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일년이 지나 나도 학교에 갔다.
까마득한 운동장 가득 모인 학생들은 서른명 남짓
입학생 다섯 중 난 유일한 여자아이였다.
함양읍 휴천면 남호리 화남분교.
어쩐지 학급은 모두 다 1반 뿐인 이 낡은 교정에서 나의 첫 학교생활이 시작되었다.
유난히 운동장이 커보일 정도로 간소했던 학생들은 두 학급당 선생님 한 명이 담임을 도맡아했다. 지금생각해봐도 굉장히 획기적인 방식이었다. 하지만 올림픽정신으로 뭐든지 가능했던 1988년도였다. 머리가 유난히 길고, 유일한 젊은피였던 우리반 여 슨상님은 1학년과 3학년 사이에서 수업시간 내내 연극배우 처럼 바빴다. 1학년에게는 좀있다 받아쓰기 시험을 본다며 글자 공부를 시키고, 3학년한테 가서는 뚱땅뚱땅 풍금을 치며 -3월 하늘 우러러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아-노래를 가르쳤다.
나는 기억 니은 디귿 리을.. 한 글자 한 글자 공책에 꾹꾹 눌러쓰고 있으면서도 자꾸만 입으로는 어쩔 수없이 노래를 따라 불렀다. 언니의 목소리가 들릴때마다 키득키득 웃었다. 천장에 매달아 놓은 얇은 천 자락 하나로 그렇게 한 교실 두학급은 서로의 학습진도를 따라가며 선생님의 땀방울로 영글어가고 있었다.
학교 앞 슈퍼에는 신기하고 맛있는 게 참 많았다.
한 달에 한번 식료품트럭이 들어와야 까까라도 먹을수있던 시골환경에서 슈퍼는 우리에게 펼쳐진 최고의 놀이동산이었다. 언니와 나는 차비 50원으로 입가에 행복을 채우고, 기꺼이 10리나 되는 거리를 두다리에게 양보했다. 어쩌다 지나가는 관광버스에 손을 번쩍 들면 운좋게 얻어타고 가기도 했고, 읍에서 돌아오는 동네어르신 트럭 뒷자리에도 앉아 갈수 있었다. 할머니에겐 운동화에 흙을 잔뜩 묻혀와 잔소리를 들었지만 50원의 행복을 놓칠 수는 없었다.
갑자기 폭우가 심하게 내리던 날이었다. 할머니는 상기된 얼굴로 비가 들이치는 마루에 앉아 연신 담배를 피워댔다. 핵교마치고 벌써 집에 왔어야 할 언니가 연락도 없이 사라졌다.
"아직도 안왔능교?"
비에 잔뜩 젖은 우비차림의 복식이 할배와 지훈이 오빠야가 할머니집 대문을 열고 들어왔다.
"에헤이 뭔일이고. . 지금 물 억수로 뿔어가꼬 마 다리도 몬건넌게 해놔뜬데"
우리 마을을 가로지르는 엄천강은 비가 오면 엄청난기세로 물살이 불어나 익명사고가 많은 악명높은 강이었다. 지난 여름에도 놀러온 사촌오빠 친구가 빠져죽었다.
복식이 할배도 할머니 옆에 앉아 담배를 물었다. 쏟아치는 빗줄기 사이로 근심이 연기처럼 피어올랐다.-언니는 오늘 은희언니야랑 다른 친구들하고 걸어온다꼬 내보고만 버스 타고 가라 했어요-
나는 아까 언니친구들한테 괜히 질투도 나서 할머니한테 일러바치듯 그렇게 말하긴 했는데 언니는 여태깜깜무소식이다. 안 그래도 그즈음 인신매매범이다 뭐다 납치사건이 빈번해서 학교에서도 모르는 차가집까지 태워준다그러면 잽싸게 도망가라고 교육까지 시키던 시기였다.
때르르르릉
밤 9시쯤 적막을 깨고 전화벨이 천둥처럼 울렸다.
- ( . . .)
"니 가시나! 니 어데고?"
할머니는 벼락처럼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동시에 허물어져가던 가슴을 쓸어내렸다. 언니는 윗동네 은희언니집에 가서 저녁도 먹고 시간 가는줄 모르게 놀다가 한숨 깜빡 잠이 들었었는데 일어나 보니 사방이 깜깜해져 지레 겁을 먹었다고 했다. 지훈이 오빠야가 빗속을 뚫고 오토바이로 언니를 데리고 왔다할머니의 성격을 아는 복식이 할배는 잘 돌아왔으면됐다고. 많이 혼내지말라며 할머니에게 신신당부를 하곤 돌아갔다. 할머니는 옷걸이 위에 올려져 있던 대나무 회초리로 그날 처음 언니를 때렸다. 항상 방바닥에만 내리치면서 우리에게는 겁만 주던 회초리였는데.. 내려칠 때마다 회초리가 언니처럼 윙윙 울었다. 걱정되서 전화가 온 아빠에게 할머니는 저 문디 가시나들 때문에 못살겠다며 빨리 데리고 가라 악다구니를 질렀다. 수화기너머는 한동안 조용했고 우리도 이불속에서 번갈아 끅끅 딸꾹질을 했다.
다음 날 말 없이 밥상에 둘러 앉았다.
텔레비젼에는 요리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오늘의 요리는 떡볶이였다. 화면 가득 생동감이 넘치던 그 빨간떡볶이 비쥬얼에 손녀들은 화면을 반찬삼아 침으로 가득 밥을 삼켰다.
점심때 할머니는 읍내에 다녀오겠다며 채비를 했고,그 날 저녁 부엌에는 생전 처음 맡아보는 냄새가 났다. 이윽고 할머니는 저녁상으로 탄내가 가득한 후라이팬을 통째로 가져왔다.
이것은 제 2의 회초리일까..
음식의 위엄에 기가 짓눌려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으니 할머니는 이따시만한 시뻘건 가래떡 하나씩을 젓가락에 꽂아 우리에게 쥐어주었다. 화면에서 봤던 떡볶이는 한입에 쏙쏙 잘도 넣던데 우리는 손목만큼 굵은 가래떡을 들고 한창 씨름을 하며 먹었다. 연신 물을 마시고 헐떡거릴만큼, 짜고 매운떡볶이였지만 그순간만큼은 이세상 어느 음식보다도 꿀 맛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국물도 없이 기름에 외간장과 고춧가루를 볶아 가래떡에 묻힌 기름떡볶이 같은 모양새였지만 아직도 그 맛이 생생히 기억이 난다. 할머니는 난생 처음 해 본 서툰 요리로 회초리의 미안함을 건넸다. 1시간 버스를 타고 나가야 있던 읍내였다. 읍내라고 해서 재료를 다 구할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 할머니의 수고와 마음을 담은 음식에 우리도 눈물,콧물을 쩝쩝거리며 맛있게 화답했다.
내가 삼 학년으로 올라가던 날 아빠는 트럭대신 반짝거리는 검은차를 타고 다시 왔다. 어딘가 어색한 뒷자석에서 멀리 사라져 가는 할머니를 눈으로 좇았다. 할머니의 풍경이 길 끝으로 사라졌다. 눈물이 날것 같았지만 아빠에게 왠지 들키고 싶지 않았다.
중학교 국어시간 글쓰기 수업 숙제로 할머니와의 이야기를 발표한 적이 있었다. 내가 한줄 한줄 읽어 내려갈때마다 친구들은 와~하는 감탄사와 함께 신기한 눈망울로 이야기에 집중했다.
발표가 끝나고 국어 선생님은 특별한 기억을 만들어준 할머니에게 많이 감사해야겠다 라고 하셨다. 일곱살 눈에 비친 할머니의 세상은 촌스럽고 불편하기짝이 없었는데 어느새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반짝거리는 보석함이 되어 있었다.
나중에 할머니의 장례가 끝나고 할머니의 짐을 정리하러 간 날, 손끝에 닿는 대문의 감촉과 그 공간의 냄새가 나를 끌여들였다. 할머니의 방은 그 시절 그대로였다. 낡은 장롱, 오래된 이불 냄새, 그릇 하나, 컵 하나에도 시간이 고여 있었다. 그 모든 게 아직 할머니의 체온을 품고 있는것 같았다. 회초리가 올려져 있던 벽옷걸이, 아궁이에 그을린 방바닥자국도그대로였다. 고모들이 방에 들어와서 나는 부엌정리를 핑계로 나와버렸다. 누구라도 그 방에서 눈만 마주쳤다면 기어코 또 울음 바다가 되었을 것이다. 다들 최선을 다해 참고 있었다. 그러나 할머니 부엌 찬장을 연순간 나도 모르게 엉엉 주저앉아 울어버렸다할머니가 사용하시던 반찬통들이 그대로있었다.
너무 익숙했던 기억을 마주한 반가움이었는지,
아니면 그날 그렇게 홀랑 차에 올라타버린게 미안해서였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찬장을 연순간 아들의 상처받은 세월과 어린 두 손녀를 감내해야했던 할머니와 그 모든 우리의 시간이 겹쳐서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고모들이 부산한 틈을 타 마당에 나와 수돗가 옆에 앉았다. 흐드러지게 핀 맨드라미는 그 자리에 여전했다. 모든게 흑백처럼 바래지더라도 자기만은 기억되기를 바라는듯이 그 자리를 지켰다. 할머니도 늘 이곳에 있었다. 그 시간이 마냥 영원할 줄 알았던 우리는 자주 핑계를 앞세웠고 결국 늦어버렸다. 나는 그 시절 할머니의 세상에서 자라났다. 가난했던 시간 속에서도 그 세상이 나를 길러냈다. 할머니와의 추억들은 나의 어릴적 그 자체이자 부심이다. 그 이야기속에서 할머니는 영원히 지지 않는 맨드라미가 되길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