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한멸망(蜀漢滅亡)
☐ 등애의 슬기
손휴가 [동오]의 황제에 오르니, 손침은 날이 갈수록 교만과 횡포가 더해가며 제위를 찬탈할 뜻까지 내비쳤다. 이에 손휴는 궁중잔치를 열어 손침을 대궐로 유인한 후 노장 정봉으로 하여금 손침을 잡아 죽이게 하고, 손침의 형제와 그 삼족까지 참수했다.
이때 [촉한]에서는 환관 황호가 국정을 농단하고 있었고 황제에게 아첨하는 신하들만 들끓으니, 궁궐 밖 백성들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다.
[동오]의 새로운 황제가 된 손휴가 [서촉]의 황제에게 동맹을 강화하자는 국서를 보내오자, 강유는 기뻐하며 20만 대군을 일으켜 요화, 장익, 하후패 등과 함께 [위]를 공격하기 위해 [기산]으로 진군했다.
그때 등애는 언젠가 촉군이 다시 올 것에 대비해 촉군이 영채를 세울만한 곳에다 땅굴을 파놓고 있었다. 강유는 [기산]의 골짜기 어귀에 영채 셋을 세워놨는데, 그 중 하나는 등애가 파놓은 땅굴과 닿아있었다. 등애는 밤을 기다려 땅굴로 들어가 촉의 영채를 급습하게 했다.
촉의 장수들은 영채를 벌이고 달아났지만, 강유는 당황하지 않고 재빨리 활과 쇠뇌를 집중적으로 쏘게 해 위병들의 거듭된 기습을 모두 막아냈다. 등애는 강유의 침착한 용병에 감탄하며 마침내 군사를 거두어 본채로 돌아갔다.
다음날이 되자, 등애는 [기산] 앞에서 강유의 팔진법에 맞서 군사를 이끌고 촉군의 팔진법을 포위해 들어갔다. 하지만 강유가 깃발을 흔들어 진법을 전환하자, 촉군들은 긴 뱀이 몸을 움추리는 모양으로 진을 바꾸며 등애를 에워쌌다.
사마망이 달려와 위급해진 등애를 구했지만, 영채를 촉군에게 모두 빼앗기고 말았다. 등애는 다시 사마망과 함께 팔괘진을 펼쳐 싸웠으나, 제갈량에게 진법을 전수받은 강유를 당해내지 못하고 싸울 때마다 패하며 위수(渭水) 남쪽으로 달아났다.
강유와 싸워 이기기 어렵다고 판단한 사마망은 반간계(反間計)를 내었다. 등애는 사마망의 계책에 따라 몰래 사람을 [성도]로 보내 황금과 보물로 환관 황호를 매수하고, 강유가 황제를 원망하며 위(魏)에 투항하려 한다는 헛소문을 퍼뜨리게 했다.
황호가 촉황제에게 소문을 아뢰자 황제는 [기산]으로 사람을 보내 급히 강유를 불러들였다. 등애는 철수하는 강유를 추격했지만, 촉군의 대열이 질서정연하고 흐트러짐이 없는 것을 보고는 감히 뒤쫓지 못하고 본채로 돌아갔다.
[성도]로 돌아온 강유는 등애의 간계를 알아차리고 크게 탄식했다. 그 무렵, 위(魏)에서는 사마소의 횡포를 참지 못한 황제 조모가 스스로 궁중 시위(侍衛) 등 수백 명을 이끌고 사마소를 치려했다.
하지만 시중 왕침과 상서 왕업의 밀고로 사마소는 심복인 가충과 성제를 보내 조모를 창으로 찔러 죽였다. 사마소는 황제의 죽음을 슬퍼하는 척하며, 조모의 죽음을 성제에게 모두 뒤집어 씌워 처형시키고 말았다.
☐ 제갈공명의 혼령
가충은 사마소에게 제위에 오를 것을 권했지만, 사마소는 훗날 그의 아들을 천자로 삼을 욕심에 조조의 손자인 조환을 제 5대 황제(260년)로 삼았다.
이를 전해들은 강유는 위(魏)를 칠 명분을 얻게 됐다고 여기고, 15만 군사를 일으켜 요화, 장익과 함께 [기산]으로 진군했다. 강유는 등애와 싸워 크게 이겼으나, 양초(糧草)를 모두 잃고 잔도를 훼손당하자 [한중]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경요 5년(262년) 가을, 군량을 비축하고 군마를 조련한 강유는 [한중]을 요화에게 맡기고 다시 위(魏)를 치기위해 30만 대군을 일으켰다. 강유는 하후패를 선봉장으로 삼아 사마망이 지키는 [조양성]을 뺏게 했다.
하지만 하후패는 성이 비어있음을 확인하고 성 안으로 들어가다 복병의 공격에 화살을 맞아 죽고, 강유 또한 등애의 기습에 쫓겨 20리 밖에 겨우 영채를 세웠다. 강유는 등애와 맞서 [조양]과 [후하]를 치기로 하고, 이 틈을 타서 장익은 [기산]을 친 후 [장안]으로 진격하고자 했다.
지루한 싸움이 이어지자 등애는 아들 등충에게 그곳을 맡기고 자신은 [기산]을 구원하러 갔고, 위군의 움직임을 수상히 여긴 강유도 [기산]으로 향했다. [기산]을 공격하던 장익은 등애가 군사를 이끌어 오자 위기에 몰렸다.
하지만 등애는 뜻밖에 강유가 나타나자, 많은 군사를 잃고 영채로 달아났다. 강유가 [기산성]을 에워싸고 공격을 퍼부을 때쯤, 뜻밖에도 [성도]에서 군사를 돌리라는 조서가 내려왔다.
강유는 황제의 명을 받들지 않을 수 없어, [한중]에 군사를 머무르게 하고 촉주를 뵈러 [성도]로 갔다. 열흘이 지나도록 황제가 나타나지 않자, 의아해하던 강유는 황호의 농간으로 황제가 철군을 명한 사실을 알게 됐다.
황호는 자신에게 뇌물을 주고 우장군에 오른 염우에게 전공(戰功)을 세우게 하려했다. 화가 치민 강유는 황제에게 조정을 농단하는 간교한 황호를 죽일 것을 간곡히 청했으나, 유선은 황호를 불러들여 강유에게 사죄하게 하고 죽이지는 않았다.
강유는 분한 마음을 억누르며 [농서] 지방의 [답중]에 군사를 주둔시켜 둔전을 짓겠다고 황제에게 청한 후, 8만 군사를 이끌고 [답중]으로 들어갔다.
이는 군량을 확보하고 [한중]의 방비를 강화하면서, 밖에서 병권을 장악할 수 있어 황호로 부터 화를 면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한편, 강유의 근황을 듣게 된 사마소는 등애와 종회로 하여금 두 길로 나누어 촉을 치게 했다.
이때 종회는 [동오]를 친다는 말을 퍼뜨리게 하고 큰 배를 만들도록 했다. 그는 [동오]를 친다는 소문이 퍼뜨려 촉을 치는 동안, [동오]가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고, [서촉]을 무너뜨린 후 [동오]를 공격하기 위한 배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었다.
종회는 선봉으로 하여금 [한중]으로 가는 험한 산골짜기에 군사 길을 닦아놓도록 하고, 자신은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그 뒤를 따라갔다. 등애도 군령을 내려 사마망에게는 오랑캐 강인(羌人)을 막게 하고, 각처에서 군마를 모은 후 [한중]으로 나아갔다.
한편 강유는 위가 쳐들어온다는 표문을 급히 황제에게 올렸지만, 매일같이 주연(酒宴)에 빠져있던 유선은 황호의 말에만 귀를 기울이며 걱정하지 않았다. 황호는 강유가 거듭 올린 표문을 가로채 황제에게 올리지 않았다.
[한중]으로 쳐들어가던 종회는 촉의 장수를 베며, 파죽지세로 [남정관]과 [양평관]을 점령했다. 헌데, 그날 밤 갑자기 서남쪽에서 함성이 크게 일자, 종회는 수백 기병을 거느리고 서남쪽 산 앞에 이르러 주위를 살피다 이상한 살기가 서리는 것을 느꼈다.
그곳이 지난날 하후연이 싸우다 죽은 [정군산]임을 알게 된 종회는 무거운 마음으로 돌아가는데, 홀연 매서운 바람이 불며 등 뒤에서 수천 기병이 달려 나왔다.
바람에 떠밀린 장수들이 놀라 말에서 떨어지자, 이를 괴이쩍게 여기던 종회는 [정군산]에 제갈량의 묘가 있음을 알게 됐다. 공명의 묘에 제사를 올린 종회는 그날 밤, 장막의 책상 앞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
문득 맑은 바람이 일더니 학창의를 입고 깃털 부채를 든 공명이 나타나 “촉한의 운수가 다해 하늘의 뜻을 거스를 수 없으나, 촉의 백성을 함부로 죽이지 말라”고 전했다. 꿈에서 깨어난 종회는 흰 깃발에 보국안민(保國安民)을 쓰게 하고, 촉의 백성들을 죽이지 못하게 하였다.
☐ 촉한(蜀漢)의 멸망
[답중]에 있던 강유는 군사를 이끌고 나가 위병을 맞았지만 앞뒤로 몰려드는 등애의 군사를 당할 수 없자, 본채로 들어가 구원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촉의 장수들이 종회에게 항복해 [한중]이 위태롭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강유는 [한중]을 구하기 위해 달려갔다.
때마침 요하와 장익도 [한중]을 되찾기 위해 달려왔지만, 종회와 등애가 대군을 열 갈래로 나누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은 강유는 [한중] 대신 [검각]을 지키기로 했다.
한편 등애는 종회가 [한중]을 점령하자, 시기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에 등애는 종회로 하여금 [검각]을 공격케 하고, 그사이 자신은 지름길을 택해 [성도]를 공격하려했다.
종회는 [성도]로 가는 지름길이 험악한 산악지형이기에 등애가 그곳을 쉽게 통과하지 못할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등애는 험한 길을 택해 [성도]를 먼저 빼앗아, 종회보다 더 큰 공을 이루려했다. 종회가 [검각]을 공격하는 동안 등애는 아들 등충에게 군사 5천을 주어 앞서 길을 뚫게 했다.
또한 6만 군사에게 마른 양식과 노끈이나 새끼줄을 지니게 하되 1백리마다 영채를 하나씩 세우고, 3천 명씩 머물게 하면서 20일에 걸쳐 7백여 리를 진군했다. 등애는 남은 2천 군사를 이끌고 마침내 깎아지른 듯한 [마천령] 고개 앞에 이르렀다.
등애가 험준한 고개 위에 오르자, 길을 열도록 앞서 보낸 등충의 군사들이 바위 절벽을 뚫지 못하고 있었다. 등애는 군사들의 병기를 절벽 아래로 떨어뜨린 뒤, 자신부터 담요로 몸을 감싸 깎아지른 듯한 골짜기 아래로 굴러 내려갔다.
담요가 없는 군사들은 새끼줄로 몸을 묶어 나무에 매고 나뭇가지와 바위를 잡으며 벼랑을 내려갔다. [마천령]을 넘은 등애는 앞으로 나아가다 비어있는 영채를 발견하고는, 그곳이 지난날 공명이 군사를 머물게 했던 영채였으나 촉주 유선이 군사를 불러들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
등애는 공명이 과연 신인(神人)이었음에 탄복한 후, 지체 없이 군사를 이끌고 밤을 틈타 [강유성]으로 밀고 들어갔다. 등애는 [강유성]을 지키던 마막이 항복해 오자, 그를 길잡이로 삼아 부성(부현)까지 함락시켰다.
연일 급보가 전해지자 다급해진 황제 유선은 문무백관을 불러 대책을 물었지만 선뜻 입을 여는 자가 없자, 공명의 아들이자 황제의 사위인 제갈첨을 불러 위병을 막게 했다. 제갈첨은 황호가 국정을 농단하자, 조정에서 물러나 있었다.
제갈첨은 아들 제갈상을 선봉에 세워 등애와 맞서 두 차례의 싸움에서 이겼으나, 결국 등애의 매복 작전에 말려들어 패하고 [면죽]으로 물러났다. 제갈첨이 [동오]에 구원을 청하자, 손휴는 곧 노장 정봉에게 5만 군사를 주어 제갈첨을 구하게 했다.
한편 구원병을 기다리던 제갈첨은 [면죽성]에서 나와 위의 군사들을 공격했지만, 매복해있던 등애의 대군에게 순식간에 밀려 포위되고 말았다. 제갈첨은 비 오듯 쏟아지는 화살을 맞고 칼을 뽑아 자신의 목을 찔렀다.
이를 본 제갈상은 적진으로 달려가 수백의 위병을 죽인 뒤 적의 칼에 맞아 죽었다. 등애는 군사를 휘몰아 [면죽성]을 점령하고 [성도]로 진격해갔다.
[성도] 백성들이 목숨을 구해 달아나니, 그 울음소리가 하늘을 찌른다는 보고를 받은 유선은 크게 놀라 몸을 떨었다. 다급해진 신하들은 지형이 험준한 [남중]으로 피신한 후 [남만]의 만병(蠻兵)에게 구원을 청하자고 했다.
또한 [동오]로 피신하자는 의견과 차라리 위에 항복하자는 의견에까지 이르니, 유선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궁궐로 들어가 누워버렸다. 다음날 유선이 위에 항복하기로 결심을 하자, 다섯째 아들 유심이 나서 위의 병사와 맞서 싸울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유선은 끝내 유심을 궁 밖으로 내쫓은 후 항복문서를 쓰도록 하고, 강유에게도 항복하라는 조서를 보냈다. 이에 유심은 아내와 세 아들의 머리를 베고 유비의 사당으로 들어가 통곡한 뒤, 칼을 빼어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다음날 유선이 성 밖 10여리까지 나가 등애에게 항복하자, 등애는 유선을 표기장군으로 삼고 민심을 안정시켰다. 등애는 환관 황호를 죽이고자 했으나, 황호는 측근들을 매수해 목숨만은 건졌다. 유비, 관우, 장비가 도원에서 결의를 맺은 이래 80여년이 지난 262년, 촉한은 50년 만에 그 막을 내리고 말았다.
▶ 이미지 출처: 코에이(Koei) 삼국지 (위 이미지는 영리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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