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브라질월드컵 최종 예선전인 한국 VS우즈베키스탄의 경기가 열리던 날 함성소리와 함께나의 첫 번째 가게가 오픈했다.
달달한 밤이었다.
제주도를 떠나온 날 이후로 닥치는 대로 장르를 가리지 않고 일을 했다. 매운 불닭집에서 칵테일을 만들어 팔기도 했고, 쇼를 하는 팀에 들어가 백화점, 오픈가게, 게임행사 등등에 초대되어 바텐딩행사도 뛰었다. 와인회사에 취직해 와인도 팔고, 연예인이 하루 걸러 오는 가로수길 펍과 대형마트 주류판촉도뛰었다. 저마다 장르는 달랐지만 술이라는 커다란 카테고리 안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그런 나에게 기회가 왔다.
언니와 어렸을 적 부터 꿈꾸며 이야기했던 것은 함께 예쁜 카페를 운영하는 것이었다. 그런 고민을 카페에서 했었어야 됐는데 우리는 종종 가게에 대한 궁리를 모색하며 둘만의 술자리를 지주 갖다가 그만그 당시 한참 유행하던 스몰비어집에 꽂히게 된 거다. 맥주 맛있어. 안주 저렴해. 매장 귀여워
어? 우리 이런거 해보자!
순식간에 우리의 계획은 바뀌고 목표가 정해지자 속도가 붙었다. 물론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장르여서 자신감도 열정만큼 솟구쳤다.
이곳저곳 가게자리를 물색하다 대학가의 10 평남짓되는 곱창집을 계약했다. 손 볼 곳이 많은 공간이었지만 왠지 끌렸다. 때마침 인테리어 일에 발 담그고 있던 바텐더선배의 도움을 받아 줄자를 일일이 대며 본격적으로 인테리어공사를 들어갔다. 또 을지로를 내 집 드나들듯, 직접 쓸기구들과 소모품, 술잔 하나하나까지 모든 것에 신경을 쏟았다. 3시간 동안 조명가게 카탈로그를 뒤지며 구매한 예쁜 조명들이 영롱한 빛으로 켜지던 날
드디어 달달한 밤이 오픈했다.
가게의 콘셉트는 소규모 맥주집이었다. 술과 메뉴전반, 가게 컨셉까지 아이디어를 내는데는 이미 언니와 나는 선수였다. 동네에 조그맣게 생긴 귀여운 술집은 금방 사람들의 관심을 사로잡으며 유명해져 버렸다. 출근 전부터 가게문턱에 참새들처럼 손님들이앉아있었고 새벽 4시, 심지어 마칠 시간이 되었는데도 손님들은 매장에 가득 차 나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하루 정신없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가게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명치가 턱 막힌 듯이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시끄러운 음악소리, 사람들의 저마다 왁자지껄 대는 소리에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식은땀이 났다. 이 공간이 굉장히 낯설게만 느껴져 서둘러 탈출하고 싶었다.
바깥에 나와 숨을 돌리고 있으니 언니와 알바생이 얼굴이 허옇게 질린 나를 보며 괜찮냐고 했다.
나는 체한 거 같다며 손을 따고 소화제를 마셨다. 그땐 진짜 급체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일주일뒤 새벽, 자다 일어나 온몸이 저리고 방안이 나를 옥죄여 오는 기분이 들어 숨을 못 쉬게 되자 나는 결국 구급차에 실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온갖 검사를 해봐도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진료를 권유받은 정신건강의학과에서
공황장애란 진단을 받게 되었다.
덜컥 겁이 나고 숨고 싶어졌다. 대중교통, 심지어 엘리베이터를 타는 일조차 무서워지고, 집 밖으로 100m를 나가는 일조차 힘들었다. 왜 나에게 이런 이상한 병이 생겼는지 알 수 없어 두려움에 눈물만 났다. 잘하고 있다고 모든게 다 잘 돼 가고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낮밤이 바뀐 생활을 10년 이상하며 몸 컨디션이 많이 나빠지고 장사를 시작하며 알게 모르게 받은 스트레스 때문에 망가진 몸이 신경질을 낸 것이다.
사실 그동안 언니에게 자존심이 상해 얘기를 못했지만, 나는 손님들을 대면하는 것이 버거웠다. 지하철 1호선의 단소살인마를 능가하는 진상들은 나의 인류애를 박살나게 했고 여자사장들이 운영한다고 미친짓하는 인간들도 많아 경찰을 부르는 일도 허다했다. 손님들에게는 애써 쿨하고 멋진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행동들을 하다 보니 마음속에 콜티솔이 조금씩 쌓여 곪아버린 것 같았다그래도 내가 오랫동안 해왔던 일이라 자신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그냥 오래 했으니 잘하는 일이라 착각한 것뿐이었다.
언니는 포지션을 바꿔보자고 했다.
그날부터 나는 안쪽에 들어가 음식을 만들고 가게전반에 관한 것들을 서포터 했고 언니가 홀에서 손님들을 응대하고 관리했다. 결과는 아주 순조로웠다. 어렸을 적부터 손재주가 좋았던 나는 음식 만드는데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셈과 영업에 능했던 언니는 홀에서 날아다니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매출도 늘었다. 대학교 근처라 손님이 없는 방학기간에는 둘이 두 달간 가게 문을 닫고 일본으로, 태국으로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그렇게 고생한 만큼 우리에게도 방학을 선사했다.
지나고보니 언니가 아니었으면 애초에 엄두도 못냈을 일이다. 늘 칠렐레 팔렐레 하고 싶은 것들만 쫓아그렇다 할 결과가 없었던 삶에 기둥처럼 굳건히 버텨주었던 사람. 나는 그런 언니의 속을 무지하게 썩였던 것 같다. 언니는 내가 열일곱이던 시절 본인의 부재를 늘 미안해했다. 어쩌면 그 죄책감에 나의 말도 안 되는 응석들을 받아주었고 나는 당연한 권리인 양 언니에게 무례하게 굴었다. 겨우 두 살 차이 마냥 어른이라고도 할 수 없는 나이였고, 나의 치기 어린 마음들을 받아줄 마땅한 의무도 없었다. 언니도 어른은 아니었고 힘들었으니까.
덕분에 가게사장소리도 듣고 언니가 아니었다면 못했을 일도 가능하게 만들어주어서 나는 그저 품고만 있었던 꿈의 부화를 맞이했고 날아갈 힘을 얻게 되었다. 달달한 밤은 우리에게는 추억 그 이상의 공간이다. 눈을 감으면 그 공간의 감촉, 냄새까지 전해져온다. 새벽 네시, 업장을 마감하고 늦은 끼니를 챙기며 서로 맥주잔을 기울였던 그 기억이 생생하다. 깔깔 웃고 때로 울고, 섭섭함과 미안함이 교차했던 그 시간들이 결국 우리에게는 달달한 밤이 아니었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