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겨울 이른 첫눈이 왔다.
한 없이 펼쳐진 눈밭을 걸었다. 발이 푹푹 빠졌고, 감각이 무뎌졌다. 버스가 머뭇거리듯 옆으로 지나갔다. 풍경이 나인지 내가 풍경인지 모를 만큼 무작정 걸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겨울, 나는 그렇게 첫 가출을 했다.
아침 뉴스에는 15대 대통령이 선출되었다는 소식이흘러나왔다. 밥을 씹으며 화면 가득 나온 대통령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삼촌 딸은 원래 자기 방이던 내 방에서 납작 엎드려 그림을 그렸다. 자기 영역을 지키려는 다섯 살짜리의 텃세는 매서웠다. 그녀와 숙모 사이에 또 싸움이 붙었다. 나는 서둘러 밥그릇을 싱크대에 넣어놓고 마당으로 나왔다. 아파트에서 급히 나온 가구들과 아빠의 남은 짐 위로 눈이 소복이 쌓이고 있었다. 삐뚤게 처박힌 책상 서랍을 열자 어수선한 종이 묶음이 나왔다. 내 상장들이었다. 이제 이걸 보고 기뻐해 줄 사람은 없다. 불쏘시개 드럼통 안으로 서랍째 탈탈 털어 넣었다. 잠바만 걸친 채 숙모의 물음을 뒤로 하고 무작정 집을 나섰다.
삼촌집은 우리 아파트 옆동이었다. 양어장 일손이 바빠지자 아빠는 막내삼촌을 불러 일을 시켰다. 일만 시키고 돈만 벌게 해 줬으면 좋았을걸.. 보증을 세워 아빠빚까지 갚게 만들었다. 쫓겨나 살고 있는 컨테이너 집에서 숙모는 어떤 심정일까. 그 남은 에너지를 끌어모아 내 밥을 차려주고, 내 교복을 다려주는데 그 설움에 기어코 일을 보탰다. 겨울방학의 끝자락에 숙모는 1톤 용달을 불러 내 짐을 실었다.
_너희 엄마한테 가서 지내라
그게 서로 좋을 것 같다_
나도 모르는울 엄마 연락처는 어떻게 알았을까..
엄마는.. 어디 있을까
수수께끼로 가득 찬 도로를 달리고 달려 큰 절이 유명한 어느 마을에 도착했다. 소식을 듣고 엄마가 달려 나왔다. 용달값 20만 원을 달라는 기사님 말에 엄마는 기가 찼다. 수화기 너머로 숙모와 엄마가 싸웠고 난 1톤짜리 짐이 된 것 같아 몹시 무안해졌다. 언니가 짐 푸는 걸 도와주었다. 언니는 이미 2년 전부터 엄마 쪽으로 와서 살고 있었다. 그날 밤 어색한 방안에 누워 앞으로의 일을 생각했다.
(내일 일어나면 엄마한테는 학교 그만 다니고 돈 번다고 해야지) 할 말을 밤새도록 마음속에서 꺼내고 다시 집어넣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다음 날, 엄마가 먼저 말을 꺼냈다.
“다음 주 월요일에 학교 가보자. 교복도 얻어놨으니, 너는 아무 생각 말고 공부나 해라.”
혹여 내가 잠꼬대를 했을까..엄마는 마치 내 속을 들여다본 듯했다. 일곱살이후 다시 만난 딸을 엄마는 조용히 안았고, 나는 다시 여고생이 될 준비를 했다.
전학 간 학교는 마침 봄방학이 시작되는 날이라 어수선했다. 이 경상도 시골마을의 학교는 조선시대도 아닌데 귀밑 삼센티 단발령이 있었다. 그중에 나는 유일한 커트머리여서 전학 온 첫날부터 조회대 위로 불려 올라가 전교생이 다보는 앞에서 학주에게 머리 모양으로 혼이 났다.
"하여튼 간에 봄방학 끝나믄 느그 지켜볼테잉까네
(나를 가리키며) 머리꼬라지 요래가 댕기지마라이! 즌학생 니는! 한 달에 한번썩 내한테 검사맡으러 온나!"
그렇게 나는 졸지에 전교생에게 ‘문제 있는 전학생’으로 각인되었다. 사고를 쳐서 왔다는 둥, 1년을 꿇었다는 둥 가짜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다. 일진 언니들은 내가 지나갈 때마다 3층에서 양말을 던졌다. 나중에야 친구들에게 들었지만, 그게 “줍고 올라오라”는 신호였다고 한다. 출제자의 의도를 몰랐던 나는 매번 본의 아니게 생을 깠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엄청난 깡으로 해석이 되었고, 다행히 더이상 나를 건드리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일련의 사건들로 깊어진 내 눈빛은 그들에겐 측정불가한 드래곤볼의 스카우터이자, 갑자기 나타난 낯선 썅년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나는 나대로 사정이 있었다. 인사도 못하고 갑자기 온 전학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을 못본다니 정말 나의 우주가 무너지는것만 같았다. 낯선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는 삐삐만 노려보며 하루를 버텼다. 쉬는 시간마다 다른 반 아이들이 창문에 몰려와 구경했고, 말을 시켜보고 가방을 뒤지기도 했다. 전학생이 드문 학교에서 나는 완벽한 구경거리였다. 정글에 떨어진 모글리 같았다. 시간이 흐르자 내 곁에도 발루와 바키라가 생겼다. 마음을 열고 다가와 준 친구들은 낯선 정글을 건너가는 다리가 되어주었다.
첫 여름방학, 엄마에게 허락을 받고 제천으로 향했다. 삐삐와 편지로는 담기지 않는 우정의 1테라바이트를 다시 채우러 가는 길, 새로운 친구들도 함께 가고 싶다며 동행을 요청했다. 열여덟의 여름, 우리는 서로의 세계를 마주할 생각에 들떠 있었다.
예전에 자주 가던 떡볶이집, 오락실, 노래방을 순회하며 금새 친해졌다. 그러나 곧 헤어질 생각에 마음이 다시 가라앉았다. 남은 기차시간을 때우며 커피숍에서 파르페를 휘젓고 있을때 누군가 타임캡슐을만들자고 했다. 우리는 급히 전에 다니던 고등학교로 달려갔다. 가방 속에 있는 다이어리와 수첩에 나름 개인적인 저마다의 편지를 적어 갔다. 그리곤 천재지변에도 끄떡없을 나무하나를 골라 그 아래를 삽도 없이 돌로, 주변에 잡히는 무언가들로 열심히 팠다. (간첩신고가 안 들어간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그리곤 행여나 편지가 썩을까 봐 누군가 가지고 있던 생리대 날개형에 편지를 돌돌 말아 넣고 비닐로 한번 더 꽁꽁 감쌌다. 각자 소지품도 넣고 그날 쓴 영수증과 기차표도 넣고 넣을 수 있는 건 껌종이까지 다 넣었다. 100년이 지나도 썩지 않는 생리대의 힘을 믿고 1998년 매미가 지독하게 울던 여름,우리는 그렇게 타임캡슐을 묻었다.
이 이야기가 벌써 30년이 다 되어간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파볼 생각조차 못 했고, 아니 일단, 어딘지 기억이 안난다.(ㅎㅎ) 우리의 이야기가 빗물로 씻겨 흙으로 스며들어 어디론가 자유로이 떠돌고 있을 생각을 하니 살짝 부끄럽고 뒤늦게 그 나무에게 미안하다. 친구들은 기억하고 있을까?
어른이 되고,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고 각자 살아내느라 우리는 서로의 타임캡슐이 되었다.
돌아보면 지독한 겨울이었고, 찬란한 여름이었다. 아빠를 잃었지만 엄마를 만났고, 일찍 찾아온 계절처럼 빨리 어른이 되어버렸다. 최근 글을 쓰며 내 안의 감정 서랍들이 덜컥 열렸다. 흐트러져 누워 있던 감정들이 흘러나왔고, 알고 싶지 않았던 기분도 마주하게 됐다. 어렸던 나는 서로의 아픔을 저울질하며 스스로 추를 달고 깊이 가라앉았다. 혼자가 된 순간에 갇히고, 또 갇히는 꿈을 여전히 꾼다.
어느 날 엄마와 긴 이야기를 나눴다.내 안에서 해소되지 않던 결핍은 결국, 그 시간 속에서도 사랑이 존재했느냐는 물음이었다. 엄마의 시간도 많이 아프고서글펐다. 부모님은 위기 속에서도 우리를 사랑하지않은 순간이 없었다. 내 나이가 어느새 그때의 부모님 나이가 되어가서야 그 대답을 듣는다. 우리는 기억을 공유하며 서로의 이야기 속에서 위로받는다.
미움과 원망만큼 아까운 것도 또 있을까.
서랍을 다시 끼워 맞추고 반듯하게 정리한 책상에 앉아본다. 글을 쓰며 멈춰 있던 시계가 다시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