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더 이상 설레지 않게 되면서
나는 뭘 하지 않아도 괜찮아졌다.
지도를 보지 않고,
어디를 가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냥 하루를 흘리듯 살아도
예전처럼 초조하거나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
그건 분명 무기력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무기력함 속엔
평온함 같은 게 섞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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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오후였다.
에어컨이 적당히 돌아가는 실내,
창밖에서 들리는 낮은 오토바이 소리,
가끔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
그 안에서 나는 그냥 멍하니 누워 있었다.
그런데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라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말은
“살고 싶다”는 말의 아주 조심스러운 변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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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의 삶은
늘 ‘견디는 것’이었다.
아침부터 움직이고,
다른 사람들의 속도에 나를 억지로 끼워 넣고,
숨 쉴 틈 없이 살아야 하는 그 도시.
그에 비하면
이곳은 너무나도 한가하고, 조용하고,
그 한가함이
‘낭비’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 순간,
내 안에서 하나의 오래된 바람이
조용히 되살아났다.
카페.
나는 지금까지 가장 오래 해온 일이
커피를 만들고, 음료를 정성스럽게 내리고,
고객과 말을 섞고,
공간을 정돈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여기 현지 카페들보다 내가 더 잘할 수 있어.”
더 깔끔하게, 더 정성스럽게,
그리고 무엇보다
더 따뜻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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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거창한 성공을 바라는 게 아니다.
그냥
‘오늘 하루 괜찮았어’라고 말할 수 있는 공간 하나,
누군가 조용히 머물다 갈 수 있는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나도 버티는 게 아닌, 살아가는 감정을 느낄 수 있다면.
그거면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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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살고 싶어졌다.
여행이 나를 구해주진 않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줬다.
그리고 그 위에,
나는 다시 무언가를 만들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