 노래는 오직 [꿈에 본 내 고향]뿐이었다.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 저 하늘 저 산 아래 아득한 천리. 언제나 외로워라 타향에서 우는 몸, 꿈에 본 내 고향이 마냥 그리워" 노랫말 자체가 아버지 자신의 기막힌 넋두리였기에 평생 이 망향가 한 곡만을 간절하게 부르셨을 것이다.

    


대한적십자를 통해 선친의 혈육을 찾아도 봤지만 끝내 선친은 가족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듣지 못한 채 1998년 영면(永眠)하셨다. 이후 나는 강산에 [라구요]를 좋아하게 됐는데, 이는 아버지의 회한을 간접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젓는 뱃사공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 노래만은 너무 잘 아는 건 내 아부지 레퍼토리. 그 중에 십팔번이기 때문에. 고향생각 나실 때면 소주가 필요하다 하시고, 눈물로 지새우시던 내 아부지 이렇게 얘기했죠. 죽기 전에 꼭 한번만이라도 가봤으면 좋겠구나, 라구요.


눈보라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 가보지는 못했지만, 그 노래만은 너무 잘 아는 건 내 어무이 레퍼토리. 그중에 십팔번이기 때문에. 남은 인생 남았으면 얼마나 남았겠냐 하시고 눈물로 지새우시던 내 어무이 이렇게 얘기했죠. 죽기 전에 꼭 한번만이라도 가봤으면 좋겠구나, 라구요..."     



영화 속 주인공 "덕수"가 파독광부를 거쳐 월남전에서 돈을 벌었던 내용처럼, 남북전쟁을 겪은 후 일자리가 거의 없었던 한국은 경제발전을 위한 해외 원조가 절실했었다.


당시 국가재건 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은 1961년 미국을 방문해 케네디대통령을 접견하고 차관을 얻어내기 위해 월남파병을 제안했지만 군사쿠데타를 못마땅해 했던 케네디의 냉대로 빈손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박대통령은 독일 정부가 보내온 비행기를 타고 서독으로 달려가, 분단으로 갈라진 두 나라의 동병상련을 호소하며 파독광부와 간호사들의 임금을 담보로 3천만 달러의 차관을 빌려왔다.


이로써 1963년 500명 파독광부를 모집했는데 3년계약에 월160달러의 높은 수입이 보장되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독일로 가기를 희망했으며 1977년까지 8,400여명의 광부가 독일석탄광산에서 일했다. 또한 1966년부터 10년간 1만 여명의 간호 인력이 독일에 파견돼 총 2만 여명의 인력이 외화벌이에 기여한 셈이었다.



60년대 초 당시 광부파견은 2차 세계대전이후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육체노동력 부족사태를 겪던 독일 정부와 경제개발정책에 따른 외화 부족사태를 해결하는 것이 절실했던 한국 정부의 이해가 부합돼 이루어진 조치였는데 박대통령은 독일에서 차관을 들여와 경제개발을 추진하고 싶었지만 마땅히 담보로 세울 것이 없었다.


따라서 고육지책으로 독일에 광부와 간호사들을 보내고 그들의 월급을 담보삼아 차관을 들여왔다. 당시 광부와 간호사들에게 주어진 일은 힘들기 그지없었는데, 파독광부들은 지하 1,000m 막장에서 몸을 사리지 않고 석탄을 캐야했으며, 광산작업경험이 없던 노동자들은 크고 작은 부상과 후유증에 시달렸다.


간호사들도 처음엔 일반병원 간호업무가 아닌 호스피스 병동에서 죽어가는 환자를 돌보며, 사망한 환자를 씻기거나 시신 입관업무를 주로 담당하는 등에 힘든 일을 도맡았다.



광부 파견 이듬해 대통령 내외는 독일정부가 제공해준 항공기를 타고 탄광촌을 방문해 250여명의 광부와 간호사들을 위로했는데, 연설도중 말을 잇지 못하던 대통령이 끝내 눈물을 흘리자 강당은 온통 눈물바다가 됐고, 당시 파독 노동자들은 박 대통령과 육영수 영부인의 눈물을 잊지 못한다고 한다.


이어 한국은 1965년부터 1973년까지 8년 동안 베트남전에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인 32만 명을 파병했다. 당시 한국 정부는 청룡부대와 맹호부대 등의 전투부대 파병으로 고용증대와  달러획득이 밑거름이 돼  대한민국 경제기초를 닦는데 큰 역할을 했다.


한국군 월남 참전은 5천여 명이 전사하는 큰 희생을 치렀지만 주월 한국군은 탄약 등의 군 장비를 이양 받아 한국군 전력증강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베트남 전쟁으로 고엽제라는 후유증이 아직도 남아있지만, 지난날 파독 광부와 간호사 및 주월 파병들의 눈물 젖은 월급은 한국으로 송금되어 가족의 생계비와 학비로 쓰여 졌다.



국가적으로는 이들의 외화획득으로 1967년 포항제철과 울산공업단지, 1968년 경부고속도 건설이 시작되며, 오늘날 세계경제 10위권으로 성장하는데 초석이 되었다. 영화의 배경이 된 국제시장은 전후당시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보급품을 팔았던 시장으로 양키시장이라 불리기도 했던 곳이다.


50년 대 피란민들의 삶에 터전이었던 국제시장은 가난했던 일상에서 서로 부대끼며 미래에 대한 꿈과 통일에 희망을 일궈왔던 공간으로, 가장 평범한 우리 아버지들의 삶과 가난했던 선배 세대들의 50~60년대 눈물 젖은 유년기 시절을 거쳐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뤄온 가장(家長)들에 진솔한 애환을 담고 있다.     



영화는 너무나도 빠르게 발전해 가는 시대 속에 조금은 천천히 느린 걸음으로 변해가는 재래시장을 배경으로, 잠시 과거로 회귀하는 진한 향수를 느끼게 한다. 또한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온 전란(戰亂)세대의 이야기를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네 삶을 재조명해 본다.


우리사회에서 아버지란 존재가 평생 돈만 벌다가 퇴직하는 순간, 고개 숙인 남자로 비하되고 있는 요즈음,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처럼 이 땅에서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우리 자신들이 대한민국과 가족들 앞에서 보다 당당해질 수 있기를 바래본다.   




내 시대 통일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자식들이 할아버지 고향 산천을 찾아보도록 관련정보를 기록해 놓는다. 해방 후 회양군 신안면 사동면창도군 신안리사동리로 바뀌고, 김화군 통구면창도읍으로 승격됐다.    

                   


강산에 [리구요] 평양공연  (아래주소 클릭)

https://www.youtube.com/watch?v=fJJkJSNgFm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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