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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Sep 17. 2015

백두산 등척기(02)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 역사


■  백두산 등척기(登陟記) - 백두산정계비 역사


2015년 환갑의 나이가 되어 비로소 찾아 나선 백두산(2,744m)은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자, 한민족의 영산이라 불리는 우리 민족의 성지임에 틀림이 없어 보인다. 우리세대는 동해물과 백두산으로 시작되는 애국가를 부르며 시퍼런 위용을 자랑하는 백두산 천지의 사진을 국가상징으로 여기며 성장해왔다.


남북분단의 엄혹한 현실 속에 중국을 통해 오른 천지를 경이로운 가슴으로 호흡하고 돌아왔지만, 백두산을 둘러싼 역사적 현실을 착잡한 심경으로 등정기를 통해 정리해본다. 백두산의 기원은 역사적으로 그 형태와 특색에서 이름이 붙여졌다. 



5천여 년 전 대량의 연회백색 부석(浮石)이 분출돼 주위에 쌓여 흰색이 됐고, 흰 눈에 덮인 날이 많아 백두산 주위에 사는 사람들은 산이 희다하여 태백산, 백두산 장백산으로 불러왔다 한다. 하지만 우리역사에서 백두산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아 보인다.


더욱이 고려이전 역사를 전하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백두산 이야기를 찾기 힘들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태백산이 백두산이라 하지만 일연(一然)은 태백산을 묘향산으로 지칭한 듯 해, 삼국시대는 백두산의 인식이 부족했던 것 같다.


개마현의 압록강이 백두산에서 발원한다고 기록 된 중국문언이 있지만, 고려 성종이 여진을 두만강 이북과 백두산 이북으로 내몰았다는 기록(고려사절요)으로 보아 이 시기에도 백두산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조선조에는 장백산을 함께 사용했는데, 숙종실록에는 호인(만주족)들이 백두산이라 부른다는 기록이 있고, 중국도 청나라 중기 지도에 백두산이라 표기한 흔적이 있다고 한다.


(출처 : 사진작가 / 임성환 / 前 기업은행 지점장)

그렇다면 백두산이 언제부터 우리민족 성지로 자리 잡았는지의 기록은 영조 43년 “백두산은 아국조종(我國祖宗)이요 북도(北道)는 국조발상지지(國朝發祥之地)”라고 하여, 갑산부 80리 운룡이북 망덕평에 각을 세워 백두산을 망사(望祀)했다는 기록정도이다.


하지만 백두산이 성지로 여겨지기 시작한 시기는 대체로 조선 건국시기일 것으로 추정해본다. 조선시조 이성계는 자신의 고향인 함경도 경흥을 국가의 뿌리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이후 한반도의 국경이 정해진 것은 조선 초기 세종 시기였다. 


당시 활발한 북방정책으로 4군6진을 개척하며 두만강유역과 압록강 중류가 확실한 국가영토로 편입되었다. 따라서 이시기에 비로소 백두산이 국경선의 대상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18세기 중국에는 만주지역의 여진족이 세운 금(金)과 청(淸) 왕조가 있었다. 금은 흑룡강 유역에서 일어나 백두산과 무관했지만, 청은 백두산을 시조의 발상지로 삼았다. 따라서 후금을 건국(1616년)한 [누루하치]는 백두산을 청 왕조의 뿌리로 지목했다.


명(明)을 멸망시키고 청을 건국한 여진족은 만주에 있는 조상의 발상지인 간도지역을 17세기 중반부터 봉금지역으로 정해 민간출입을 금지했다. 이후 청의 [강희제]는 통치가 안정되자, 조선과 청간의 국경안정을 필요로 1712년(숙종 39년) 국경협의를 하며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



당시 국경협의 사정임무를 띠고 나아갔던 접반사 “박권”과 함경감사 “이선부”는 늙고 허약한 몸으로 험준한 백두산을 오를 수 없어 중간에서 뒤쳐졌다. 따라서 조선은 하부관리 6명만이 청의 파견관들과 산간험지를 동행해 백두산 천지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정계비는 “목극등”의 뜻대로 진행되고 백두산 장군봉과 천지로부터 남동쪽 4Km지점에 세워지며 서쪽은 압록과 동쪽은 토문(土門)으로 하며, 이 분수령을 비석에 새겨 기록한다 하였다. (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 勒石爲記)     


당시 정계비의 해석대로라면 토문강(土門江) 동북쪽인 간도지역은 조선의 영토였던 것이다. 이후 토문강의 해석을 놓고 양국은 대립했는데 조선은 정계비 설치에 참여치 못해 불리하게 책정됐다 주장한 반면, 중국도 당시 제반정세에 어두워 정계비가 불리하게 세워졌다며, 양국은 정계비가 서로 불리하게 됐다고 주장하였다.


18세기 후반 청은 토문강과 두만강 사이의 간도지방을 조선으로부터 빼앗으려는 간계를 꾸몄다. 즉 중국어로 토문강과 발음이 비슷한 도문강(圖們江)이라는 이름을 새로 만들어 두만강을 도문강이라 불렀다. 


그리고 백두산정계비에 있는 토문강이 도문강(두만강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후 1934년 연길시 작은 동네 회막동을 도문 시(圖們市)로 개명하고, 두만강이 예전부터 도문강이었던 것처럼 위장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의 입장에서는 정계비 위치로만 놓고 볼 때 백두산 최고봉인 [장군봉]과 [천지]를 우리 것이라 주장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면 백두산 영유를 둘러싼 국경확정은 왜 이리 늦은 시기에 이루어졌을까? 


그 이유는 백두산이 당시 활화산이었기 때문이었다. 9세기경 백두산 폭발로 발해가 멸망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백두산은 16~17세기에 걸쳐 3번이나 폭발했고 이런 상황에서 백두산 정상의 국경선 확정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백두산정계비 설치이후 조선인의 북간도 진출은 활기를 띠어가고 조선정부는 간도지역에 관리를 파견하기도 했는데, 이 시기에도 백두산에 대한 어떤 점유나 조치를 했던 흔적은 찾아보기는 힘들다.   


이후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 승리와 1905년 러시아를 제압함으로서, 대한제국을 강압해 만주진출을 꾀했다. 일제는 1909년 중국과 간도협약을 맺으며 백두산정계비에서 문제가 됐던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확정지어 북간도를 중국에 넘겨주는 대신에 만주철도 부설권을 얻는 만행을 저질렀다.


간도협약은 제1조에서 "청-일 정부는 도문강을 청-한 양국의 국경으로 하고, 정계비를 기점으로 양국을 경계로 할 것을 성명(聲明)한다."고 했다. 일제는 간도협약을 통해 북간도를 팔아먹고 백두산 최고봉과 천지를 팔아먹은 셈이다. 



하지만 중국도 이 간도협약이 무효이며 중국에 불리하게 맺어진 국경조약이라는 주장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이후 1950년 한국전쟁으로 북한이 궁지에 몰리며 중국위상이 강화되자 북한의 간도영유권 주장도 흐지부지됨으로서 한국전쟁은 영토문제에 큰 악영향을 미쳤다. 


3년간의 전쟁으로 북한은 중국에 요구하던 간도영유권 문제의 주도권을 잃었고 1962년 북-중간에는 비밀리에 국경 변계조약을 체결했다. 이는 “김일성”과 “주은래”가 맺은 백두산 국경확정 조약으로 백두산 정상의 55%를 북한령으로 45%를 중국령으로 하는 조약으로 1986년 북한과 중국은 다시 실측을 통해 국경을 구획했고 1990년 백두산 정상부근에 21개의 경계표시석을 세워 국경을 확정지었다. 


따라서 현재 국경선은 백두산 천지주변의 봉우리 16개 중 최고봉인 장군봉(병사봉) 포함한 9개 봉우리가 북한령으로 돼 있다. 이러한 사실은 2000년에서야 그 내용이 알려졌다. 현재 중국에 속한 백두산지역은 개발사업이 한창인데 중국은 백두산을 중국영토로 세계에 알리는데 여념이 없다. 


원래 백두산은 그저 변방의 알려지지 않은 산으로 중국인들에게는 너무나 멀고도 낯선 곳이었다. 하지만 “등소평” 개혁개방 이후 경제성장을 위해 정치안정 필요성이 커지자, 중국은 변방지역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소수민족의 역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는데 광분하게 됐다.


백두산도 1990년 등소평 방문을 기화로 중국 10대 명산으로 지정하고 관광을 독려하고 있다. 이로 인해 백두산 북부지역이 조선족 자치주에서 분리돼 [길림성 삼강시]로 편입되면서, 안타깝게도 백두산은 점차로 중국내 조선족과는 인연이 없는 땅이 돼버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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