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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Mar 29. 2019

간략 삼국지(39)

구벌중원(九伐中源)


☐  향락에 빠진 조예

      

공명의 죽음이후 세 나라가 싸움을 그친 것은 촉한 건흥 13년(235년) 이었다. 이 해에는 삼국이 군사를 일으키지 않아 오랜만에 평화로운 때였다. 위주(魏主) 조예사마의를 태위로 삼아, 모든 군사를 이끌어 변방을 지키게 했다. 


하지만 조예가 [허도]와 [낙양]에 대규모의 궁궐과 전각을 짓게 하고, 사치와 향락에 빠져드니 백성과 신하들의 불만은 커져만 갔다. 조예는 후궁인 곽부인을 총애해 모황후에게 사약을 내려고 곽부인을 황후로 삼았으나, 신하들은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위(魏) 2대 황제 조예(曹叡)

이러한 때에 [유주]자사 관구검으로부터 [요동] 태수 공손연이 연왕이라 일컬으며 난을 일으켰다는 표문이 올라왔다. 조예가 내린 벼슬에 불만을 품은 공손연은 군사를 휘몰아 [중원]으로 달려왔으나, 사마의에게 크게 패하며 참형에 처해졌다. 


공손연 부자의 목을 벤 사마의가 [낙양]으로 돌아올 무렵, [허도]의 조예는 방탕을 일삼다 마침내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공손연(公孫衍)

조예조진의 아들 조상을 대장군으로 삼아 나랏일을 돌보게 한 후, 임종이 가까워지자 사마의를 불러들이고 태자 조방, 시중 유방과 대장군 조상 등을 머리맡으로 불러 어린 태자를 잘 보필해줄 것을 부탁한 후 숨을 거두었다. 연희 2년(239년)은 조예의 나이 서른여섯 살로 제위에 오른 지 13년째 되던 해였다. 


위나라의 황제가 된 조방사마의를 공경하며 모든 일을 그와 의논했다. 하지만 오래지않아 대장군 조상의 신임을 받던 환범사마의를 의심하며 조상에게 부축이자, 조상사마의의 병권을 빼앗고 세 아우에게 나눠주며 각기 어림군을 거느리게 했다. 


위(魏) 장수 조상(曹爽)

이에 사마의는 병을 핑계대고 두 아들과 함께 초야에 묻혀 지냈다. 위주 조방이 여덟 살에 지나지 않으니, 거리낄 것이 없던 조상은 사치와 향락에 빠져들며 선제(先帝)의 시첩까지 자신의 시중을 들게 했다. 어느 날 조상사마의에게 사람을 보내 병문안을 구실로 동정을 살피게 했다. 


사마의는 머리를 흐트러뜨리고 침상에 누운 채 말을 알아듣지 못한 척 횡설수설 대답하더니 숨을 헐떡거리며 위중한 척 꾸며댔다. 이에 조상사마의에 대한 의심을 버리고 황제를 모시고 병권을 맡고 있는 세 아우와 어림군을 이끌어, 선제 조예의 황릉에 제사를 올리고 큰 사냥을 하기위해 성 밖으로 나섰다. 


위(魏) 3대 황제 조방(曹芳)

기회를 엿보던 사마의는 즉시 두 아들과 심복 장수 수십 명을 거느리고 궁중으로 달려가, 조상의 군영과 무기고를 빼앗고 곽태후가 있는 궁전도 장악했다. 이에 사마소는 성 밖으로 나가 [낙수]에 진을 치고 부교를 지켰다. 


조상은 병권만을 거두어들이고 목숨은 살려준다는 사마의에 말을 믿고 집으로 돌아갔으나, 결국 사마의는 조상과 그 형제 및 일당의 목을 베어버렸다. 이로써 사마의는 승상이 되고 위의 권력은 사마의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  사마의와 손권도 사라지다   

            

사마의조상의 친척인 하후패가 난을 일으킬까 걱정이 되어 그를 [낙양]으로 불러들였다. 하지만 하후패는 군사를 일으켜 반기를 들었다가 곽회에게 패하자 촉(蜀)에 투항했다. 


이에 강유하후패와 함께 위(魏)의 [옹주성]을 공격하고자 [우두산]으로 향했으나, 곽회에 의해 보급로가 끊기며 공격을 당하자 군사 태반을 잃고 [양평관]으로 달아났다. 


촉(蜀)에 투항한 하후패

사마사는 군사를 이끌고 [양평관]까지 뒤쫓다가, 공명이 알려준 연노법을 사용해 다발의 독화살을 날리는 강유에게 크게 패했다. 하지만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강유도 군량이 바닥나며, 많은 군사를 잃은 채, [한중]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연희 14년(251) 사마의가 노환으로 숨을 거두자, 황제 조방은 그의 맏아들인 사마사를 대장군에 봉하고 작은아들 사마소는 표기장군으로 삼았다. 이로써 위는 다시 사마의 두 아들의 손에 넘겨진 셈이었다. 이듬해인 연희 15년, [동오]의 손권도 마침내 병이 들어 일흔하나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사마의(司馬懿)

이때 [동오]는 육손과 제갈근이 이미 죽은 뒤여서 제갈근의 아들인 제갈각이 국정을 도맡고 있었고, 손권의 아들인 손량이 제위를 이었다. 이로써 천하를 위(魏), 촉(蜀), 오(吳)로 나누어 다스렸던 첫 세대 영웅들이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오(吳) 제갈각(諸葛恪)

손권이 죽자 사마사는 아우 사마소를 대도독으로 삼아 군사를 총괄하게 하고 왕창과 관구검에게 각기 군사 10만을 주어 [동오]를 치게 했다. 제갈각은 정봉을 보내 위의 군사를 막게 했는데, 정봉은 불과 3천명의 병력을 30척 배에 나누어 싣고 단검만 지닌 채 위병의 영채를 급습했다. 


위(魏) 장수 왕창(王昌) / 관구검(毌丘儉)

적의 군세를 비웃으며 방심하고 있던 위병들은 목숨을 걸고 달려드는 오병들을 당해내지 못하고 패퇴했다. 제갈각은 승리의 여세를 몰아 촉(蜀)의 강유에게 함께 위를 치자는 전갈을 보내고, 자신은 군사 20만을 일으켜 중원으로 나아갔다. 


제갈각은 위병의 요충지인 [신성]을 에워싸고 여러 달에 걸쳐 공격을 퍼붓다가, 성 위에서 위병이 쏜 화살에 이마를 맞아 금창이 터졌다. 또한 군사들 사이에 무더위 전염병이 돌며 일부 장수들이 위(魏)로 투항하자, 제갈각은 군사를 되돌렸다. 


오(吳) 장수 정봉(丁奉)

이에 관구검이 그 뒤를 덮치자, 병든 오군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위병에게 짓밟혔다. 후환을 두려워하던 제갈각은 자신의 허물을 장수나 관원들에게 뒤집어씌워 내쫓거나 죽이고, 어림군까지 손안에 넣어 전횡을 일삼았다. 


이를 보다 못한 손견의 아우인 손준이 계책을 내어 황제 손량이 베푼 연회에 참석한 제갈각의 목을 베었다. 이로써 손준은 승상과 대장군을 겸하며 [동오]의 권력을 차지했다. 한편 위(魏)를 협공하자는 제갈각의 글을 받은 강유는 249년 [국산]에 두 개의 성을 쌓고, 일곱 번째 대군을 일으키고자 오랑캐 강왕(羌王)에게 지원군을 요청했다. 


오(吳) 장수 손준 / 오(吳) 2대 황제 손량

이에 사마사는 사마소를 대도독으로 임명하고 서황의 자식인 서질을 선봉으로 삼아 강유를 막게 했다. 촉군의 장수 요화와 장익은 차례로 나서 서질과 맞싸웠으나 크게 패한 채 물러났다. 위병을 유인하기위해 강유가 목우유마로 양초를 운반하게 하자, 서질은 보급로를 끊기 위해 공격하다가 매복해있던 강유에게 죽임을 당했다. 


위(魏) 장수 서질(徐質)

강유가 여세를 몰아 위의 영채를 덮쳐들자 사마소는 철룡산(기산 북쪽)으로 달아났다. 한편 곽회는 거짓항복으로 강왕을 사로잡아 항복을 받아낸 후 함께 촉군을 공격하다, 강유의 화살을 맞아 죽고 말았다. 이때 사마소는 다시 강유를 공격해 승리를 거두었고, 크게 패한 강유는 [한중]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위(魏) 장수 곽회(郭淮)

촉(蜀)과의 싸움으로 더욱 위세가 오른 사마사 형제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자, 황제의 권위는 더욱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황제 조방은 장인인 장즙과 하후현이풍을 은밀히 불러 사마사 형제를 제거토록 혈서를 써주었다. 


장즙(張緝) / 하후현(夏侯玄) / 이풍(李豊)

하지만 궁 밖으로 나오던 세 사람은 뜻밖에 사마사와 마주치고 말았다. 세 사람이 밀실에서 천자를 만난 것을 알고 있던 사마사는 이들을 윽박지르며 몸을 뒤지게 하여 황제의 혈서를 찾아냈다. 


화가 치솟은 사마사는 이들의 목을 베고 후궁으로 달려가 장황후를 목 졸라 죽이고 황제를 폐위시킨 후, 조비의 손자 조모를 새 황제로 세웠다. 훗날 뒷사람들은 이를 조조의 업보에 견주어, 지난날 조조가 한의 승상으로 있을 때, 동귀비복황후를 죽인 일을 시로 지어 남기었다.      


위(魏) 4대 황제 조모(曹髦)

☐  강유의 구벌중원(九伐中源) 

                   

연희 17년(254년) 위(魏)나라 제4대 황제에 오른 조모 사마사에게 황금도끼를 주며 칼을 차고 어전에 오를 수 있도록 했다. 대장군 사마사가 조정 권력을 한손에 거머쥐자, 이듬해 정월 황제 폐위에 불만을 품은 진동장군 관구검과 [양주]자사 문흠이 군사를 일으켰다. 


사마사(司馬師)

그때 사마사는 눈에 혹이 생겨 치료하던 중이었지만, 아우 사마소에게 [낙양]을 맡기고 병을 무릅쓴 채 대군을 일으켜 나아갔다. 이때 관구검은 [동오]의 손준이 [수춘성]을 빼앗으러 온다는 소식에 놀라 군사를 [항성]으로 돌렸다. 


한편 사마소의 영채를 급습한 문흠과 아들 문앙은 등애가 거느린 위병에게 크게 꺾인 후 [수춘성]으로 달아났다. 하지만 [수춘성]은 이미 제갈탄이 점령하고 한 뒤여서, 문흠은 하는 수 없이 손준에게 투항하고 말았다. 


문흠(文欽) / 문앙(文鴦)

홀로 남은 관구검은 등애와 맞서 싸웠지만 중과부적으로 쫓기어 목숨만 건진 채 [신현성]으로 달아났으나, 그곳 현령의 속임수에 빠져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로써 사마사는 회남(淮南)을 평정했으나, 병이 깊어지면서 아우에게 병권을 넘기고 숨을 거두었다.



조모사마소를 대장군으로 삼자, 위의 권력은 여전히 사마소에게 집중됐다. 사마사가 죽자 강유는 장익과 하후패를 거느리고 위(魏)를 다시 공격했다. [농서] 조수(洮水)에 도착한 강유가 왕경과 맞서다 달아나자, 쫓기던 촉병들은 강가에 이르러 달아날 수 없게 되니 죽기를 작정하고 적군에게 달려들었다. 


위(魏) 장수 왕경(王經) / 등애(鄧艾)

배수진의 계책으로 승리한 강유는 [농서]의 적도성(狄道城) 공격에 나섰지만, 등애의 계교에 말려들어 군사를 물렸다. 강유는 군사를 수습해 다시 [남안]의 무성산(武城山)을 공격했으나, 등애가 미리 매복해둔 군사들을 당해낼 수 없었다. 


농서전투(8차 북벌) 진로

강유는 다시 [상규]를 공격했으나 이번에도 복병을 만나 또다시 등애에게 패하며, 강유를 구원하러 온 장의마저 위병이 손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다. 공명의 뜻을 받들어 여덟 번째 [중원]으로 나아갔던 강유는 패군이 되어 [한중]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촉(蜀) 장수 강유(姜維)/ 장의(張嶷)

이때 사마소는 대도독이 되어 조정 일도 황제에게 아뢰지 않고 마음대로 처결하며, 제위를 찬탈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이에 [회남] 땅에 있던 제갈탄은 사마소의 죄목을 열거한 표문을 [낙양]으로 보내고 군사를 일으켜, [동오]와 연합하고자 했다.


그 무렵 [동오]는 승상 손준이 죽고 그 사촌아우 손침이 실권을 쥐고 있었는데, 제갈탄의 청을 받아들여 7만 명의 군사를 일으켰다. 대군을 거느리고 [회남]으로 향하던 사마소가 뜻밖의 동오군을 맞아 크게 물리치자, 제갈탄은 문흠과 함께 사마소와 대적하러 나섰지만 사마소의 계교에 빠져 크게 패하고 [수춘성]으로 달아났다.


위(魏) 장수 제갈탄(諸葛誕)

 제갈탄이 성을 지킬 뿐 싸우려하지 않는 동안에 성안의 군량이 줄어들어 굶어죽는 군사까지 속출했다. 때마침 [동오]에서 투항해온 문흠이 제갈탄에게 목이 잘려 나가자, 이를 본 문앙과 문호는 위(魏)에 투항해 버렸다. 사마소는 문앙의 목을 베려했으나 종회가 말리자, 마음을 바꾸어 벼슬을 내렸다.


 이에 문앙 형제가 [수춘성]으로 나아가 항복을 권유하자, [수춘성]의 민심은 크게 흔들렸다. 결국 사마소종회의 의견에 따라 군사를 내몰아 [수춘성]을 점령했고, 달아나던 제갈탄은 죽임을 당했다. 그 무렵 [서촉]의 황제 유선은 주색에 빠져있었고, 환관 황호가 조정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었다. 


유선(劉禪) / 황호(黃皓)

이러한 사정을 모르던 강유는 다시 아홉 번째 서천 군사를 일으켜 위(魏)의 [장성]으로 향했다. 강유는 성을 에워싸고 화포와 불화살을 날려 [장성]을 함락시킬 기세였지만, 등애와 그 아들 등충이 구원병을 이끌고 나타나자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강유는 사마소가 [수춘성]을 점령하고 다시 [장성]을 돕기 위해 온다는 소식에 길게 한탄하며 군사들을 물렸다. 한편 [동오]의 대장군으로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손침은 제멋대로 사람을 잡아 죽이는 등 전횡이 극에 달했다. 


강유 7차~9차 북벌 진로

그때 손량은 열일곱의 나이로 허수아비 황제에 불과했다. 이에 손량은 장인인 전기에게 조서를 내려 손침을 죽이라 했다. 전기는 이 일을 아비 전상에게 알렸고, 전상은 곧 아내에게 털어놓고 말았다. 


그러자 전상의 아내는 그날로 손침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전기의 어미가 바로 손침의 누이였다. 결국 손침은 군사를 일으켜 손량을 폐위시킨 뒤 258년, 손권의 여섯 째 아들인 손휴를 [동오]의 3대 황제로 세웠다.


오(吳) 장수 손침(孫綝)


▶ 이미지 출처: 코에이(Koei) 삼국지 (위 이미지는 영리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전편 다시보기  https://brunch.co.kr/@jangkm2000#magazi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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