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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Aug 03. 2021

몽산포 日記 (Ⅱ)

응답하라 1973


아스라이 기억 속에 사라져가는 1970년대 우리의 황금기 청소년시절. 그 시절은 해가 거듭 될수록 삶의 무게에 짓눌릴수록 더욱 그리워집니다. 이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우리 모두에 아름답던 추억과 소중했던 그 기억들을 떠올리며 지난시절을 回想해 봅니다. 

 

▮  이야기 1973


대학진학을 해야 한다는 절박감으로 고3시절은 캠프를 잠시 접기로 하였다. 유난히도 무덥고 지루했던 그 해 여름은 근면과 성실을 담보로 책과 싸워야만 했다. 큰아들의 열공(熱工)을 챙기기 위해 어머니는 고향집 아버지를 홀로 두고 고3기간 내내 서울집에 상주하셨다.  


고향 부모님은 사춘기인 나를 은근히 감시하기 위해 독(獨)선생을 붙여두었는데, 명문대 재학 중인 그 젊은 선생들 대부분은 부모님 지인자녀들 이였다. 당시 고교생활 3년을 누이와 둘이서 자취하고 있었는데, 과외지도 형들은 나의 학업 향상보다는 미대생(生)인 누이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갖었던 것 같다.


과외지도 형과 함께 (고1)

고교시절 내내 영수과목은 방과 후 개인과외를 통해 기초를 닦았다지만 예비고사를 위한 암기과목은 고3 한 해 동안 반복해 다져야할 몫이었다. 당시 예비고사는 지역별 커드라인 점수가 있었기에 대학 본고사에만 집중할 수가 없었다.


예비고사를 치룬 73년 겨울, 본고사 준비를 위해 종로소재 모 학원 단과(單科)반에 다니며 수업 후 저녁식사를 하려고 세운상가를 헤매다 충무로 분식점에서 이래저래 알게 된 배화여고 가시내를 만나게 되었다.

 


대학 본고사를 앞에 둔 그때도 나는 계속 일탈의 늪을 헤매고 있었고 여학생 3명과 짝을 맞추기 위해 같은 반에 순진한 친구까지 끌어들여 타락을 주도하였다. 당시 당구풍월(堂狗風月) 3년에 대학시험서 떨어진다는 생각은 아예 머릿속에 없었던 것 같다.


그 해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 저녁 무렵, 광화문사거리 한 제과점에서 가시내들과 만나 갈현동 친구의 집으로 향하며 1973년 달력을 며칠 남긴 채 긴 겨울밤 마지막 고3의 추억을 덧칠해 갔다.



이듬해 甲寅(74)年 초입, 나는 後期인 한의대까지 낙방하고 제2지망을 택해 공대로 진학을 하게 되었고 가시내 3명중 *혜양은 고려대, *재연은 한양대에 합격하였다. 그날의 남녀 3인은 각자 새로운 학교생활이 시작되면서 자연스레 이별을 하게 되었다.


그 시절 도시락 2개를 책가방에 넣고 다니며 자정이 되서야 겨우 집에 갈수 있었던 생활이 너무 지겨워 재수(再修)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중고시절 6년을 함께했던 시커먼 교복을 벗어 던짐으로써 해방된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듯 했으나 계속해 또 다른 타락의 유혹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필귀정 까닭인지 동반타락자들 일부는 재수를 택함으로서 74년 캠프는 경포대에서 몇몇 친구들과 함께 조용히 치렀고, 왠지 모를 아쉬움에 8월초 학교선배와 함께 [제부도]와 [대성리] 민박을 떠나 동갑내기 아가씨를 소개받고 연말까지 연애를 이어가기도 했다.


이듬해 재수한 친구들이 모두 진학하게 되면서 나는 [동반 타락자] 얄개들과 함께 대학에서 만난 [새내기 타락자]들을 뒤섞어 기막힌 추억을 만들고자 오랜 장고(長考)끝에 신선하고 짜릿한 캠프계획을 수립하게 되었다.


청평 대성리 (1974)

여름방학 동안 여성파트너를 바꾸어가며 함께 떠나는 2개 그룹의 연속캠프는 정말 신명나는 계획이었다. 따라서 이번 캠프에서 [타락 맴버] 수만큼 여성 파트너를 구해오면 여행비용 일체를 면해주겠노라 제안을 했다.


처음 본 이성들과 상견(相見) 후 함께 떠나는 여름캠프는 얼마나 짜릿할지 흥미로움이 더해가며 타락의 늪 또한 깊어만 갔다. 이윽고 [동반 타락자]의 한 친구가 8명의 파트너를 엮었다고 연락해 왔다.



때마침 K대 [새내기 타락자]들도 E대 무용학과 여학생들과 캠핑계획을 짜고 있어 흥미로운 연속캠프 계획은 차질 없이 진행돼 갔다. 나는 당시 나보다 한 살 많은 E대 무용학과 *영주에게 은근히 맘이 가 있었다.     


1975년 07월 24일, 그토록 기다리던 방학이 시작되면서 다음날 [새내기 타락자]들과 무용과 여학생 모임인 “짝 넷”은 2차 캠프를 위한 마지막 점검을 마무리하고는 커피 향을 즐기며 가벼운 마음으로 헤어졌다.


그날 저녁 장위동 동네어귀에 들면서 집을 향해 부지런히 발길을 재촉하는 순간 갑자기 둔탁한 거친 손이 등 뒤에서 내 허리를 비틀어 움켜잡았다.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파출소 경찰과 방범대원 이었다.



결국 나는 장발단속에 걸려 21번째 성스런 생일을 하루 앞두고는 부모님이 물려주신 머리카락을 싹둑싹둑 잘리는 수모를 당하고 말았다. 사실 나는 6월부터 학교 앞 체육관에 8월 캠핑을 위한 몸 만들기에 몰입해 있었다.


여학생들 앞에서 근육질을 뽐내고자 두 달간 열심히 땀 흘리며 노력해 제법 근육질의 몸을 만들어 놓았건만, 느닷없이 잘려나간 머리로 인해 나는 영락없는 비행(非行) 청소년의 거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1975년 07월 29일, 용산 시외버스 터미널에 모여든 동반타락자들은 버스에 올라 맨 뒤 칸에 자리를 잡았다. 열대여섯 명의 선남선녀들은 남녀구분 없이 뒤엉킨 채 정신없이 노래를 불러대며 떠나는 여행길의 즐거움에 흠뻑 빠져들었다.



제부도를 향한 낡은 버스는 차장 안내원에 이끌려 간혹 흙먼지를 일으키며 무심히 달려가고 있었다. 한참을 달려와 남양 읍쯤 왔을까? 갑자기 버스 중간좌석의 한 놈이 일어나더니, 조용히 하라고 냅다 고함을 질러대며 시비를 걸어왔다.


덜컹대는 차안에서 시골 양아치와 멱살잡이가 시작돼 이름 모를 중간 정류장에 끌려 내린 놈은 [동반 타락자] 일행의 뭇 몰매를 얻어맞고 분을 못이기는 듯 씩씩대더니 어디론지 이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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