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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Aug 05. 2021

몽산포 日記 (Ⅲ)

응답하라 1975


아스라이 기억 속에 사라져가는 1970년대 우리의 황금기 청소년시절. 그 시절은 해가 거듭 될수록 삶의 무게에 짓눌릴수록 더욱 그리워집니다. 이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우리 모두에 아름답던 추억과 소중했던 그 기억들을 떠올리며 지난시절을 回想해 봅니다.


▮  이야기 1975

1차 캠프  1975-07-29(火) ~ 08-03(日) : 그룹 파트너와 제부도  
2차 캠프  1975-08-05(火) ~ 08-09(土) : 짝넷 파트너와 몽산포  

     

제부도는 하루 2번 열리는 바닷길 사정으로 물 빠지는 때를 기다려 걸어 들어가는 섬이기에 그곳 주변에서 야영(野營)을 하고 다음날 새벽 출발해 목적지인 제부도에 이르렀다.


1975년 당시만 해도 제부도는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다. 이곳은 전년도에 선배 친척집에 잠시 머물며 야간 갯벌에서 게를 잡았던 묘미를 체험했던 작은 섬이었다. 이른 아침 시간임에도 여름 햇살은 마냥 뜨거웠다.

 

보관중인 70년대 일기장 기록

피서객들이 전혀 없었던 무인도 같은 바닷가 해변의 고독을 음미하며 파트너 엮을 생각에 몰입해있는 동안 정오의 태양은 더욱 끓어올라 작열하는 열기로 인해 모래밭 위로 마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착시현상이 느껴지는 듯했다.


저 멀리 가물거리는 조그만 물체가 하나둘 커져 보이는 것 같았다. 작은 눈을 가녀리게 찢어 저 멀리 바라보던 내게 점차 가까이 다가오던 것들은 빡빡머리에 쇠파이프와 몽둥이로 무장한 패거리들 이었다.


한순간 흉기를 거머쥔 수십 명의 놈들이 쏜살같이 덮친 순간 텐트가 무너지며 [동반 타락자]와 파트너 일행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아뿔싸, 버스에서 시비가 붙었던 마을 놈이란 생각이 스쳤다.     


제부도 백사장(1975)

초반에는 몇 놈씩 치고 박는 듯하더니, 내가 코피를 훔쳐 닦는 사이 자나 깨나 쿵푸실력 뽐내던 딱부리 놈은 머리통 일그러지고 약수동 촌놈은 앞가슴이 패이고, 큰 덩치 앞세우던 꺽다리 놈마저 모래밭 아래로 힘없이 무너져 버렸다.


전일 차안에서 큰 소란을 피우다 [동반 타락자]에게 얻어맞는 녀석이 사방이 바다였던 조그마한 섬에서 격투도중 빠져나갈 곳이 없음을 알고 동네인근 불량배들을 수십 명 모아 온 것이었다.


일행은 바다에 갇힌 터라 미처 손 쓸 틈도 없이 놈들에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 텐트 안에서 잠자고 있던 약수동 촌놈은 얼떨결에 쥐어 떠지고, 섬 동네 순경을 불러온다던 팔랑머리 꺽쇠 놈은 방향을 잃고 뜨거운 백사장 주변을 마냥 맴돌고 있었다.



그날 놀랍던 사건은 약수동 촌놈 가슴에 미국 대통령 얼굴이 박혀 있었는데 그 이후에도 그의 가슴에는 오래도록 “아이젠하워” 흉상이 벌겋게 남아있었다. 미화(美貨) 동전 패션목거리를 달고 있던 녀석 가슴에 놈들의 주먹이 꽂혔다나?


당시 동행했던 파트너들은 돌려가며 얻어터진 일행들을 보고 겁에 질려 한없이 울고 있었다. 어찌됐든지 우리는 패배를 인정하며 구급상비약으로 가져온 신경 안정제와 4홉들이 됫병 깡소주로 일말의 자존심을 삭힐 수밖에 없었다.



[동반 타락자]들은 늦은 새벽까지 동네 놈들의 자축 판에 끼여 원치 않던 소주병을 불어 제기고 있었다. 전일 차안에서 맞았던 놈은 기고만장해 자신의 별명이 장고(Django)라며 서울에 올 때면 명동을 자주 들린다고 지껄여댔다.


자정너머 밤이 깊어가자 혹시 모를 파트너들의 신상이 염려돼 일행일부는 술판을 빠져나와 텐트를 접고 해변 뒤편마을 인가로 몸을 숨기도록 하고, 새벽녘 바닷길이 열리는 틈을 기다려 제부도의 하루살이 꿈을 접은 채 몰래 섬을 빠져나왔다.


바닷길이 열리는 제부도

다음날 서울로 올라오는 차안에서도 일행들은 여전히 타락의 더듬이를 추켜세우며 멈추지 않는 욕망의 터널을 찾아 헤맸다. 이대로 캠핑을 포기할 수는 없고 어디서 어찌 신나게 놀 것인가에 몰두하며 일행 모두는 전날의 자존심 상해있던 모습이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 나의 친구들은 정말로 못 말리는 잊지 못할 영원한 [타락 동반자]였던 것 같다. 후일 명동에서 “장고” 놈과 마주치면 손봐줄 생각에 한동안 친구들과 명동골목을 뒤적여 봤지만 지금껏 놈을 만나보지 못했다.


동반 타락자 친구들 ('76년)

첨삭


1975년 제부도사건 이후 28년이 지난 2003년 6월, 미국에서 목회(牧會)를 하고 있던 고교동창 노목사가 [몽산포 일기]의  제부도 사연을 읽고 뜻밖에 회신을 보내와 무척 놀라웠는데, 그 사연을 옮겨봅니다.


『기명이의 정감어린 필치의 몽산포 일기를 잘 읽었다. 아무래도 우리들의 그때는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숱한 사건들과는 필링이 다름을 느끼게 된다. 고등학교 졸업 후, 흩어진 각자의 모습 속에서 일치된 모습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지만 이런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들의 또 다른 분신을 발견하게 되어 반갑고 기쁘다. 마치 또 다른 나의 이야기 같다.


몽산포 일기를 보면서 기명이가 언급하지 않은, 아니 언급할 수 없었던 이야기 하나를 삽입하고자 한다. 75년도 여름에 기명이 일행이 섬에 온 것을 목격할 수 있었던 나의 고백이다. 그 당시, 나는 교회 주일학교 중고등부 교사로 봉사하고 있었는데 그 교회 증고등부가 바로 제부도에서 수양회를 개최하고 있었다.


그러던 날, 어느 오후 우리 학생회 아이들 몇 명이 서울에서 캠핑 온 사람들이 싸움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아마 그 중의 누가 우리 학생들이 서울에서 온 것으로 알았기에 도움을 요청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리로 가 보았는데, 거기에 영선이가 침울한 모습으로 앉아있는 것이었다.


아마 제부도 섬사람들의 도움을 요청하려 했는데, 그것이 잘 안되었던 것 같았다. 나 역시 당황하여 이리저리 상황을 물어보았지만, 영선이는 잘 대답해 주질 않았다. 아마 주변의 어린 학생들이 있는데다 말하고 싶지 않은, 그리고 말해봐야 어떤 소용이 없다고 판단했기에 그러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나 역시 그러한 상황에서 그저 이곳 지서(支署) 사람들에게 협조를 구하라는 말 외는 다른 도움을 줄 수 없었다. 지금 그 몽산포 일기에 나오는 사건이 나로 하여금 바로 그때를 기억나게 하면서, 나 자신을 반성하게 해 주는 것을 발견한다. 그것은 “너는 그때, 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역할을 하지 못했는가?”는 물음이다.(누가복음 10장 25절 이하)


기명아, 그리고 그 때 어려움 속에 있었던 친구들아, 미안하다. 그 때 너희들의 아픔과 분노에 함께 해주지 못한 나를 용서해 주어라.』 2003.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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