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웨이트, 알 함라 타워, 412.6미터
세상의 그 적막을 표현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사람이 내는 소리, 양들의 울음소리,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벌레들이 윙윙거리는 소리, 우리 생활의 배경을 이루는 생명의 소리, 이 모든 소리가 그쳐 버린 겁니다.
- 타임머신, 허버트 조지 웰스 소설선집, 김석희 옮김, 열린책들(2011), p.141.
라스코 동굴 벽에 그려진 오록스는 가축으로 기르는 소의 조상 격인 거대한 솟과 동물이다. 몸은 흑색 혹은 짙은 갈색이었고 어깨까지의 높이가 180센티미터, 무게는 1,000킬로그램에 육박했으며 뿔 길이만 80센티미터 정도였다. 약 2만 년 전 인도에서 처음 출현했고 유라시아 오록스, 북아프리카 오록스, 인도 오록스까지 총 세 종류의 아종 야생 오록스가 있었다. 이중 유라시아 오록스만이 가장 늦게까지 살아남았다. 로마 시대 원형 경기장에서 소싸움이 인기를 끌어 많은 오록스가 희생되었지만 그때까지도 유럽 전역에 널리 분포하고 있었다. 이후 무분별한 사냥이 멸종 직전까지 지속된 결과 13세기 무렵에는 아주 적은 수만이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몰다비아, 트란실바니아, 동프로이센 등지에서만 발견되었다. 오록스의 숫자가 줄어들자 사냥은 귀족만의 특권이 되었다가 시간이 흘러 개체 수가 더 감소했을 때는 왕실 사람만이 사냥할 수 있었다.
극소수의 오록스만 남게 되자 폴란드 왕실은 사냥을 중단하고 사냥터지기를 고용해 오록스를 관리했다. 밀렵하는 자는 사형에 처할 만큼 강력한 조치였다. 현대적인 개념의 야생동물 보호가 아니라 사냥을 지속하기 위한 조치였지만 덕분에 마지막 오록스 무리는 폴란드의 야크토로프 숲에 여러 세기에 걸쳐 생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폴란드의 국왕 지그문트 1세와 그의 후계자 지그문트 2세는 이전의 왕들보다 오록스 보존에 관심이 없었고 1572년 이후에는 폴란드의 정세가 극히 불안해지면서 왕권이 약해지자 오록스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결과 개체 수는 한 자릿수로 줄었다. 1604년, 폴란드 왕실은 몇 마리 남지 않은 오록스와 서식지를 보존하기 위해 가능한 방법을 총동원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가축에게서 옮은 질병과 먹이 경쟁도 오록스의 멸종을 앞당겼다. 1564년에 38마리였던 오록스는 1566년에는 24마리, 1602년에는 4마리만 생존했다. 1620년 마지막 수소가 죽었고 1627년 마지막 암소가 자연사하면서 끝내 절멸했다.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 오록스의 멸종사를 조사하면서 다시 느꼈다. 선사시대부터 살아온 오록스가 원형 경기장에서 죽임을 당하고 화살과 창에 맞아 죽고 병에 걸려 신음하다 먼지처럼 사라지는 광경이 생생하게 눈앞에 그려졌다.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인류는 오록스를 지킬 수 있을까?누구나 시간을 되돌리고 싶을 만큼 후회하거나 고통스러운 기억이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되돌리기 위해 과거로 돌아가 고군분투하는 연인이나 인류를 구원하고 테러를 막기 위해 과거로 가는 영웅의 이야기는 소설이나 영화를 통해 수많은 방식으로 변주된다. 주인공은 모두 목숨을 바쳐서라도 소중한 존재를 구하기 위해 노력한다.
동물의 멸종을 막기 위해 시간 여행을 하는 이야기는 없다. 그러나 세상에서 사라진 동물을 복원하려고 애쓰는 과학자들은 어떤 면에서는 시간 여행자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록스 복원계획은 1835년, 폴란드의 동물학자가 처음으로 제안했고 적극적인 시도는 거의 1세기가 지난 1920년대와 1930년대에 걸쳐 독일의 헤크 형제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들은 오록스의 특성을 보유한 품종의 선택 교배로 원형을 복원하고자 시도했다. 그 결과 형태적으로는 비슷한 소가 태어났지만 뿔의 형태와 거대했던 몸집까지는 복원할 수 없었다. 지금도 과학자들은 오록스를 복원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돌이키고자 노력하는 이들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시도가 꼭 성공하기를 바란다.
미래와 과거를 오가는 시간 여행 이야기의 원류는 1895년 발간된 허버트 조지 웰스의 과학소설 『타임머신』이다. 서기 80만 2701년의 미래에 도착한 시간 여행자는 미래가 황폐하면서도 호화롭다고 느꼈다. 인류는 지상에 사는 아름답고 우아한 소인 종족 엘로이와 흉측한 몰골로 지하에 사는 소인 종족 몰록으로 분화해 있었다. 빈부 격차가 심해져 오랫동안 지상과 지하에 분리되어 살면서 외형마저 달라진 것이다. 지상의 인간은 양이나 소 같은 동물까지 모두 멸종시켰고 자신들이 원하는 예쁜 동물 몇 종만을 남겼다. 그들은 품종을 개량한 갖가지 과일을 주식으로 먹었으며 평화롭게 사는 듯했다. 그러나 어두운 밤에만 활동하는 지하의 인간은 고기를 섭취하기 위해 지상의 인간을 잡아먹으며 살고 있었다. 더 먼 미래로 떠난 시간 여행자는 인간과 동물이 전부 멸종한 시대에 도착하게 된다. 하늘은 새까맣고 공기도 희박한 지구에는 괴물같이 생긴 이상한 생명체만이 살고 있었다. 시간 여행자는 본래 살던 시간으로 돌아와 자신이 본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만 거짓말쟁이 취급을 받을 뿐이었다.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오겠다며 다시 떠난 시간 여행자는 이후 미래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생명을 파괴할 수는 있지만 창조하지는 못한다.
소설의 주인공이 경험한 것은 흥미진진하고 신나는 시간 여행이 아니라 인류와 지구의 암울한 미래였다. 미래의 사람인 엘로이와 몰록 종족은 인류의 노력으로 재창조한 자연 속에서 살고 있었다. 인류가 창조한 자연은 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무서운 비밀이 있는 불안정한 세상이었다. 황폐하면서도 호화로운 소설 속 미래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가 알던 모든 생명의 자취가 사라지고 괴물만 남은 캄캄한 지구의 모습은 터무니없는 상상만은 아니다. 지금처럼 동식물이 대규모로 사라지면 언젠가 생태계가 무너지는 재앙이 닥쳐올 것이다. 인류의 지성으로 저지한다 하더라도 엘로이의 세상처럼 암울한 디스토피아가 될 것이 자명하다. 인간은 자연을 변형하고 생물을 멸종시킬 수는 있어도 생명을 창조할 수는 없다. 다시 끼워 맞출 능력도 없으면서 기계를 무턱대고 분해하며 노는 어린아이와 다를 것이 없다.
그림을 시작할 때는 내가 소녀와 동물을 왜 이렇게 배치하고 구성하는지 모를 때가 많다. 그림을 완성하고 나서야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 깨닫곤 한다. 그림 속 소녀는 오록스의 등에 올라타고 오록스가 아주 많았던 시대로 여행을 떠나고자 한다. 자신을 태워 줄 수 있는지 오록스에 물은 후 그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 소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 오록스의 표정은 소녀의 청에 대한 답변이다. 그림 속 배경이 되는 건물은 쿠웨이트에서 가장 높은 초고층 빌딩인 알 함라 타워다. 지상 80층에 높이 412.6미터로 2011년에 완공되었고 현재 세계에서 열입곱 번째로 높다.
여러 번의 역사적 대멸종은 불가항력적인 외부 요인으로 일어났지만 기원전 1만 년에서 지금까지 일어나는 광범위한 멸종은 인간에게 큰 책임이 있다. 정확하게 추정할 수는 없지만 현재 추세라면 매년 약 14만 종이 멸종위기에 처할 수 있다고 한다. 돌이킬 수 없이 생태계가 파괴되면 인간도 당연히 위험하다. 이미 기후 변화의 파괴적인 영향이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인간의 지성이 아무리 뛰어난들 자연을 정복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고 따르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다. 소설 속 시간 여행자는 여행에서 돌아오지 않고 가장 아름답고 풍요로운 시대에 정착했을지도 모른다. 그곳이 아주 먼 미래이든 과거이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은 아닐 것이다. 모든 시간 여행자가 머물고 싶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것인지 공포에 질려 황급히 떠날 세상을 만들 것인지, 선택도 그에 따른 책임도 우리 몫이다.
"The Aurochs - Bos primigenius bojanus, the ancestor of domestic cattle, lived in this forest Jaktorów until the year 1627."
참조
『타임머신』,허버트 조지 웰스 소설선집, 김석희 옮김, 열린책들(2011), p.141.
http://www.iucnredlist.org/details/136721/0
http://www.petermaas.nl/extinct/speciesinfo/aurochs.htm
https://en.wikipedia.org/wiki/Aurochs
멸종동물, 멸종위기동물, 기후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