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통일(天下統一)
☐ 막을 내린 조위(曹魏)
[검각]을 지키던 강유는 항복하라는 황제의 칙명을 받고 한스러운 마음을 억누르며, 한 가지 계책을 세운 후 요화, 장익, 동궐과 함께 종회에게 투항했다. 종회는 자신을 등애보다 더 높여주는 강유를 귀빈으로 대하며 의형제를 맺었다.
종회는 강유와 친밀해지자, 강유가 거느렸던 군사를 내어주며 지휘토록 했다. 한편 [성도]에 머물던 등애는 종회에게 공이 돌아갈 것을 걱정해, 글 한 통을 써서 [낙양]으로 보냈다.
이에 사마소는 등애가 모반을 꾀할 것을 의심해, 위관을 보내 종회의 벼슬을 높여주고 등애를 감시토록 했다. 종회가 강유를 불러 상의하자, 강유는 등애가 촉(蜀)의 민심을 이용해 반역할 마음을 품고 있다는 표문을 조정에 올리게 했다.
종회는 표문을 써서 [낙양]으로 보내고, 사람을 풀어 등애가 조정에 올리는 표문을 가로채 오만한 내용으로 바꿔 써 올리게 했다.
등애의 글을 보고 크게 노한 사마소는 종회에게 등애를 치게 하고, 자신도 등애와 종회를 치기위해 몸소 대군을 이끌고 출정했다. 사마소는 예전부터 종회를 믿지 않았다.
강유의 계책을 따라 종회가 위관에게 등애를 잡아들이도록 하자, 위관은 등애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죄를 묻지 않겠다는 격문을 [성도]에 띄우게 했다. 위관에게 항복해온 장수들이 등애를 사로잡자, 뒤따라온 종회는 등애 부자를 문초한 뒤 [낙양]으로 압송했다.
종회는 [성도]에 들어가 등애의 군사를 거두어들이고 크게 기뻐하며 강유와 함께 향후대책을 논했다. 강유가 종회에게 옛 장량(張良)이 공을 이룬 뒤 유방의 시기를 피하여 부귀공명을 버리고 적송자(赤松子)를 따라 노니려 했던 일을 귀띔해주니, 종회는 자신을 염려해주는 강유를 더욱 미덥게 생각했다.
이에 강유는 은밀히 유선에게 글을 올려 촉의 황실을 부흥시키겠다는 뜻을 전했다. 한편 종회는 사마소가 군사를 이끌고 [장안]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마소가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고 여겼다.
강유는 종회를 부추겨 사마소와 맞설 것을 권하며,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곽태후의 조서(詔書)를 “황제를 죽인 사마소의 죄를 밝히라”는 거짓 조서로 꾸미고 사마소를 역적으로 몰아내도록 제안했다. 다음날 종회는 장수들을 불러 잔치를 벌인 뒤 곽태후의 거짓 조소를 내보였으나, 호응해오는 장수가 없었다.
이때 종회의 심복인 구건이 [성도] 바깥에 있는 영채로 달려가 종회의 모반을 알렸고, 이에 각 영채의 군사들이 기습해오자 종회는 칼을 빼들고 싸우다 온몸에 화살이 꽂힌 채 쓰러졌다. 여러 장수들이 강유에게 덤벼들자,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 강유는 자신의 목을 찔러 목숨을 끊고 말았다.
종회와 강유가 죽자, 등애의 부하들이 밤을 새워 [면죽성]으로 달려가 등애를 구해 [성도]로 돌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날 등애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전속이 군사를 이끌고 달려와 등애와 등충의 목을 베었다.
이어 위병들이 칼끝을 촉(蜀)으로 돌리자, 난군(亂軍) 속에 장익도 죽고 [성도]의 많은 군사들과 백성들이 죽어나갔다. 그사이 유선은 [낙양]으로 호송되고, 요화와 동궐은 병을 핑계로 누워 있다가 울화병으로 죽고 말았다.
촉이 망하자 위나라는 연호를 함희 원년(264년)으로 바꾸었다. 그해 봄 [촉한]이 멸망했다는 소식을 접한 정봉은 군사를 거두어 [동오]로 돌아갔다. 오주(吳主) 손휴는 육손의 아들 육항을 대장군과 형주목으로 삼아 [강구]를 지키게 하고, 정봉은 [장강] 연안을 지키게 해 위의 침입에 대비했다.
그 무렵, 사마소는 [낙양]으로 끌려온 유선을 안락공(安樂公)으로 봉하고 재물과 몸종을 내려 편히 살게 해주었으나, 황호는 나라를 망친 죄를 물어 사지를 찢어 죽이게 했다. 사마소가 유선을 떠보기 위해 잔치를 베풀어 위나라 음악을 들려주자, 슬퍼하는 촉의 신하들과 달리 유선은 술잔을 기울이며 즐거워했다.
이를 본 사마소는 이후 유선을 경계하지 않았다. 사마소가 [서촉]을 거두어들이자, 이름뿐인 천자 조환은 사마소를 진왕으로 삼았다. 사마소에게는 두 아들 사마염과 사마유가 있었는데, 사마염은 총명하고 담력이 뛰어난 호걸이었으나 사마유는 형과 달리 성정이 부드럽고 공손하며 효성이 지극했다.
사마소는 형인 사마사에게 아들이 없어, 사마유로 하여금 양자로 삼게 하고 형의 뒤를 잇게 했다. 사마소는 평소 각별히 아끼던 둘째 아들 사마유를 세자로 삼으려 했지만, 모든 신하들이 장자를 세자로 삼는 것이 좋다고 간하자, 결국 첫째 아들 사마염을 세자로 삼았다.
그날 부중으로 돌아온 사마소는 중풍을 맞아 쓰러져 말을 못하고 손가락으로 사마염을 가리키며 세상을 떠나자, 장남 사마염이 뒤를 이어 진왕이 됐다. 왕이 된 사마염은 가충을 궁 안으로 불러들인 뒤, “조비가 한나라의 대통을 이었는데 어찌 내가 위의 대통을 잇지 못하겠는가!”라며 속마음을 밝혔다.
다음날 사마염은 칼을 찬 채 궁궐로 들어가, 용상의 조환에게 천자의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협박했다. 사마염의 윽박지름에 놀란 조환이 몸을 떨며 입을 열지 못하고 있자, 그 자리에 있던 장절이 보다 못해 사마염을 만류했다.
크게 노한 사마염의 호통에도 장절이 물러나지 않고 맞서자, 사마염은 장절을 끌어내 몽둥이로 때려죽이게 했다. 위(魏) 황제 조환은 사마염 앞에 무릎을 꿇고 흐느껴 울며 빌었다.
조환은 옥새를 사마염에게 바치고, 한(漢) 건안 25년에 위(魏)의 선대 조비가 천하를 이어받은 지 45년 만에 제위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이로써 265년, 사마염은 국호를 진(晉)으로 정하고 연호를 태시(太始) 원년으로 삼았다.
☐ 진(晉)의 천하통일
그 무렵, 사마염이 위(魏)의 제위를 빼앗았다는 소문을 듣게 된 [동오]의 손휴는 근심으로 날을 지새우다 마침내 병들어 눕게 되었다. 264년, 삼대 황제 손휴가 세상을 떠나자, 나이어린 태자 손단 대신 손권의 손자인 손호가 제 4대 제위를 이었다.
그러나 손호는 간신배를 가까이 하며 주색에 빠져 날로 횡포해지더니, 충언을 간하는 신하의 목을 베고 향락을 즐길 궁궐을 짓게 했다. 또한 손호는 육항으로 하여금 [양양]을 공격토록 하여, 오(吳)가 망할 날을 재촉했다.
진(晉)의 사마염은 [양양] 땅을 지키던 양호로 하여금 [동오]의 공격을 막게 했다. 이때 양호와 육항은 서로의 경계를 넘지 않으며 싸움을 자제했다.
어느 날 양호는 사냥 중에 오군의 화살을 맞은 짐승이 실려 오자, 이를 오군에게 돌려주게 했다. 이에 육항은 잘 빚은 술을 답례로 보냈다. 이후 두 사람은 서로를 신뢰하며 안부를 묻고 지내는 사이가 됐다.
그러한 때 손호가 육항에게 빨리 진(晉)을 치도록 명을 내리자, 육항은 진을 치기보다는 경계를 굳게 지키는 것이 좋겠다고 고했다. 이에 손호는 육항의 병권을 거두고 벼슬을 낮춘 뒤, 손기를 보내 지키게 했다.
손호가 군사들을 변방으로 내몰며 들볶아대자, 양호는 [동오]의 군민들이 무도함을 일삼는 손호를 원망하고 있으니, 이제 [동오]를 칠 때가 왔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사마염은 신하들의 만류에 [동오]를 침공하려하지 않았다. 실망한 양호는 병을 핑계로 벼슬에서 물러난 뒤, 세상을 떠나기 전 문병을 온 사마염에게 두예를 천거했다.
양호가 죽자 사마염은 두예를 대장군으로 삼아 [양양]으로 보내 [형주] 일대를 다스리며 [동오]를 칠 준비를 하게했다. 그 무렵 [동오]는 원로 정봉과 육항이 죽은 뒤라, 손호는 사정관을 통해 잘못이 들어난 관리들의 얼굴 가죽을 벗기거나 눈알을 뽑는 등 잔인한 횡포가 날로 심해졌다.
이에 두예가 [동오]를 치도록 재촉하는 표문을 올리자, 사마염은 마침내 두예를 대도독으로 삼아 20만 대군을 이끌고 [동오]정벌에 나섰다.
진(晉)의 대군이 [동오]로 향하자, 손호는 오연을 도독으로 삼아 두예를 막게 하고 손흠은 [하구]를 지키되, 승상 장제를 좌우장군으로 삼아 심영, 제갈정과 함께 진의 공격을 막게 했다. 또한 손호는 30근의 쇠사슬과 쇠말뚝을 수만 개 만들어 강 물속에 박아두어 진의 배를 막게 했다.
한편 두예는 주지에게 작은 배에 수군을 싣고 [장강]을 건너 [낙향]을 야습토록 한 뒤, 자신은 [하구]로 나아가 손흠의 군사들을 수십 리 유인한 뒤, 매복해 둔 병사들과 함께 동오군을 덮쳤다.
허둥지둥 [낙향]으로 달아난 손흠은 이미 성을 점령하고 있던 진의 장수 주지의 칼에 목을 베이고 말았다. 이때 성을 버리고 달아나다 사로잡힌 오연도 죽고 말았다. 두예가 거침없이 [강릉]을 빼앗자, 여러 고을의 수령들은 저마다 두예에게 항복해왔다.
두예는 격문을 돌려 각 장수들로 하여금 [동오]의 도읍인 [건업]으로 진군토록 했다. [진]의 장수 왕준도 뗏목 수십만 개를 하류에 띄워, 손호가 강 일대에 쳐놓은 쇠말뚝이 뗏목에 박히거나 쓰러지게 했다.
이때 뗏목 위에 밝혀둔 횃불이 풀더미에 쓰러지면서 뗏목이 불타자, 쇠사슬도 녹아 끊어졌다. [진]의 군사들이 거침없이 [동오]의 경계로 밀고 들어가자 장제는 심영, 제갈정과 함께 힘을 다해 싸우다 중과부적으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당황한 손호는 장상에게 군사를 주어 적을 막게 했지만 풍랑이 일면서 오병들이 배에 오르지 않고 달아나자, 장상은 항복하고 말았다. 장상이 성 안으로 진병을 끌어들이자 손호는 스스로 몸을 묶고 왕준 앞에 나아가 항복하고, 끝까지 [건평성]을 지키던 태수 오언도 항복해버렸다.
사마염은 술잔을 높이 들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낙양]에 도착해 사마염과 마주한 손호는 유선과 달리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진제(晉帝)는 손호를 귀명후(歸命侯)에 봉하고 항복한 대신들도 모두 열후(列侯)에 봉했다.
이로써 셋으로 나뉘었던 천하는 진(晉)의 사마염에 의해 통일됐다. 실로 천하대세는 합한 지 오래되면 반드시 나누어지고, 나뉜 지 오래되면 다시 합해짐이 하늘의 이치이던가.
그 이후 위주 조환은 280년, 오주 손호는 283년, 촉주 유선은 287년 세상을 떠나니, 모두 천수(天壽)를 끝까지 누린 선종(善終)이었다. 훗날 명나라 문인 양신(楊愼)은 천하를 놓고 다투며 나눠지고 합해졌던 삼국지의 소감을 짧고 명쾌한 서사(序詞)로 남겼다.
[三國志序詞]
滾滾長江東逝水(곤곤장강동서수)
- 굽이쳐 동으로 흐르는 장강에 부딪쳐 부서지는 그 물결에
浪花淘盡英雄 (낭화도진영웅)
- 옛 영웅들의 자취를 찾을 길 없네
是非成敗轉頭空(시비성패전두공)
- 돌이켜보면 옳고 그름과 지고 이김이 모두 헛되어라
靑山依舊在 (청산의구재)
- 푸른 산은 옛날과 다름없건만
幾度夕陽紅(기도석양홍)
- 붉은 석양은 지나가기 몇 번이던가
白髮漁樵江堵上(백발어초강자상)
- 강가에서 고기 잡고 나무하는 백발 늙은이
慣看秋月春風(관간추월춘풍)
- 가을 달 봄바람이야 익히도 보았으리
一壺濁酒喜相逢(일호탁주희상봉)
- 한 병 탁주로 기쁘게 만나
古今多少事(고금다소사)
- 고금의 크고 작은 일들을
都付笑談中(도부소담중)
- 웃으며 얘기하며 모두 다 붙여나 보세
▶ 이미지 출처: 코에이(Koei) 삼국지 (위 이미지는 영리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전편 다시보기 https://brunch.co.kr/@jangkm2000#magazin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