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문은 김갑순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얼굴은 영판 어머니였지만 안쪽은 흐르는 골수까지 아버지를 빼다박았다. 피가 더운 아버지는 노름을 하고 술을 벗 삼았다. 동네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한량이었다둘째 아들이 월남전쟁에서 벌어온 목숨값으로 불어난 살림과 논들이 탐욕스러운 노름 괴물의 손아귀로 들어갔다. 대나무숲 아래 낡은 초가집 한 채는 마지막 최후의 보루였다. 더 이상 물러날 곳 없는 그곳에서 오래 살길 바라며 목숨명을 붙여 지은 이름이 무색하게 아버지는 제 명보다 짧게 세상을 떠났다. 손이 닳도록 올렸던 어머니의 기도도, 부처님도..
결국 아버지를 버렸다.
점문은 두 형들과 달리 공부에는 뜻이 없었다. 그저 들로 산으로 뛰어다니며 손톱 밑이 새까매지도록 떠돌다 집에서는 시체처럼 잠만 잤다. 타고난 넉살로 동네 어르신들의 논일과 잡일을 도왔다. 갑순은 그 넉살 너머의 혈기를 두려워했다. 언젠가 아들이 집을 떠날 것을 알고 있었다. 그저 잠자코 염주알을 돌리며 치성을 드릴 뿐이었다
이후 부산으로 상경한 점문은 덤프트럭을 몰았다. 일주일마다 종종 머리나 감으러 들린 아는 형님 이발소에서 이양을 처음 만났다. 이양은 꺼부정한 큰 키에 유난히 얼굴이 까매서 허연 이빨을 드러내 웃던 사내가 맘에 들지 않았다.
"내랑 언제 밥 한번 먹어줄랑교?"
올 때마다 점문은 꾸준히 들이댔다. 그 넉살에 마지못해 나간 세 번째 데이트날 밤, 언니가 생겼다. 둘은 결혼식도 올리지 못했다. 아빠나이 스물여섯. 엄마나이 스물여덟이었다. 결혼도 얼떨결에 했다. 엄마 아랫동생이 결혼할 때가 됐는데 언니 먼저 가기는 그렇다고 아예 합동결혼식을 하자고 제안했다. 결국 이모결혼식과 30분 터울로 잡곡밥 취사보다 빠른 스피드 결혼식을 올렸다. 하객들은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시작부터 아빠는 엄마에게 서러움만 주었다. 술을 안 마시고 들어오는 날이 없었고, 회사에 들어가서도 제대로 된 월급봉투 한번 가져다주지 않았다 한 날은 통닭을 사온다기에 잠도 안 자고 기다렸는데 아빠는 술에 취해 구멍이 뻥 뚫린 노란 봉투만 쥐고 들어왔다. 찬 겨울 길바닥에 뒹굴고 있을 불쌍한 통닭생각에 우리는 밤새 빽빽 울었다. 엄마는 결국 7년을 버티다 아빠와 헤어졌다.
우리의 거처는 할머니의 집으로 정해졌고, 둘은 우리를 서로 데려가려 죽을힘을 다해 돈을 벌었다. 엄마는 계절마다 우리가 입을 새 옷을 사서 부쳤다. 아빠는 달마다 할머니에게 돈을 부쳤다. 할머니는 아빠의 손을 들어주었다. 어떻게 보면 처음부터 불리한 엄마의 싸움이었다.
1992년, 제천봉양읍에 신축 아파트가 들어섰다.
108동 908호가 우리집 이름이 되었다. 초인종 소리가 신기한 집을 언니와 나는 정신없이 뛰어다녔다언니 방에는 침대와 예쁜 책상이, 내 방에는 맑고 고운 소리의 영창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철없음은 이토록 단순한 걸까. 눈앞의 풍경에 우리는 할머니도 엄마도 금방 잊었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이 행복이라고 덜컥 믿어버렸다.
아빠는 그야말로 탄탄대로를 달렸다.
충주댐 밑에서 가장 큰 가두리 양어장을 운영하던 회장님의 눈에 들어 일을 전적으로 맡게 되었다. 아빠의 지갑은 반으로 접히지 않을 정도로 뚱뚱해졌다베란다에는 80개의 난초가 들어섰고, 거실 장에는 수석이 빼곡했다. 밤마다 화장실에 갈 때면 박제된 꿩과 오소리들이 우리를 노려보았다.
아빠가 어딜 가던지 사장니임~ 하며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나는 부족할 것 없는 사랑을 받았지만 한편으론 아빠의 팽창이 불안했다.
번영은 오래가지 않았다.
1997년 정부의 수질오염 방지 대책으로 가두리 양식 면허 연장이 중지되었다. 폐업한 주변 양식장에서 버린 물고기들이 썩어가며 악취가 진동했고, 아빠의 향어 수천 마리도 전염병으로 폐사했다. 결국 충주댐의 모든 양어장은 전면 폐지 결정이 내려졌다아빠의 세계는 거대한 파도를 맞은 배처럼 빠르게 침몰하고 있었다.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처럼 독촉장이 쌓이더니 이내 수도와 전기가 끊겼다.
막무가내로 신발을 신고 들어온 검은 무리들은 수석진열장과 족제비 머리, 나의 영창피아노 앞에 빨간딱지를 붙였다. 그것들은 아빠의 모든 걸 빼앗아갔고, 우리에게서 아빠를 빼앗아갔다.
1997년 겨울, 일주일 연락이 없던 아빠는 철거를 앞둔 양어장 숙소에서 발견되었다.
발전기도 멈춘 영하의 그 강 한가운데서 아빠가 붙들려던 마지막은 무엇이었을까.
불야성 같았던 아빠의 세계가 깜깜해졌다.
불이 꺼진 뒤의 물은 생각보다 빨리 식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