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밤 11시 40분이었다. 이 대표는 아직 회사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오늘은 새 투자자와 저녁이 있다고 했다. 지영은 이 대표가 '새 투자자'라고 말할 때 그게 어떤 투자자인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투자자는 투자자였다. 이름이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몇 년 전까지는 지영이 물어보면 이 대표가 회사 이름, 펀드 규모, 담당자 이름까지 술술 말해줬는데, 언제부터인가 이 대표는 '새 투자자'로 뭉뚱그려 말했다. 이름이 많아져서 일일이 말하기 귀찮아서였을 수도 있고, 이름을 다 말하기엔 결과가 분명하지 않은 미팅이 많아서일 수도 있었다. 지영은 후자 쪽이라고 짐작했지만, 확인한 적은 없었다.
지영은 세탁실에 있었다. 세탁기에서 오전에 돌린 빨래를 꺼내서 건조대에 널었다. 아이들 옷 먼저, 지영 옷 다음, 이 대표 옷 마지막. 세탁기 옆 바구니에는 이 대표가 어제 벗어둔 양복 재킷이 있었다. 드라이클리닝을 맡기려고 지영이 따로 빼둔 것이었다. 주머니를 확인해야 했다. 이 대표는 가끔 재킷 주머니에 영수증이나 명함을 넣어둔 채로 세탁을 보내곤 했다.
안쪽 주머니 지퍼를 열었다.
약 봉지가 있었다.
지영은 그 봉지를 꺼냈다. 일주일 전쯤 지영이 이미 한 번 본 봉지였다. 그때는 확인만 하고 도로 넣어뒀었다. 오늘 다시 봤는데, 봉지가 아까 전보다 홀쭉했다. 지영은 그 차이를 바로 알아봤다. 처음 봤을 때 봉지는 두툼했다. 약이 많이 들어 있었다. 오늘의 봉지는 얇았다. 봉지 안에서 약이 흔들리는 느낌이 달랐다. 한두 알밖에 안 남은 것 같았다.
지영은 세탁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앉고 싶어서 앉은 게 아니었다. 다리에 힘이 빠졌다. 세탁실은 좁았고, 건조대가 한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지영은 세탁기와 건조대 사이 바닥에 쭈그려 앉아서 약 봉지를 손에 들고 있었다.
일주일 전에 지영은 약을 세어봤었다. 세어보지 않으려다가 결국 세어봤었다. 10알 중에 6알이 남아 있었다. 처방이 10알 단위로 나온다는 건 지영이 검색해서 알았다. 4알을 먹은 상태였다. 6달 동안 총 6번쯤 먹었다는 얘기였다. 의사가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로 처방하는 게 보통이라고 지영은 이해했다. 이 대표는 그 기준 안에서 먹고 있었다. 지영은 그게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오늘 봉지는 얇았다. 지영은 손가락으로 봉지 겉을 더듬었다. 두 알인지 세 알인지 느껴지지 않았지만, 일주일 전보다 분명히 적었다. 일주일 사이에 두 알, 혹은 세 알을 먹었다는 얘기였다. 일주일에 두세 알. 그건 다른 숫자였다.
지영은 봉지를 무릎 위에 올려두고 그걸 한참 바라봤다. 흰색 종이 봉지. 의원 로고가 작게 인쇄되어 있고, 환자 이름 칸에 '이민수'가 손으로 쓰여 있었다. 글씨는 접수대 간호사의 글씨였다. 지영은 그 글씨를 오래 봤다. 이민수. 이 세 글자를 누가 봉지 위에 적었다. 지영이 아닌 다른 사람이 이민수의 이름을 적어놓고 약을 준 거였다.
봉지를 손바닥에 올려놓은 채로 지영은 자기 화장대 서랍을 떠올렸다. 거기에도 약이 있었다.
화장대 가운데 서랍, 왼쪽 칸. 항히스타민 한 통, 두통약 한 통. 그 옆 칸에 산부인과에서 받은 호르몬 보조제 한 박스. 그 안쪽에 가끔 먹는 수면 유도제 한 봉지. 지영이 4년 동안 매일 먹는 약과 가끔 먹는 약이 그 서랍 안에 모여 있었다. 항히스타민은 매일이었고, 두통약은 한 달에 4~5번이었고, 수면 유도제는 한 달에 한두 번이었다. 호르몬 보조제는 산부인과에서 처방받은 지 오래되지 않았다.
지영의 서랍을 이 대표가 본 적은 없었다. 화장대 서랍은 이 대표가 굳이 열 일이 없는 자리였다. 지영이 보여준 적도 없었다.
부부가 각자의 서랍에 약을 쌓고 있었다. 한 사람의 서랍 위로 부부가 서로 모르는 척을 한 4년이 있었다. 모르는 척이 양쪽이었다. 지영도 이 대표를 몰라줬고, 이 대표도 지영을 몰라줬다. 두 모름이 부부 사이에 어떻게 자리 잡았는지를 지영은 세탁실 바닥에서 처음 정직하게 봤다. 두 모름은 사랑의 다른 이름이라고 부부가 각자 믿어왔다. 4년이 지나서 그게 사랑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 그냥 모름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지영에게 처음 왔다.
지영의 눈 앞이 잠깐 흐릿해졌다. 지영은 눈을 한 번 꽉 감았다가 떴다. 세탁실 형광등이 눈에 더 밝게 보였다. 지영은 양복 재킷을 집어 들었다. 약 봉지를 다시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지퍼를 잠갔다. 재킷을 바구니에 도로 넣었다. 손이 약간 떨렸다.
지영은 세탁실에서 나왔다. 나오면서 세탁실 문을 살짝 닫았다. 거실에 불은 하나만 켜져 있었다. 식탁 위에 차가 한 잔 놓여 있었다. 조금 전에 지영이 마시려고 따라 놨던 차였다. 지영은 거실로 돌아가서 그 차 앞에 앉았다. 차는 이미 식어 있었다.
지영은 한참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핸드폰도 안 봤고, TV도 안 켰고, 책도 안 폈다. 그냥 식탁에 앉아서 앞에 놓인 식은 차를 보고 있었다.
먼저 묻지 않기. 지영이 4년 전에 자기와 한 약속이었다. 이 대표가 둘째 낳기 직전에 회사가 한 번 크게 흔들렸을 때, 이 대표가 그걸 지영에게 반년 뒤에 말했을 때, 지영이 스스로 세운 규칙이었다. 묻지 않지만, 내가 안다는 건 알게 하기. 티를 내되 캐지는 않기. 지영은 그 규칙을 4년 동안 지켜왔다. 지영에게도 쉬운 약속은 아니었다. 여러 번 흔들렸지만, 묻지 않는 편이 길게 보면 이 대표에게 좋다고 지영은 믿어왔다.
그런데 오늘은 다른 문제였다. 약이 늘어나고 있었다. 약이 늘어난다는 건 발작이 늘어난다는 뜻이었다. 발작이 늘어난다는 건 이 대표의 상태가 나빠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 건 묻지 않기 규칙과 다른 층위의 일이었다. 지영은 그 차이를 몸으로 알고 있었다. 규칙은 4년 전 상황을 전제로 한 규칙이었고, 오늘의 상황은 그때와 달랐다. 규칙이 규칙을 지킨 사람을 찌르는 순간이 있었다. 오늘이 그런 순간일 수 있었다.
지영은 자기 자신에게 물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떤 선택이 이 대표에게 좋은가.
선택지는 세 가지였다.
하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 기다린다. 이 대표가 먼저 말할 때까지.
둘, 이 대표에게 직접 얘기한다. 약을 봤다고. 상태가 어떤지 솔직히 말해달라고.
셋, 이 대표에게 직접 얘기하지는 않되, 이 대표의 병원에 동행하겠다고 제안한다. 다음 병원 가는 날 같이 가자고. 그러면 약 얘기를 꺼내지 않아도 이 대표가 알아들을 거였다.
지영은 이 세 가지를 차 앞에서 한참 고민했다. 하나는 안 되는 선택이었다. 이미 4년 동안 기다렸고, 오늘의 약 봉지를 보고도 또 기다리는 건 지영이 자기 자신을 지우는 일이었다.
둘은 직접적이었지만 이 대표에게 폭력적일 수 있었다. 이 대표가 4년 동안 숨겨온 것을 아내가 알고 있었다고 들이대는 건, 이 대표의 마지막 자존심까지 무너뜨리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이 대표는 그런 쪽으로 약한 사람이었다. 자기가 지키고 싶어한 영역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면 더 무너지는 사람.
셋은 완곡했다. 완곡했는데 전달은 됐다. 이 대표가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만 전달되는 방식. 지영은 이 방식이 이 대표의 사람됨에 맞는다고 생각했다. 이 대표는 직접 말하면 방어하는 사람이었고, 옆에서 제안하면 받아들이는 사람이었다. 그게 이 대표를 잘 아는 방식이었다.
지영은 세 번째를 골랐다. 오늘은. 오늘만큼은.
식탁 시계가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이 대표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지영은 핸드폰을 들어서 메시지를 보냈다.
여보, 어디야?
이 대표는 곧바로 답장했다.
조금 늦어. 미안. 30분 안에 도착할 것 같아.
응, 조심히 와.
지영은 답을 보내고 핸드폰을 내려놨다.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지영은 자기가 '조심히 와'를 오늘 또 썼다는 걸 의식했다. '조심히 와'는 지영이 이 대표에게 보내는 기본 인사말이었다. 조심히 오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었다. 지영이 '조심히 와'라고 쓴 건 조심히 오라는 뜻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나는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9년째 지영이 이 대표에게 그 네 글자를 보내고 있었다. 받는 이 대표가 그 의미를 다 읽고 있는지는 지영도 몰랐다.
지영은 일어나서 부엌으로 갔다. 이 대표가 먹을 간단한 야식을 준비했다. 된장국을 데우고, 밥을 반 공기 정도 퍼놓고, 지난주에 어머님이 주신 멸치볶음을 작은 접시에 담았다. 이 대표는 요즘 밖에서 식사를 한 날에도 집에 와서 조금씩 다시 먹었다. 속이 불편하다고 하면서 작은 그릇에 반 공기 정도. 지영은 그걸 '야식'이라고 불렀지만, 실은 '긴장해서 제대로 못 먹고 온 저녁'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 대표가 저녁을 제대로 못 먹었다고 말하지 않아도, 지영은 국을 데워뒀다.
이 대표는 12시 20분에 들어왔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조용했다. 아이들을 깨우지 않으려고 늘 조심하는 이 대표였다. 지영은 현관에 나가지 않았다. 식탁에 앉은 채로 기다렸다.
"여보, 아직 안 잤어?" 이 대표가 거실로 들어오면서 물었다.
"응, 기다렸어. 조금."
"늦게까지 기다리지 말지."
"뭐 좀 먹어. 국 데워놨어."
이 대표는 가방을 소파에 내려놓고 식탁으로 왔다. 양복 재킷을 의자 뒤에 걸쳐 놨다. 지영은 그 재킷이 아까 세탁실에 있었던 재킷이 아니라는 걸 알아봤다. 오늘 입은 재킷은 드라이클리닝 전의 다른 재킷이었다. 지영은 안도인지 실망인지 모를 감정을 느꼈다. 오늘의 재킷 안쪽에도 약 봉지가 있을 거였다. 이 대표는 재킷을 바꿀 때마다 약 봉지도 옮겼다. 그건 지영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이 대표는 씻지 않은 채로 국을 몇 숟갈 떴다. 밥을 반 공기 먹었다. 지영은 그걸 맞은편에 앉아서 봤다.
"오늘 어땠어?"
"그냥, 뭐."
"그냥?"
"응. 투자 얘기까지는 안 갔어. 그냥 친목 차원. 괜찮았어."
"응."
지영은 잠깐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살짝 호흡을 가다듬고, 미리 준비해둔 문장을 꺼냈다.
그 문장을 꺼내기 전에 지영은 자기 산부인과 다음 진료 일정도 잠깐 떠올렸다. 다음 주 화요일이었다. 지난번 호르몬 검사 결과를 받기로 한 날. 만약 이 대표의 병원 일정과 같은 주에 있다면, 어쩌면 그 주에 부부가 각자 한 번씩 병원에 가는 일이 같이 있을 수도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같이 가자고 말하면, 어쩌면.
"여보."
"응."
"다음에 병원 갈 때 나도 같이 가면 안 될까?"
이 대표는 숟가락을 국그릇 위에 내려놨다. 숟가락이 그릇에 닿는 소리가 평소보다 크게 났다. 식탁 위의 조명이 한 번 깜빡거린 것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깜빡거린 건 아니었다. 지영의 눈 앞만 잠깐 흔들린 거였다.
이 대표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영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식탁 위의 정적이 무거웠다. 지영은 자기가 너무 일찍 꺼냈나, 너무 늦게 꺼냈나, 하는 두 가지 후회가 동시에 오는 걸 느꼈다.
이 대표가 고개를 들어서 지영을 봤다.
"…언제부터 알았어."
목소리가 평소보다 약간 낮았다. 지영은 이 대표의 그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이 대표가 자기 자신에게 무언가를 확인할 때 쓰는 목소리였다.
"1년 좀 넘었어."
"…어떻게 알았어."
"재킷 드라이클리닝 맡기려고 주머니 확인하다가."
이 대표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고개를 숙였다. 지영은 이 대표의 정수리를 봤다. 머리카락이 조금 성글어 보였다. 이 대표는 바로 다시 고개를 들었다. 눈이 붉었다. 울고 있지는 않았다. 눈에 뭐가 차 있기 직전의 상태였다.
"지영아."
"응."
이 대표는 지영의 이름을 불렀다. 지영은 이 대표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 걸 몇 년 만에 들었는지 세어보려다 그만뒀다. 이름 부르는 횟수를 세는 건 슬퍼지는 계산이었다.
"내가 말했어야 했는데, 말을 못 했어."
"알아."
"왜 안 물어봤어."
"…너한테 물어봐야 할 타이밍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타이밍이 언젠지 몰라서."
이 대표는 잠깐 웃었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표정이었다.
"내가 말할 타이밍도 몰랐어."
"응."
둘은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영은 손을 뻗어서 이 대표의 손 위에 자기 손을 올렸다. 이 대표의 손은 차가웠다. 지영의 손은 따뜻했다. 지영의 손이 이 대표의 손 위에 있는 동안 이 대표의 손이 조금씩 따뜻해졌다.
"언제부터야?" 지영이 물었다.
"작년 가을부터."
"공황장애?"
"…응. 의사가 그렇게 말했어."
"약은 자주 먹어?"
"자주는 아닌데, 요즘 좀 늘었어."
"얼마나?"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이전엔 한 달에 한 번이었어."
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영이 약 봉지를 보고 계산한 숫자랑 이 대표가 말한 숫자가 일치했다. 지영은 자기의 계산이 맞았다는 사실이 슬펐다. 맞지 않았으면 좋았을 계산이었다.
"여보."
"응."
"다음 병원 언제야?"
"다음 주 화요일이야. 점심시간에."
"나도 가면 안 될까?"
이 대표는 잠깐 지영을 봤다. 지영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지영도 피하지 않았다.
"…응. 와."
이 대표는 그렇게 말했다. 한 글자씩 나왔다. 말하는 게 힘들어 보였지만, 말했다. 지영은 이 대표의 손을 한 번 더 꽉 쥐었다. 이 대표는 지영의 손을 쥐지는 않았다. 지영은 그게 서운하지 않았다. 오늘 이 대표가 쥐는 힘까지 내는 건 무리였다. 지영은 그걸 알았다.
이 대표가 샤워를 하러 가고, 지영은 식탁을 정리했다. 국그릇을 설거지하고, 행주로 식탁을 닦고, 의자를 밀어 넣었다. 이 대표가 벗어둔 재킷을 걸이에 걸었다. 걸면서 안쪽 주머니를 만졌다. 약 봉지가 느껴졌다. 지영은 그 봉지를 한 번 더듬기만 하고 꺼내지는 않았다. 꺼내는 건 이 대표의 일이었다. 지영은 오늘 자기가 할 일의 경계를 지키기로 했다.
지영은 거실 등을 끄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이 대표는 샤워 중이었다. 지영은 침대 옆 자기 자리에 누워서 천장을 봤다. 천장은 어두웠다. 이 대표가 매일 새벽 3시에 본다는 그 천장이었다. 지영도 오늘은 잠이 쉽게 올 것 같지 않았다. 조금 오랫동안 천장을 볼 예정이었다.
샤워 소리가 한참 들렸다. 보통 때보다 좀 길었다. 샤워기 물소리에 묻혀서 잘 들리지는 않았는데, 지영은 이 대표가 샤워실에서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울고 있다면 우는 대로 두는 게 맞았다. 이 대표에게는 혼자 울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지영이 그 공간까지 들어가는 건 안 되는 일이었다. 오늘 지영은 식탁에서 이미 많이 들어갔다. 더 들어가면 이 대표가 숨 쉴 자리가 없어졌다. 지영은 그걸 알았다.
샤워 소리가 멈추고, 잠시 뒤에 이 대표가 안방으로 들어왔다. 불은 켜지 않았다. 이 대표는 평소 자리에 누웠다. 누우면서 지영 쪽으로 몸을 돌렸다.
"지영아."
"응."
"고마워."
"뭐가."
"물어봐 줘서."
지영은 대답 대신 이 대표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어둠 속에서 이 대표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지영은 이 대표의 이마에 한 번 손을 댔다. 이 대표의 이마는 차가웠다. 샤워 뒤라 그런 것일 수도 있고, 긴장이 풀린 끝이라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지영은 손을 떼지 않았다. 손을 한참 대고 있었다. 손이 다 따뜻해지게.
"여보, 잘 자." 지영이 말했다.
"응, 여보도 잘 자."
이 대표는 그렇게 말하고 눈을 감았다. 지영은 이 대표의 이마에서 손을 떼고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천장을 봤다. 천장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지영에게는 오늘의 천장이 어제보다 조금 덜 막막하게 보였다. 묻지 않던 규칙이 오늘 하나 깨졌다. 깨진 규칙이 아픈 규칙이 아니라 낡은 규칙이었다는 걸, 지영은 오늘 처음 알았다. 어떤 규칙은 깨지기 위해 오래 지켜져 왔다.
옆에서 이 대표의 숨이 조금씩 깊어졌다. 지영은 그 숨소리에 자기 숨을 맞춰서 호흡했다.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지영도 조금씩 잠이 왔다. 오늘은 이 대표가 먼저 잠들었다. 지영은 그게 이상하게 반가웠다. 이 대표가 먼저 잠든 밤은 오래간만이었다.
다만 지영은 잠들기 직전 한 가지를 알았다. 다음 주 화요일에 부부가 각자 자기 병원에 갈 거였다. 같은 주, 다른 진료실. 그게 부부가 가진 새로운 형태였다. 같이 가지는 못해도 같은 주에 가는 것. 그게 시작이었다. 시작은 늘 작았다. 시작이 작은 게 부부의 잘못은 아니었다.