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오전 10시, 이 대표는 회사에서 두 블록 떨어진 빌딩 4층으로 올라갔다. 회계법인 '세영'. 10년째 거래해 온 회계사무소였다. 창업하고 처음 세 달 뒤에 이 대표가 전화번호부를 보면서 전화를 돌려 구한 곳이었다. 그때 대표 회계사였던 홍 대표는 지금도 대표였다. 홍 대표는 그때 47세였고 지금 57세였다. 이 대표보다 13살 많았다. 이 대표는 홍 대표를 '대표님'이라고 불렀고, 홍 대표는 이 대표를 '이 사장님'이라고 불렀다. 이 바닥에서는 대표를 '사장'이라고 부르는 쪽이 오히려 예의였다.
"이 사장님, 오셨어요."
회의실 문을 열고 홍 대표가 맞았다. 홍 대표는 머리가 지난 10년 사이에 많이 빠졌다. 이 대표는 그게 나이 때문인지 회계사라는 직업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홍 대표의 머리가 빠지는 속도는 이 대표 회사의 성장 속도보다 빨랐다.
"네, 대표님. 잘 지내셨죠."
"저야 뭐, 매일 숫자 보고 살죠."
"저도요."
둘은 마주 앉았다. 테이블 위에 종이 자료 몇 장과 홍 대표의 노트북이 있었다. 이 대표 앞에는 아메리카노 한 잔이 놓여 있었다. 홍 대표 앞에는 녹차였다. 홍 대표는 몇 년 전부터 커피를 끊었다고 했다. 건강 때문이라고 했는데, 이 대표는 그 건강이 구체적으로 뭔지 묻지 않았다. 이 바닥의 예의였다.
"올 1분기 결산이랑, 작년 법인세 신고 관련해서 한 번 정리해서 보여드릴게요."
"네, 부탁드립니다."
홍 대표는 노트북 화면을 이 대표 쪽으로 돌렸다. 스프레드시트였다. 매출, 매출원가, 판관비, 영업이익, 법인세 비용, 당기순이익. 이 대표가 10년 동안 본 양식이었고, 10년 동안 이 대표는 이 양식이 익숙해지지 않았다. 숫자는 익숙한데 숫자가 의미하는 바는 매번 조금씩 달랐다.
"1분기 매출은 6억 2천만 원입니다. 전년 동기 대비 8% 감소했고요."
"네."
"영업이익은 4,700만 원. 전년 동기 영업이익은 7,200만 원이었으니까 많이 줄었습니다."
"네."
"이 사장님, 이 숫자 보시면 어떤 생각 드세요?"
홍 대표가 물었다. 홍 대표는 가끔 이런 식으로 물었다. 숫자를 보여주고 "어떻게 생각하세요" 하고. 처음엔 이 대표가 당황했다. 왜 답을 회계사가 안 주고 대표에게 물어보냐고 속으로 생각했다. 몇 년 지나서야 이 대표는 홍 대표의 의도를 알았다. 홍 대표는 이 대표가 자기 숫자를 자기 언어로 해석해 보는 훈련을 시키고 있었다. 숫자를 남이 해석해 주면 그건 자기 숫자가 아니었다.
"…매출이 줄었는데 영업이익은 더 많이 줄었네요. 비율로요. 비용 구조가 뻣뻣해졌다는 뜻이죠."
"맞습니다. 고정비 비중이 올랐어요."
"네, 작년에 서버 업그레이드하고 인력 유지하려고 하니까…"
"그리고 한 가지 더 보셔야 할 게 있는데요."
홍 대표는 화면을 스크롤했다. 다른 시트로 넘어갔다. 현금흐름표였다.
"영업활동 현금흐름이 1분기에 마이너스 8천만 원입니다."
이 대표는 숫자를 한 번 더 봤다.
"마이너스 8천이요?"
"네."
"매출이 6억 2천이었는데요?"
"매출이 발생한 것과 현금이 들어온 건 다르죠. 이 사장님 회사는 대기업 쪽 매출 비중이 크니까 수금 주기가 평균 90일이에요. 그러니까 1분기에 계약은 체결됐는데 실제 입금은 2분기나 3분기에 들어오는 건들이 있고요. 반면에 비용, 특히 인건비랑 서버비 같은 건 매달 고정으로 나가잖아요. 그 미스매치 때문에 1분기엔 현금이 빠졌습니다."
"네."
"지난 3년 동안 이 현금흐름 미스매치가 조금씩 커지고 있었어요. 매출이 성장할 때는 덜 눈에 띄었는데요, 매출이 줄기 시작하니까 이게 더 보여요."
이 대표는 숫자를 다시 봤다. 영업이익 4,700만 원과 영업활동 현금흐름 마이너스 8천만 원은 같은 분기에 있는 숫자였다. 장부에서는 이익이 났고, 통장에서는 현금이 줄었다. 이 대표는 이 차이가 회계의 본질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매번 이 간극을 보면 마음이 어지러웠다.
"이 사장님."
홍 대표가 잠시 노트북에서 눈을 떼고 이 대표를 봤다.
"네."
"3년 연속 흑자라는 거, 이 사장님 자부심이시죠."
이 대표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네, 뭐… 그게 저한텐 중요한 숫자였어요."
"저도 이 사장님 회사가 흑자 돌아섰을 때 정말 기뻤어요. 10년째 담당하면서 고생하셨으니까요."
"네."
"근데 이 사장님, 흑자라는 건 회계상의 숫자예요. 현금이 실제로 남고 있냐는 또 다른 얘기입니다. 이 사장님 회사는 지난 3년 동안 회계상으로는 흑자였는데, 현금흐름상으로는 작년 1년만 플러스였어요. 재작년은 아슬아슬하게 마이너스였고, 그 전해는 더 크게 마이너스였어요. 정부 과제비랑 단기 차입으로 메꾸면서 넘어왔던 거예요."
이 대표는 펜을 내려놨다. 펜을 들고 있지는 않았는데 손이 펜을 든 자세였다. 손을 탁자 위에 올렸다.
"…그걸 제가 그동안 몰랐다는 건가요?"
"몰랐다기보다는, 이 사장님 시야에서는 흑자라는 한 가지 지표가 더 크게 보이셨던 거죠. 결산 때마다 제가 현금흐름표도 같이 드렸고, 저희 세무사 김 과장이 분기마다 현금흐름 정리해서 보내드리긴 했는데요."
홍 대표는 말을 골라가며 했다. 이 대표를 비난하지 않으려고 신경 쓰는 게 느껴졌다.
"이 사장님 바쁘시잖아요. 보내드린 자료를 다 꼼꼼히 보시기는 어렵죠."
"네."
이 대표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3년 연속 흑자. 이 대표가 지난 3년 동안 투자자 앞에서, 은행 앞에서, 직원들 앞에서, 아버지 앞에서, 지영 앞에서 되풀이해서 쓴 문장이었다. 그 문장이 거짓말은 아니었다. 장부상 흑자인 건 맞았다. 그런데 그 문장 뒤에 있어야 하는 다른 문장이 있었다는 걸, 이 대표는 홍 대표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제대로 봤다. 현금흐름은 다른 이야기였다. 다른 이야기라는 걸 이 대표도 알고는 있었다. 아는 것과 매일 아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이 사장님, 너무 걱정 마세요. 이건 이 사장님 회사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B2B로 대기업 상대하는 스타트업 대부분이 겪는 일입니다. 수금 주기 길고 비용은 매달 나가고."
"네."
"중요한 건 이 패턴을 알고 운영하시는 거예요. 알고 운영하는 거랑 모르고 운영하는 거는 같은 숫자라도 다른 일이에요."
이 대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 혹시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홍 대표는 잠깐 생각했다. 홍 대표는 질문에 바로 답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답이 있어도 몇 초 뜸을 들이는 사람이었다. 이 대표는 홍 대표의 그 뜸이 신뢰를 만드는 부분이라는 걸 오래 전부터 알았다.
"세 가지 있어요."
홍 대표가 손가락을 하나 폈다.
"첫째, 중견기업 비중을 늘리세요. 대기업은 단위가 크지만 수금이 느립니다. 중견기업은 단위가 작은 대신 수금이 상대적으로 빨라요. 현금 회전이 좋아져요."
이 대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대표가 이미 작년부터 하고 있는 방향이었다. 홍 대표도 그걸 알고 있었을 거였다. 그래도 한 번 더 확인해 준 거였다.
"둘째, 지출 구조를 점검하세요. 특히 서버비랑 라이선스비 같은 건 매년 관성으로 결제되는 게 있어요. 이 사장님 같은 개발 중심 회사는 한 2~3년에 한 번은 전면 점검이 필요합니다."
"네."
"셋째는…"
홍 대표는 잠깐 뜸을 들였다.
"인건비예요."
이 대표는 잠깐 가만히 있었다. 홍 대표는 이 대표의 얼굴을 봤다.
"이 사장님이 가장 어려워하시는 거 압니다. 그런데 지금 이 사장님 회사 인력 구조가, 15명 규모였을 때 짜인 구조 그대로예요. 두 명 나갔는데도, 그때의 R&R 그대로 돌아가고 있거든요. 매출 사이즈가 작아졌는데 고정 인건비는 전혀 안 줄었어요. 한 명을 더 내보내라는 얘기를 드리는 게 아니에요. R&R 재설계를 하셔야 한다는 거죠. 지금 12명이 하는 일이, 12명 규모의 매출을 만들 수 있는 일로 재배치됐는지. 그걸 한 번 보셔야 해요."
이 대표는 이 말이 한 명을 더 내보내라는 뜻인지 아닌지 홍 대표의 표정에서 읽으려 했다. 홍 대표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냥 이 대표를 보고 있었다. 그 침묵이 홍 대표의 답이었다. 홍 대표는 더 명시적으로 말하면 월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회계사는 회계사의 선까지 말했고, 그 뒤로는 대표의 몫이었다.
이 대표는 노트에 '인력 R&R 재설계'라고 적었다. 적는 글씨가 평소보다 살짝 떨렸다. 펜이 떨린 게 아니라 손이 떨렸다. 이 대표는 자기 손의 떨림을 노트 위에 남기지 않으려고 글씨를 살짝 눌러 썼다.
미팅은 한 시간 반쯤 걸렸다. 끝나기 전에 홍 대표는 한 가지를 더 말했다.
"이 사장님."
"네."
"잘 하고 계세요."
이 대표는 그 말에 잠깐 멈췄다. 홍 대표는 이 대표를 보면서 말했다.
"10년을 한 업에서 흑자 내면서 끌고 오신 분들이 많지 않아요. 이 사장님 같은 분이 계셔서 저도 이 일을 오래 할 수 있는 거예요. 오늘 숫자가 좋지 않은 얘기가 많았는데, 그건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점검이지 이 사장님이 잘못하셨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건 꼭 분리해서 들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네."
이 대표는 '네'라고만 대답했다. 다른 말이 안 나왔다. 홍 대표가 오늘 해준 말 중에서 가장 무거운 말은 '잘 하고 계세요'였다. 숫자 얘기보다 그 한 마디가 이 대표에게 더 많이 남았다. 왜 그런지 이 대표는 안다. 잘 하고 있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들어 본 게 언제였는지 이 대표는 기억이 안 났다. 투자자는 그런 말을 안 하고, 은행은 그런 말을 안 하고, 직원들은 그런 말을 안 했다. 그 말이 이 대표에게 오면, 대부분 이 대표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가는 말이었다. 홍 대표가 오늘 그 말을 이 대표에게 했다. 홍 대표는 이 대표의 숫자를 10년째 보고 있는 사람이었고, 그 사람이 '잘 하고 계세요'라고 말한 건, 이 대표가 스스로에게 해 본 적 없는 평가였다.
회의실을 나오면서 이 대표는 살짝 목이 메는 걸 느꼈다. 이런 쪽으로 목이 메는 건 오랜만이었다. 이 대표는 그걸 감추느라 악수를 좀 힘있게 했다. 홍 대표도 힘있게 받아줬다.
"이 사장님, 다음 분기 때 또 봐요."
"네, 감사합니다."
이 대표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다. 1층 로비에 있는 벤치에 잠깐 앉았다. 5분 정도. 앉아서 핸드폰을 꺼내 메모장을 열었다. 오늘 들은 것들을 한 줄씩 적었다.
현금흐름, 매주 본다. 중견기업 비중, 연말까지 50% 목표. 지출 구조 점검, 이번 달 안에 시작. R&R 재설계, 박 팀장과 다음 주. 홍 대표님 말씀 — 잘 하고 있다.
마지막 줄을 쓸 때 이 대표는 잠시 화면을 봤다. 적어도 될까, 하는 망설임이 있었다. 적어 뒀다가 나중에 이 걸 다시 볼 때 낯간지러울 수도 있었다. 그래도 적었다. 오늘 같은 날 이런 말을 적어 두지 않으면, 이 말이 지워진 줄도 모르고 살 날이 또 올 거였다.
회사에 돌아와서 이 대표는 박 팀장을 자기 자리로 불렀다.
"박 팀장님, 시간 괜찮으세요?"
"네, 대표님."
박 팀장이 노트북을 들고 왔다. 이 대표는 박 팀장에게 홍 대표와 나눈 얘기 중 핵심만 정리해서 공유했다. 현금흐름 미스매치 얘기, 중견기업 비중 확대 얘기, 지출 구조 점검 얘기. 마지막으로 R&R 재설계 얘기도 꺼냈다.
"박 팀장님, 지금 우리 12명이 하는 일을 다시 한 번 지도로 그려 보려고 해요. 김 이사님 안식월 시작되면 기술 쪽 공백이 생기니까, 그 타이밍에 맞춰서 각자의 R&R도 조금 조정해야 할 것 같아요."
"네, 저도 그 생각은 좀 하고 있었어요."
"다음 주에 시간 잡아서 같이 해 볼까요?"
"네, 좋습니다."
"박 팀장님."
"네."
"한 가지 더 말씀드릴게요."
박 팀장이 이 대표를 봤다.
"저희가 올 상반기에 채용 계획 있잖아요. 그거 일단 홀드할게요."
박 팀장은 잠시 말이 없었다. 원래 상반기에 영업 쪽 한 명, 개발 쪽 한 명을 뽑기로 했었다. 최 과장이 나간 자리를 채우고, 김 이사 안식월 동안 개발 쪽을 보강하려고.
"…알겠습니다. 기간이 어느 정도 될까요?"
"당분간은요. 정확한 시점은 제가 현금흐름 상황 보면서 다시 말씀드릴게요. 이 결정은 제가 한 거고 박 팀장님 책임이 아니니까, 팀원들이 왜 채용이 늦어지냐고 물으면 편하게 대표가 결정한 거라고 말씀해 주세요."
박 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박 팀장은 더 묻지 않고 자리로 돌아갔다. 이 대표는 자기 자리에 앉아서 화면을 잠깐 멍하니 봤다. 방금 이 대표가 한 결정이 오늘 한 일 중 가장 어려운 결정이었다. 채용을 홀드한다는 건, 지금의 12명에게 올해는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 대표는 그 부담을 더 얹는 결정을 한 거였다. 그런데 지금의 이 대표 회사에서 이 결정을 안 하면, 연말에 더 큰 결정을 해야 할 거였다. 더 큰 결정은, 누군가를 더 내보내는 결정이었다. 그걸 피하려면 지금의 이 결정이 필요했다.
이 결정을 박 팀장에게 먼저 말씀드린 게 오늘 이 대표에게는 중요한 변화였다. 예전 같으면 이 대표가 혼자 결정하고 혼자 고민하고 있다가 나중에 공유했을 거였다. 오늘은 홍 대표의 말을 듣자마자 박 팀장에게 왔다. 지난주에 김 이사가 한 말 때문이었다. '조금만 덜 혼자 있으면 돼요.' 김 이사가 돌아오면 이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 이 대표는 지영에게 낮에 있었던 회계사 미팅 얘기를 했다. 지영은 거실 식탁에서 듣고 있었다. 지영은 숫자를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직장 다닐 때 재무 쪽도 잠깐 했었다. 이 대표는 그래서 지영에게 숫자 얘기를 할 때 편했다.
"그러니까 현금흐름이 사실은 계속 간당간당했다는 거지."
"응. 내가 3년 흑자라고 생각한 게 반은 맞고 반은 맞지 않은 말이었어."
"반은 맞잖아."
"그런가."
"장부상 흑자는 흑자니까. 그거 만든 것도 대단한 거야. 다만 그 흑자의 현실적 여유가 네가 생각한 만큼은 아니었다는 거지."
이 대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영은 잠깐 말을 하지 않다가 물었다.
"여보, 우리 가계도 같이 보자."
"…우리 가계?"
"응. 회사 숫자 본 김에. 우리 집 가계 엑셀도 한 번 같이 펴 보자."
이 대표는 잠깐 멈췄다. 그런 제안을 지영에게 받은 게 처음이었다. 지영이 일을 그만둔 4년 동안 가계 엑셀은 지영이 혼자 관리해 왔다. 이 대표는 매월 카드 명세서 정도만 봤다. 큰 그림은 지영이 들고 있었다.
"…응. 펴 보자."
지영은 일어나서 안방에서 노트북을 가져왔다. 식탁 위에 노트북 한 대를 펴고 부부가 마주 앉았다. 지영이 매달 정리해 온 표였다. 지영이 연간 요약 시트를 띄웠다.
"여보, 매월 들어오는 건 여보 월급 650이야. 끝."
"응."
"매월 나가는 건 1,280. 합치면 매월 적자 630."
이 대표는 화면을 봤다. 매월 적자. 회사에서 봐 온 매월 적자가 회사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이 대표는 화면 위에서 처음 직시했다.
"…비상금은?"
"3,200만 원. 5개월 좀 안 돼."
부부는 잠깐 말을 안 했다. 식탁 위 형광등이 두 사람의 머리 위에서 일정하게 빛났다. 형광등의 빛이 평소보다 조금 더 차가워 보였다.
지영이 잠깐 호흡을 가다듬고 말했다.
"여보, 우리 사교육 좀 줄여야 해."
이 대표는 지영을 봤다. 지영이 그 말을 먼저 꺼냈다는 사실이 이 대표에게 잠깐 큰 무게로 왔다. 지영이 4년 동안 가장 양보 못 했던 영역이 사교육이었다. 지영의 정체성의 큰 부분이 '엄마'였고, 엄마의 가장 구체적인 형태가 아이들 교육이었다. 그 영역을 지영이 먼저 줄이자고 했다.
"…서준이 거?"
"응. 영어랑 수학만 남기고, 피아노 미술은 일단 정리하자. 좀 아쉽긴 한데, 그게 사실 우리 능력 안에 있는 거였어. 능력 밖에 있던 걸 우리가 무리해서 한 거야."
"…서진이는?"
"서진이는 그대로 둬. 더 줄일 게 없어."
지영의 그 한 마디가 이 대표 안에 박혔다. 더 줄일 게 없는 둘째. 첫째는 영유 3년에 월 340을 썼는데, 둘째는 공립유치원에 월 110이 전부였다. 두 아이가 자라면서 이 차이가 어떤 식으로 드러날지를 부부 둘 다 알면서 모르는 척했다.
"여보, 차량은?"
"처분하면 매월 60. 보험 합치면 80쯤 줄어."
"불편한 거랑 매월 80은 비교가 안 되지."
"응."
이 대표는 화면을 다시 봤다. 사교육 줄이고 차량 처분하면 매월 적자가 630에서 480이 됐다. 비상금이 5개월에서 6.7개월로 늘었다. 1.7개월의 차이였다. 그 1.7개월이 부부에게 작은 숨이었다.
"…아파트는 어떻게 할까?"
이 대표가 물었다. 지영은 잠깐 말을 안 했다.
"팔면 어디서 살아?"
"다른 동네로 가면 되지."
"…서준이 학교 어떻게 해?"
그 질문 앞에서 두 사람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 강동구로 이사 온 가장 큰 이유가 학군이었다. 4년 전 두 사람이 영끌해서 이사 온 이유.
"여보, 아파트는 일단 나중에 보자. 지금 바로 결정할 게 아니야." 지영이 말했다.
"응. 그러자."
이 대표는 그 결정 — 결정하지 않기로 한 결정 — 을 받았다.
"여보."
이 대표가 식탁 위 한 점을 보면서 말했다.
"응."
"우리 4년 전에 두 가지 결정을 같은 해에 했네."
지영은 이 대표를 봤다. 이 대표는 지영을 보지 않고 화면 위 한 셀을 봤다. 그 셀에 '아파트 매입: 2022년 5월'이 적혀 있었다. 그 아래에 다른 셀이 있었다. '지영 퇴사: 2022년 8월'. 두 셀이 같은 해 안에 있었다. 두 결정이 한 해에 같이 있었던 사실이 식탁 위에서 처음 한 화면에 떠올랐다.
"…그러게."
지영이 작게 말했다.
"각각의 이유는 있었지. 근데 두 결정을 한 해에 같이 한 건 우리가 좀 무모했어."
"그때 모든 부부가 그렇게 살았어. 우리만 무모했던 게 아니야."
이 대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시기 같은 동네에 살던 모든 부부가 비슷한 결정을 했다. 비슷한 무모함이 그 시대의 평균이었다. 평균이 이제 와서 누구의 잘못인지를 묻는 건, 답이 없는 질문이었다.
지영이 노트북을 닫았다.
"여보,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한 번에 다 결정할 수는 없어."
"응."
"다음 주에 한 번 더 보자."
"응."
이 대표는 노트에 한 줄을 더 적었다.
가계 — 사교육 220→130, 차량 처분, 비상금 6.7개월. 다음 주 재점검.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 이 대표는 거실에 잠깐 혼자 앉아 있었다. 오늘 이 대표는 회사에서 잘 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고, 박 팀장에게 어려운 결정을 공유했고, 지영에게 가계를 맡겨 두던 시간을 끝냈다. 세 가지가 한 날에 있었다. 이 대표는 그 세 가지가 다 자기를 가볍게 한 게 아니라, 자기의 무게를 다른 곳에 잠깐씩 나눠 둔 거라는 걸 알았다. 회사의 무게를 박 팀장이 한 칸 받았고, 가계의 무게를 지영이 한 칸 받았고, 자기에 대한 평가를 홍 대표가 한 칸 채워줬다. 세 칸이 비어 있던 자리에 세 사람이 들어왔다. 그게 이 대표가 오랫동안 거부해 온 일이었다. 거부해 온 이유는 단순했다. 혼자 다 짊어지는 게 대표의 일이라고 생각해서. 오늘 그 생각이 한 번 흔들렸다. 흔들린 자리에 사람이 들어왔다. 사람이 들어온 자리는 무거움이 줄어들지 않았다. 다만 외로움이 줄어들었다.
이 대표는 거실 등을 끄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지영은 이미 자리에 누워 있었다. 자고 있는지 깨어 있는지 이 대표는 어둠 속에서 알 수 없었다. 그 모름이 오늘은 평소보다 덜 무서웠다. 깨어 있어도, 잠들어 있어도, 옆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이 대표는 침대에 조용히 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