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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Aug 02. 2021

몽산포 日記 (Ⅰ)

응답하라 1972


아스라이 기억 속에 사라져가는 1970년대 우리의 황금기 청소년시절. 그 시절은 해가 거듭될수록 삶의 무게에 짓눌릴수록 더욱더 그리워집니다. 이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우리 모두의 아름답던 추억과 소중했던 그 기억들을 떠올리며 지난시절을 回想해 봅니다.


▮  이야기 1972


나의 고교시절 여름방학은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남겨준 선물이었다. 당시 고교졸업 후에는 좀 더 고상한척 Summer Vacation이라 부르기도 했지만...


아련히 떠오르는 고교1년 시절, 경기도 의정부에 위치해있던 친구네 과수원 여름캠핑을 시작으로 나는 공부보다 노는 즐거움에 조금씩 익숙해지기 시작하였다. 50년 지기 나의 9명 친구들은 중2 때부터 중3 시절에 만나 우정을 나누며 맺어진 죽마고우이다.


1971년(고1) 친구들과 첫 여름캠핑을 계획하며 모아두었던 용돈을 몽땅 털어 동대문 만물시장을 찾아 군용(軍用) 텐트와 각종 캠핑 장비를 구입했는데, 당시에 장비라는 것들은 한국전쟁 때 미군들이 사용했던 반합(飯盒)과 프라이팬 정도가 전부였다.


지금껏 보관중인 캠핑장비 ('71년 구입)

방학시작과 함께 설레임으로 가득했던 의정부 캠프첫날, 일행들은 어설프지만 과수원 안에 2개의 텐트를 설치했다. 몇 놈이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설거지 당번을 자청했던 녀석들은 텐트에 남아 어설피 담배를 빨아대면서 연신 콜록대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군용 텐트

난생처음 부모님 곁을 떠나 처음 경험해본 호기심의 천국이었지만, 그날 비행(非行)을 저지른 놈들은 고지식한 범생이 친구로부터 밤새도록 쓴 잔소리를 들어야했다. 나는 당시경험을 통해 타락도 공부처럼 굳센 의지와 뚝심 없이는 완성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따가운 여름햇살이 머무는 시각, 과수원주변 풀밭 길을 휘도는 야트막한 시냇물과 파란하늘에 이파리가 젖어있는 아름드리 플라타너스가 그늘진 곳에 머물며 얄개들은 대형그물을 펼쳐들고 여울목을 몰아가며 개울가 가득한 민물고기를 퍼 올렸다.



서투른 붕어몰가 끝나면 과수원 동네 아저씨의 도움으로 들녘 모퉁이에 가마솥 걸어놓고 장작불 지펴가며 감자와 양파, 대파 잘라 넣고 잡아 올린 붕어와 미꾸라지 쏟아 부어 고추장 듬뿍 풀어 넣은 시골집 매운탕 맛에 모두들 흠뻑 빠져들었다.


과수원에 머무는 내내 녀석들은 어둑해질 때를 기다려 개울로 나가 들에 흐르는 작은 물줄기에 알몸을 담그며 미역 감고 물장구치며 늦은 밤까지 여름하늘 찬 별빛아래 끓어오르는 열정을 식히며 순박했던 17세의 청춘을 불태웠었다.



3박4일 캠프 마지막 날 밤은 일행 중 탈선을 우려하던 범생이(範生) 친구를 설득해 막걸리 파티를 강행했다. 저녁나절 막걸리를 받아올 친구를 가위바위보로 정했는데, 하필 내가 지목돼 어쩔 수 없이 동네마을을 홀로 나가게 됐었다.


아무도 따라나서지 않던 얄미운 놈들에 대한 원망을 뒤로하고 마을로 향하는 길은 칠흑같이 어두웠는데, 노란 양은주전자에 막걸리를 가득 담아 과수원 원두막으로 돌아오던 시골 숲길은 불빛하나 없던 캄캄한 적막에 쌓여 모골(毛骨)이 오싹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당시 가족 곁을 떠나 잠시 구속받지 않는 홀로된 자유로움을 만끽하며 호기심을 자극하던 일탈(逸脫)을 실행해 봄으로써 그 시절 나는 마치 인생을 터득한 듯 한 어른이 되어버린 착각 속에 서서히 타락의 길목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의정부 과수원

1972년 여름이 다가오면서 나는 학교생활 내내 지난해 과수원 캠핑을 거울삼아 색다른 캠프계획에 몰입하며 방학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고1시절 경험을 살려 좀 더 멋진 캠핑을 즐기려는 부푼 가슴은 푸른 바다 섬을 향해 속절없이 내달리고 있었다.



그 시절에는 고2 방학과 함께 시작됐던 군부대 1박2일 입소가 있었는데, 나는 내무반 옆자리 친구의 눈병이 전염된 채로 귀가하게 되었다. 퉁퉁 불어터진 시뻘건 눈을 걱정하던 엄마의 잔소리를 뒤로한 채 준비해둔 배낭을 챙겨 도망치듯 캠프로 달려갔다.


친구들과 함께 인천항을 출발해 작약도를 지나 물살을 가르며 도착한 곳은 영종도. 당시 영종도는 사람들에게 크게 알려지진 않았지만 인천항에서 배를 타고 20~30분간 들어가는 섬으로 수영을 할 수 있는 바다풀장이 있는 곳이었다.


선상(船上)에서

야영 첫날, 친구 녀석들은 나의 아폴로 눈병을 의식해 내 텐트에서 함께 동침하기를 꺼려했는데 그 때문에 나는 단독 텐트에서 외로운 밤을 쓸쓸히 지내야 했다. 그 시절  친구 놈들의 우정과 의리는 전염병 앞에서 마치 백약이 무효였던 것 같았다.


그날 이후 눈병은 점점 더 악화됐지만 놈들은 나를 위로해 주기는커녕 신나게 놀 것을 강요했는데, 당시 친구들은 여름철에만 발병하는 일탈 중증(重症)에 걸려 있었다. 나 역시 방학 중 해오던 선행학습은 뒷전으로 하고 노는 일에 더 열중하고 있었다.



영종도에 모인 녀석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머무를 텐트를 정한 뒤, 얼굴에 온통 흰 페인트를 칠하고 어깨 위로 담요를 걸친 뒤 머리에 코펠을 뒤집어쓰고는 저마다의 코스프레(Cosplay)를 연출하며 증명사진을 찍고 흥겨운 시간을 보냈다.


그 당시 고교시절 캠핑은 여학생 파트너도 없이 무엇이 그리 재밌었는지 지금도 이해가 되질 않지만, 한 학년이 오르며 늘 열공(熱工)을 다짐했던 겨울방학과 달리 여름방학은 규칙적인 학교생활을 벗어나 모처럼 해방감을 만끽할 수 있는 시간들 이었다.


영종도 얄개들(1972년)

캠핑이 끝나갈 무렵 나는 어느덧 눈병이 사라지고 있었는데, 서해바다 속을 헤집고 노는 동안 짠 소금성분이 치료를 해주었던 것 같다. 72년도 여름캠프 동안 하얀 파도를 타고 섬 주위를 맴돌던 녀석들은 그 시절 억제할 수 없는 중증의 향락병(享樂病)을 앓고 있었던 것 같다.


영종도 바다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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