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어 엘리스 부셰. 낯선 프랑스식 이름과 기괴한 앨범 커버가 이국적인 느낌을 더하지만 그라임스라는 이름은 어쩌면 리스너들에게 친숙한 이름입니다. 3집 Visions가 그녀의 명성을 더하고 4집 Art angel로 평단의 찬사를 받기 전 2007년 평범한 맥길 대학에 재학하던 그라임스는 자신의 노래를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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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전위적이고 폭넓은 장르 폭과 달리 그녀는 친구 밴드의 백보컬 역을 대타로 맡으며 우연찮게 음악에 눈을 떴고 당시 음악의 새로운 방법으로 떠오르던 개러지 밴드를 통해 자신의 실험적 요소들을 음악에 녹여내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음악을 가장 잘 드러낼 단 하나의 용어를 찾게 되었고 자신의 트랙들과는 전혀 다르지만, 당시 마이스페이스에서 그라임(Grime) 태그를 보고 이를 자신의 음악적 표상으로 정의했습니다. 다행히 그녀의 음악적 색깔이 광범위하고 개러지 밴드라는 공통 기원을 가지고 있기에 그녀는 한동안 그라임 장르와 그녀의 예명의 연관성에 대한 확답을 피했지만 이제는 엄연한 음악적 자신의 일부로서 인정합니다.
► commodore ballroom - october 17 2012 grimes
전문적인 교육이나 정해진 틀 없는 음악의 길을 걸어온 그녀이기에 작사 작곡은 물론 프로듀싱과 앨범 아트 작업까지 자신이 혼자 작업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어쩌면 이는 음악적 날개를 개러지 록을 통해 길러오고 펼쳤기에 가능한 결과이고 이렇기에 그녀를 특정 장르에 묶인 아티스트라 분류하는 건 어쩌면 많은 논쟁을 낳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트팝, 신스팝, 드림팝 그리고 무엇보다 일렉트로니카적 요소가 장르 ‘그라임스’ 안에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며 그 비중과 메시지에 대한 정답은 그녀의 음악처럼 변화무쌍한 수많은 리스너들의 몫으로 남아있습니다.
►grimes - Geidi Primes, 2010
1집 Geidi Primes
그라임즈는 인터뷰에서 자신의 음악이 '포스트 인터넷'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음악을 접했고, 이러한 특징은 그녀의 음악이 장르와 장르를 넘나드는 음악을 할 수 있도록 합니다. 그녀의 초창기 앨범들은 종잡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그녀만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하는 데 성공합니다. 공간감을 조성하는 무수한 신디사이저와 그 외의 악기들, 울리고 퍼지고 겹겹이 이어지는 백보컬과 보컬, 그리고 굉장히 이질적인 사운드가 그녀만의 방식으로 해석됩니다.
►dune - frank herbert
1집의 디테일한 테마는 Frank Herbert의 SF 소설인 'Dune'에서 가져왔습니다. 초창기 앨범은 그녀만의 어둡고 몽환적인 감성이 3집까지 계속 심화되면서 부각됩니다. 1집의 트랙 1번 caladan은 몽환적인 백보컬과 일렁이는 피아노 사운드로 앨범을 시작합니다. 2번 트랙 Sardaukar Levenbrech은 동양의 전통음악을 떠올리게 하는 사운드를 가졌습니다. 통통 튀면서 전통적인 느낌의 현악기 소리가 배킹 트랙과 메인트랙에 이어집니다. 그녀가 여러 장르를 아우른 다는 것을 바로 2번 트랙에서 알 수 있겠습니다.
►the rialto theature (pop montreal 2010)
3번 트랙 Zoal, Face Dancer는 몽글몽글한 배킹 사운드가 매력적인 곡입니다. 보컬은 후에 나올 트랙들과 앨범에 비하면 굉장히 깔끔합니다. 그라임즈의 곡들은 몽환적이고 전위적인 느낌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보컬에 많은 이펙터를 쓰는데, 바로 그것을 5번 트랙인 avi부터 살펴볼 수 있습니다. 4번 트랙도 비교적 깔끔한 느낌입니다. 어찌 보면 예측할 수 없는 그녀의 스타일이 1집부터 정립되는 것은 쉽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해보면 이해가 빠릅니다.
7번 트랙인 gambang은 lo-fi 한 질감의 바로크 팝 풍의 트랙입니다. 바로크 풍의 멜로디는 이질적인 느낌이 들도록 깔끔하게 붙이지 않았습니다. 9번 트랙 grisgris는 강박적인 곡 구성으로 긴장감을 유발하는데, 트랙 10번과 11번의 마무리를 돕기 위해 이렇게 구성한 것 같습니다.
►grimes - halfaxa, 2010
2집 halfaxa
그라임즈의 사운드는 2집이 되어서 더욱 확고해집니다. 그라임즈는 이 앨범을 '중세 음반'이라고 칭했습니다. 그녀는 이 앨범이 중세 기독교의 경건함을 전자적으로 해석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혼란스럽고 갈피를 잡기 어려울뿐더러, 뭉개지고 흐릿해진 여러 소리가 여기저기로 퍼져 부딪혀 흩어지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무력한 상황에서 그저 믿고 따라갈 것은 부커의 목소리뿐입니다. 중세 시대의 교리를 보여주듯 이런 맹목적이고 강요적이고 몽환적인 사운드 속에서 청자는 공포스러움이나 환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라임즈의 목소리가 구원자, 혹은 미지의 것처럼 들리기 쉬울 겁니다.
►grimes at the showbox
의미를 알 수 없는 목소리가 계속 이어지는 것도 굉장히 이 앨범을 신화적이고 주술적으로 만들어줍니다. 여러 트랙은 흐릿하게 시작해서 강렬하게 끝나기도, 강렬하게 시작해서 흐릿하게 끝나기도 하며, 조금의 변화로도 그라임즈의 주술적인 목소리에 빠져있는 청자는 변화를 크게 느끼고 혼란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트랙 6번의 Sagrad Прекрасный 를 들어보시면 초반부엔 종잡을 수 없는 흐릿한 이미지의 사운드의 연속이었다면, 도입부 이후로는 빠르고 강렬한 비트 위에서 장엄하고 명확한 신스가 깔립니다. 8번 트랙 Devon은 촤라락 쪼개지는 비트가 인트로에서 펼쳐지고 흐릿하게 곡이 변합니다. 9번 트랙도 마찬가지로 고풍스러운 분위기로 강렬하게 시작하고 흐릿하게 전개됩니다. 9번 트랙인 Dream Fortress는 바로크 풍의 사운드로 그라임즈의 고딕스러운 면모도 가감 없이 보여줍니다.
두 번째 앨범에서 그라임즈는 자신의 스타일을 확고히 만들었습니다. 전작도 훌륭했지만 그녀가 자신의 목소리를 더 효과적이고 창의적으로 만들고, 겹치는 데 성공합니다. 음악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합치는 방법도 더 능숙해졌습니다. 14번 트랙에서 건조한 퍼커션과 슬픈 분위기를 자아내는 보컬로 시작되는 My Sister Says the Saddest Things에서 쓸쓸한 느낌을 주는 15번 트랙 Hallways를 지나 엔딩 트랙인 16번 Favriel에 도착했을 때의 완성도는 그녀가 앞으로 만들 세계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하는 매혹적인 진행이었습니다.
►EP. Grimes & d'Eon - Darkbloom, 2011
ep darkbloom
그라임즈는 다음 해 d'Eon과 함께 darkbloom이라는 ep를 냅니다. 이 앨범 특징이라면 그라임즈가 굉장히 귀여워집니다. (.....) 첫 트랙 Orphia에서는 신경질적인 현악기로 시작합니다. 2번 트랙 Vanessa부터 그라임즈의 귀여운 백보컬을 들을 수 있습니다.
►crystal ball live at sxsw (2011)
3번 트랙 Crystal Ball에선 감미롭고 편안한 멜로디로 정말 추천하는 트랙입니다. 초창기 그라임즈의 음악은 전위적이고 종잡을 수 없는 진행방식으로 진입장벽이 낮다고는 할 수 없는데, 이 트랙은 그나마 편하게 그라임즈 음악이 뭔지 맛볼 수 있는 트랙 같습니다. 게다가 이 트랙도 그라임즈가 귀엽습니다. 5번 트랙 Hedra에선 굉장히 강박적인 비트로 시작했다가 편안한 분위기로 돌아섭니다. 굉장히 과감한 변주가 돋보입니다.
5번 트랙까진 그라임즈의 작품이었고, 그 이후의 트랙은 d'Eon의 작품입니다. 6번 트랙인 Telepathy는 신디사이저의 화려한 사운드가 부각됩니다. 거기에 조잡한 기계음까지 더해져서 전위적인 분위기를 이어가려는 모습입니다. 7번 트랙인 Thousand Mile Trench는 따뜻한 신스와 종소리가 온갖 이펙터를 먹인 차가운 보컬과 대비되는 트랙입니다. 신스와 종소리가 중간중간 빠졌을 때의 차가움과 허전함은 이 트랙을 더 강렬하게 만듭니다. 8번 트랙 Tongues에서의 lo-fi 한 느낌도 받을 수 있습니다. 9번 트랙인 Transparency에선 메인 멜로디가 몽환적으로 잘 짜여 곡을 이끌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