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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Sep 17. 2017

장가계 기행(01)

장사로 향하는 소고


■  장사로 향하는 소고(小考)


장사(長沙; 창사)는 장가계로 가기 위한 관문이다. 창사市가 속해있는 후난성의 총 면적은 한반도면적(223,000㎢)과 비슷하다. 후난성의 양자강 중류지역을 잇는 지역에는 중국에서 두 번째로 큰 둥팅호(洞庭湖: 제주도 2배)가 있는데, 이 담수호를 중심으로 후난성(湖南省)과 후베이성(湖北省)의 경계가 나뉘어져 있다.

     

지금껏 삼국지(三國志)의 지명이 남아있는 창사(長沙)는 3000년의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곳으로, 후난성의 경제중심지로 발전하고 있는 도시(縣)이다. 또한 서울과 직항노선이 연결된 장사는 삼국지의 흔적을 찾아 나설 수 있는 역사기행의 주요 거점이기도 하다.    


  

장사공항에서 출발해 관광 고속도로를 따라 후난성 서북부로 308km(4시간)를 가면 장가계에 도착한다. 또한 적벽(치비)으로 가는 길에 고속도로를 타고 160km 웨양市로 2시간을 달리면 둥팅호 호안(湖岸)에 위치한 웨양로우(岳陽樓)가 나오는데, 그곳에  소교의 무덤(小喬之墓)이 있다.

     

웨양에서 고속도로로 90km 쯤 가다가 국도로 빠져 40km쯤 가면 적벽(湖北省 赤壁市)에 이른다 한다. 이렇듯 삼국지의 고장인 후난성의 창사(長沙)와 후베이성의 우한(武漢), 징저우(荊州)에는 동오(東吳)의 손견 일가(一家)에 흔적들이 남아있고, 제갈량주유의 계략으로 조조가 대패했던 적벽대전의 현장이 자리하고 있다.



장사는 춘추전국시대 초(楚)나라 영토였으며 진(秦)나라 때는 36군의 하나로 장사군(長沙郡)이 설치됐으며, 한(漢)나라 때는 형주북로(荊州北路)에 속했고 수(隋)와 당(唐) 나라를 거쳐 청(淸) 나라에 이르기까지 담주(潭州)의 중심으로서 발전해 왔다.     


근대에는 후난과 후베이를 잇는 교통의 요지로 일찍부터 도시로서 발달해왔으나 중일전쟁의 전쟁터가 되어 많은 문화재가 소실되기도 했다. 1950년 이후 유적 발굴결과, 초묘(楚墓)의 영향이 한대까지 계속된 목곽묘가 다수 발견되고 전한(前漢)초기 3기의 분묘에서 3,000여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한다.


장사(長沙)는 184년(中平 원년)에 장각이 황건의 난을 일으키자 강동(江東)의 호랑이로 불리던 손견(孫堅)이 토벌군에 참여해 난을 진압한 공으로 태수(太守)를 제수 받았던 곳이다. 후한(後漢)말 영제(靈帝)가 죽은 뒤 동탁이 권력을 잡고 횡포를 부리자 각지의 제후들이 동탁을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이때 손견은 동탁 군을 격파하며 진군해 동탁이 머물고 있는 낙양을 위협했다. 동탁이 낙양에 불을 지르고 장안으로 퇴각하자, 낙양성에 진입해 역대 황제릉을 보수하며  전국옥새를 손에 넣은 손견은 192년(初平 3년) 형주(荊州)의 유표를 공격하다 현산 기슭에서 유표의 장수인 여공의 군사가 쏟아 부은 돌에 맞아 전사했다.


후베이성(湖北省)의  형주성(荊州城)

형주(荊州, 징저우)는 유비가 촉한을 세우기 위한 근거지를 마련했던 형주성이 남아있는 곳이다. 장가계가 후난성과 후베이성의 서쪽경계 끝자락에 위치한 반면, 형주는 동쪽 중앙경계 후베이성 쪽에 속해 있다.  


유비는 215년 형주 땅의 영유문제를 놓고 손권과 대립하다가 결국 형주 동남부의 강하(江夏, 현 武昌), 장사(長沙), 계양(桂陽)을 오나라에 넘기고 말았다. 웨양(악양, 岳陽)에 묻혀있는 소교(小喬)는 삼국지의 동오(東吳)에 장수인 주유(周瑜)의 부인으로 언니와 함께 미색이 출중해 여포의 연인 초선과 함께 당대 최고의 미인자매로 꼽힌 여인이다.


언니인 대교(大喬)가 손책(孫策, 손권의 형)에게 시집가고 동생 소교는 오나라 대도독인 주유에게 시집을 갔다. 제갈량은 오나라를 움직이기 위해  주유에게 조조가 오나라를 쳐서 소교를 유린할 것이라고 자극하였다.      


조조는 오나라를 친 후 소교를 얻어 하북에 동작대(銅雀臺)라는 궁전을 세우고 소교를 노리개로 삼는다면 소원이 없겠다고 호언했기 때문이다. 촉한의 유비는 이 과정에서 주유가 이끄는 오 군사에 힘을 빌려 적벽대전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삼국지연의에서 "적벽대전(赤壁大戰)"은 이야기의 중간쯤에 나온다.


삼국을 이루는 과정에서 적벽이 갖는 의미는 상당히 크다. 삼국지 중간에 적벽이 나오는 것은이 싸움을 통하여 천하삼분(天下三分)을 의미하는 삼국정립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당시 가장 큰 위세를 지녔던 조조의 패퇴는 강남에서 손권이 이끈 오나라의 위세를 정립시켰고, 유비가 형주를 얻게 되는 계기가 됐다.


삼국적벽고전장(三國赤壁古戰場)

적벽대전은 진정한 위(魏), 촉(蜀), 오(吳)의 삼국(三國)이 성립되게 되는 과정이었다. 또한 유비진용 내부에서는 객(客) 신세에 머물던 제갈량이 적벽에서 대패한 조조군의 퇴로인 화용도(華容道)에 관우를 배치함으로써, 관우와 헤게모니 싸움에서 제갈량이 관우를 꺾을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옛 기록에 의하면 고대 중국에는 수많은 전쟁을 치루며 출세와 성공을 이뤘지만 마지막을 비극으로 마친 영웅들이 많았다. 진의 멸망 후, 초패 왕 항우를 멸하고 한나라 고조가 된 유방에게 창업공신인 장량, 소하, 한신 삼걸(三傑)이 있었다.


유방은 한신을 초왕에 봉했으나, 공신들이 황제자리를 탐내 역모를 꾀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해 한신을 좌천시키고 세력을 빼앗아 버렸다. 유방이 공신들을 죽이기 시작하자, 이미 낌새를 알아차린 장량(張子房)은 춘추시대의 월나라 재상이었던 범려가 남긴 토사구팽(兎死狗烹)의 고사(故事)를 떠올리며 관직을 내어놓고 첩첩산중에 숨어들어 화를 면했던 곳이 장가계였다.


때문에 이곳에 장량의 대가족이 마을을 이루며 살게 되었고, 이후 후손들이 집단촌을 이루게 되어 장씨 가문의 경계구역임을 나타내는 장가계(張家界)란 지명이 생겨나게 되었다. 무더위를 견디고 뒤늦게 떠나는 여름여행은 여행사의 일정에 맞춰 장가계원가계의 풍경구를 둘러본다지만,


왠지 여행길에 오르기 전부터 경이롭다는 여행지의 풍광 보다는 장사(長沙) 주변지역에 걸쳐있는 삼국지 역사기행에 더 많은 관심이 기울여진다. 금차 여행은 사전준비 없이 떠나는 여행이지만 기회가 주어진다면 많은 자료를 준비해 삼국의 영웅호걸들에 흔적을 찾아 떠나는 멋진 기행을 계획해보며, 아쉬운 마음으로 장사를 향한 여행길에 오른다.       - 壬辰年 구월 열 사흗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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