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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Jan 11. 2019

간략 삼국지(05)

떠오르는  조조


☐  전운(戰雲)속에 커가는 영웅들     


동탁의 무리였던 이각, 곽사, 장제, 번주 등 네 장수는 수천의 군사를 이끌고 서량(서북변방)에 머물며 왕윤에게 사자를 보내 지난날의 용서를 청했다. 하지만 왕윤이 동탁잔당에 대한 토벌령을 내리자, 이각의 무리들은 왕윤이 서량의 백성들을 모조리 주살하려한다는 거짓소문을 퍼트리며 잡군을 끌어들여 10만 대군을 끌어모은 후 [장안]으로 쳐들어갔다. 


이에 여포왕윤의 지시에 따라 이숙을 데리고 출진했다. 이숙의 군대는 첫 싸움에서 동탁의 사위인 우보를 물리쳤으나, 승리감에 도취돼 무방비로 잠든 사이 우보군의 기습을 받았다. 여포는 패주해온 이숙을 단칼에 베어버린 후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가 적진을 제압했다. 


사태가 불리해진 이각은 계책을 꾸며 산속으로 여포를 유인한 후, 일부 군사를 장안으로 진격시켰다. 산중 전투에서 패한 여포가 진퇴양난 속에서 허둥대는 동안 장제번주의 무리들은 폭도로 돌변해 장안성으로 쳐들어가 닥치는 대로 백성들의 목을 베어 죽였다. 



장안으로부터 급사(急使)의 파발을 받은 여포는 군사를 수습해 장안으로 진군했으나 이미 장안은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여포는 망연자실하여 장안성을 단념한 채 군대를 해산하고 원술이 있는 [남양]을 향해 말을 몰았다. 여포가 떠난 후 장안성에 남아있던 헌제 선평문의 누대에 올라 이각곽사를 향해 꾸짖었다. 


성 밖의 이각 무리는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왕윤을 넘겨받는 조건으로 회군할 것을 제의했다. 이를 지켜보던 왕윤은 문루 아래로 뛰어내려 반란군의 수장을 꾸짖고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 이각과 곽사는 또다시 벼슬을 요구하며 자신들이 장군에 봉해지자 비로소 군사를 물렸다. 


이로써 동탁에게 농락당하던 천하의 대권이 다시 동탁잔당의 손아귀로 넘어갔다. 이각곽사가 조정을 제멋대로 휘두르자 전국곳곳에서 군웅들이 봉기하기 시작했다. 제일먼저 헌제의 밀서를 받은 [서량]태수 마등과 [병주]자사 한수가 10만 대군을 일으켰다. 


마등(馬騰) / 한수(韓遂) 

양군의 싸움이 시작되면서 마등의 아들 마초가 달려 나와 적장들을 베어버리니 반란군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이각곽사는 성문을 굳게 닫고 싸움을 피하며 차일피일 시간을 끌었다. 서량군의 양초가 점차 떨어지고 지친 군사들의 사기가 허물어지자 마등한수는 군사를 물려 퇴각하게 되었다. 


기회를 엿보던 이각의 군사들이 돌아가는 서량군을 뒤쫓자 퇴각군들은 도망치기 바빴다. 이때 번주한수를 사로잡았으나 동향(同鄕)이란 정리(情理)로 풀어주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이각은 전승을 자축하는 자리에서 번주의 목을 베 버리고, 그의 군사들을 장제의 휘하에 들게 하였다.      


장제(張濟) / 번주(樊稠)

☐  떠오르는 태양 조조(曹操)     


이각곽사마등한수를 꺽은 후 한동안 한(漢)의 조정은 안정을 찾는 듯 했으나 [청주]에서 또다시 수십만의 황건적이 일어나 노략질과 살생을 일삼았다. 이에 이각곽사는 산동의 를 천자에게 천거했다. 


지난날 조조는 [형양]에서 참담한 패전을 격은 후 떠돌아다니다, 황건적이 동군에 출몰할 때 태수의 청을 받아 의병을 이끌고 황건 무리들을 무찔렀다. 이때 원소는 후일 조조의 힘을 빌리기 위해 조정에 표를 올려 조조를 [동군]태수에 봉했다. 이럴 즈음 조정에서 황건적을 토벌하라는 영이 내려온 것이다. 


조조(曹操)

조조는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며 출진한지 1백일 만에 30만의 포로를 잡고 황건적을 완전히 소탕했다. 진동장군에 오른 조조는 1백만 대군 중 정예병을 뽑아 주력군을 만들고, 산동일대를 중심으로 영웅호걸과 전국인재를 모았다. 


이때 순욱은 [기주]태수 원소의 그릇이 크지 않음을 알고 조카 순유를 데리고 조조를 찾아갔다. 이들의 잇따른 천거로 조조주변에는 정욱과 곽가 같은 인재가 모이고, 우금과 전위 등 용맹한 장수들이 모여들면서 진영의 군사가 강화됐다. 


순욱(荀彧) / 정욱(程昱) / 곽가(郭嘉)

우금은 활쏘기를 비롯한 무예가 출중했고, 전위는 80근의 양지철극을 나무막대기 휘두르듯 돌리며 말을 달리는 천하장사였다. 조조는 휘하에 수십만의 군사와 수백의 장수를 비롯한 모사들을 거느리게 되면서 시선을 천하로 돌리게 되었다.   

    

우금(于禁) / 전위(典韋)

조조는 천하를 다투기 전에 일가를 근거지로 불러들이기 위해 응소에게 명을 내렸다. 조조의 일가족이 연주를 향하던 중 서주태수 도겸이 성 밖으로 나와 축하잔치를 베풀고 휘하의 장수와 5백의 군사를 주어 호송토록 했다. 일행이 산중에 당도하자 천둥번개를 동반한 사나운 가을비가 내렸다. 


일행은 비를 피해 산사(山寺)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한 후, 조조의 가족만 안으로 들이고 호송군은 바깥 회랑에 머물게 했다. 그날 밤 비에 젖어 잠을 청해야 했던 군사들은 불만을 갖고 흉악한 비적으로 돌변해 조조의 가솔을 모두 도륙하고는 재물을 실은 수레를 이끌고 사라졌다. 이때 살아남은 사신 응소는 후환이 두려워 원소에게 몸을 의탁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조조는 통곡하다 혼절하고 말았다. 며칠 후 조조는 흰 상복을 입은 채 대군을 이끌고 [서주]를 진격해 가는 곳마다 무고한 백성을 죽였다. 이에 피눈물을 흘리며 한탄하던 늙은 서주태수 도겸조조에게 나아가 예를 갖춰 자신의 억울함을 알렸으나 역부족임을 깨닫고 성안으로 되돌아갔다. 


도겸은 계책을 세워 [해] 공융과 [청주]의 전해에게 원병을 청했다. 공융은 진병을 준비했으나 돌연 수만의 황건적이 북해로 쳐들어와 성을 에워싸자, 당황한 공융은 유비에게 원군을 요청하는 글을 써 태사자로 하여금 전달케 했다. 그날 밤 태사자는 포위망을 뚫고 말을 달려 [평원현]으로 향했다.      


공융(孔融) / 전해(田楷)

☐  유현덕의 출진      


공융의 서찰과 태사자의 말을 들은 유비는 평원현을 청주자사 전해에게 부탁한 뒤 3천의 군사를 이끌고 [북해]로 떠났다. 성 밖 황건적의 적장과 관우가 수십 합을 어우르다 적장의 머리채가 떨어져나가면서, 유비군과 공융군의 협공에 도적떼들은 이리저리 흩어져 달아났다. 


공융유비를 성안으로 맞아들여 축하연을 베풀며 미축을 소개했다. 미축은 유비에게 서주태수 도겸이 조조의 대군에게 포위당하게 된 경위를 소상히 설명했다. 도겸이 덕을 갖춘 군자임을 익히 알고 있던 유비는 조조의 기세를 우려했지만 [북평]의 공손찬에게 장수 조운을 포함한 원병을 요청한 후 출병키로 했다. 


유비(劉備)

공융전해가 군사를 이끌고 [서주]로 향하자 유비도 5천의 군마를 이끌고 공융의 진으로 찾아갔다. 공융전해와 협의해 군사를 좌우로 나눠 적군과 맞서게 하고 관우조운으로 하여금 양군을 돕게 했다. 유비장비와 함께 군사 1천을 거느리고 서주성으로 가던 중 조조군의 한 진영을 기습했다


조조의 장수 우금이 나와 장비를 맞았으나 이내 기세가 꺾인 우금이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자, 유비는 달아나는 적을 베며 서주성을 향해 말을 달렸다. 유비군이 입성하자 고립무원이 되어 전전긍긍하던 서주군은 환호성을 울리며 기뻐했다. 

 


도겸은 유비에게 상석을 권하며 성주(城主)를 맡아줄 것을 부탁했다. 도겸은 몇 차례 진심어린 청을 했으나 유비는 끝내 이를 사양했다. 유비는 조조 군과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우선 조조에게 서찰을 보내 화해를 권해보기로 다. 유비의 서찰을 읽은 조조가 노기등등해 서주성을 공격하려 하자 곽가가 나서 만류하며 계책을 내놓았다. 


이때 파발마가 뛰어들며 "조조가 성을 비운 틈을 타 여포가 [연주]를 함락시킨 뒤, [복양]을 진격하고 있다"는 급보를 전했다. 천하의 맹장인 여포가 앞뒤를 가리지 않고 날뛸 경우, 조조는 자신의 근거지를 잃어 벌일 형편이었다. 조조는 곽가의 계책을 따라 유비의 청을 받아들여 고향으로 돌아감으로써 마치 유비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처럼 꾸며 답신을 전한 후 군사를 물렸다.   


장막(張邈)

지난날 장안을 떠나 원술에게 의탁하려 했던 여포는 그의 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원소에게 잠시 의탁했다가 다시 [진류]태수 장막의 휘하로 들어가길 청했다. 장막 진영의 진궁이 맹장 여포를 곁에 두고 천하를 취할 것을 권하자, 장막여포에게 군사를 주어 조조의 근거지를 치게 한 것이다. 


한편 유비의 화해서찰로 조조가 군사를 물리자, 도겸은 큰 잔치를 베풀어 유비에게 [서주]를 맡아줄 것을 다시금 간청했다. 유비는 서주 인근에 [소패]를 맡는 선에서 승낙하고 [평원]으로 돌아갔다. [연주]로 회군한 조조는 붉은 석양이 기울어질 때까지 형세만 관망하며 꼼짝하지 않았다. 


본 페이지에 나오는 지명 위치

출전을 서두르는 여포에게 진궁이 계책을 내놨지만 여포는 제멋대로 군사를 이끌고 [복양]으로 향했다. 조조가 복양 들녘에 진을 치자 여포도 군사를 이끌고 나와 조조 군을 맞았다. 조조의 장수 악진여포 휘하에 장패가 나서 30여 합을 찌르고 막으며 싸웠으나 끝이 보이지 않자, 여포가 방천화극을 빗겨들고  조조군사를 닥치는 대로 베었다. 


30여리를 물러난 조조는 야습을 감행키로 하고 어둠을 기다려 2만의 군사를 진격케 했다. 하지만 여포는 진궁의 책략에 따라 야습에 대비토록 했다. 조조는 군사를 내몰아 서쪽 진을 함락시키면서 밤새 혼전을 벌였지만, 새벽이 되자 여포가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왔다. 활로를 찾아 말을 몰고 황망히 달아나던 조조는 용맹한 전위 하후돈에게 구출돼 가까스로 목숨을 보전하며 본 진영으로 돌아왔다. 


조조 장수 악진(樂進) / 여포 장수 장패(臧覇)

이로써 복양성의 새 주인이 된 여포는 비로소 진궁을 중히 여기게 됐다. 그로부터 며칠 뒤 복양성의 한 부호(富戶)인 전씨(田氏)가 조조 진영에 서찰을 보내, 여포가 잠시 복양을 떠나있으니 이때를 틈타 복양성을 진격하라고 알려왔다.


☐  조조와 여포의 장계취계(將計就計)            


조조는 책사 유엽의 충고로 만일에 대비해 군대를 셋으로 나눠 복양성으로 향했다. 조조군은 밀서의 내용대로 의(義)자를 쓴 기가 세워져 있음을 확인한 후 복양성을 에워싸고 밤을 기다려 성문이 열리자 성안으로 들어갔다. 별빛이 찬연한 저녁 조조를 따르는 군마의 말발굽소리가 요란했다. 조조군이 관아에 이르렀으나 인기척 하나 없었다. 


속았다는 생각이 조조의 뇌리를 스치는 순간 요란한 함성과 함께 징과 북소리가 요동쳤다. 조조는 퇴각을 외쳤지만 한꺼번에 성안으로 밀려든 군사들은 갑자기 성을 빠져나갈 수 없었다. 이때 성벽위에서 돌덩이가 쏟아져 내리고 관아 뒤에서 수천의 횃불이 날아오자 군사들은 서로 부딪고 짓밟히며 이내 아수라장이 됐다. 


복양성 전투

이때 동문과 서문에서 여포의 군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진퇴양란 속에 어찌할 줄 모르던 조조는 얼굴을 숙이고 적군의 옆을 스쳐 지나가려 하는데 순간 여포가 나타나 조조의 행방을 물었다. 조조는 거짓을 아뢴 뒤 혼비백산하여 방향도 잊은 채 말을 달렸다. 


때마침 조조를 찾아 나선 전위를 만나며 정신을 가다듬은 조조는 죽을힘을 다해 불길에 휩싸인 성문을 빠져나오다 불에 탄 대들보가 떨어지자 말에서 떨어지며 팔뚝에 큰 화상을 입고 화염 속에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급히 달려온 전위 조조를 자신의 말 위에 태우고 가까스로 진영으로 돌아왔다. 



이날 싸움에서 조조군은 반 이상이 죽거나 포로가 되면서, 진막 안의 장수들은 모두 무거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때 큰 상처를 입고 진막 안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조조가 떠나갈듯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무지한 여포에게 자신이 패한 것이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조조는 장계취계의 책략을 써서 적의 계략을 역이용하기로 했다. 


조조는 자신이 큰 화상으로 오늘 밤 죽었다고 소문을 낸 뒤 발인행차 시 여포가 공격해 오면 장례를 치르는 척하며 매복한 군사로 하여금 양쪽에서 공격하게 했다. 이를 전혀 의심치 않던 여포는 즉시 군마를 이끌고 마등산으로 향했다. 여포조조 진영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사방에서 매복했던 군사가 짓쳐 나왔다. 


참담한 패전을 한 여포 조조의 책략에 질려 성문을 걸어 잠그고 꼼짝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메뚜기 떼의 내습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백성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군량이 바닥나자 조조는 군사를 거두고 잠시 견성으로 돌아가 기회를 기다리니 복양성 싸움은 자연히 중단되었다. 


메뚜기 떼

이때 예순세 살의 서주태수 도겸은 병이 들면서 문병 온 유비에게 후사를 청했으나, 거듭된 유비의 사양 속에 도겸은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다음날 서주백성들이 관아문전에 모여 눈물을 흘리며 유비에게 진언하자 마지못해 잠시 [서주]를 맡을 것을 허락했다. 유비도겸의 장례를 치룬 후 조정에 표를 올려 비로소 한 주(州)의 태수가 되었다. 


유비는 탁현의 한 촌에서 뜻을 세운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의를 지키며 공을 서둘지 않았다. 그의 처신은 답답하도록 먼 길을 우회해 왔지만 이러한 처신은 오히려 지름길이 되었다. 산양의 연성에 들어가 있던 조조는 유비의 소식에 죽은 아비가 생각나 크게 노했다. 조조가 서주정벌을 서두르자, 순욱이 나서 [서주]를 공격하면 여포가 다시 [연주]를 노릴 수 있다며 말렸다. 


서주태수  도겸(陶謙)

순욱이 [여남]과 [형주]일대에 남아있는 황건적 잔당을 친 후 양곡을 빼앗아 군량미로 삼고 군마를 양성하자는 계책을 내놓자, 흉년으로 군량미의 부족함을 느끼던 조조는 주저 없이 받아들였다. 남의 좋은 의견을 쉽게 받아들이는 것은 조조의 크나큰 장점이었다. 


조조는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이동하며 [여남]으로 향해 양산을 단번에 빼앗았다. 조조의 장수가 나서 적장의 목을 단숨에 베자 놀란 황건적 두목 하의가 달아날 때쯤 한 장사(壯士)가 나타나 하의를 말에서 떨어뜨리며 포박했다. 조조 휘하의 전위와 장사가 시비 끝에 싸움을 시작했으나 일전일퇴를 거듭할 뿐 한나절이 지나도록 용쟁호투의 대결은 승부가 나지 않았다. 


장사의 무용담을 전해들은 조조는 꾀를 내어 함정을 파고는 장사가 빠지도록 유인해 사로잡은 후, 자신의 휘하에 들도록 권유하여 승낙을 받아내니 그가 허저였다. 이로써 이후 [여남] 땅에는 황건적이 날뛰는 일이 없게 되었다. 



▶ 이미지 출처: 코에이(Koei) 삼국지 (위 이미지는 영리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전편 다시보기  https://brunch.co.kr/@jangkm2000#magazi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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